이동은 감독의 영화는 무해하다. 쿨하고 예의바른 연출자의 성격을 닮은 그의 인물들은 다른 사람에게 폐를 끼치느니 자신의 마음에 생채기를 내는 쪽을 택한다. 날것의 감정을 드러내는 영화에 익숙한 국내 관객에게 그의 영화는 다소 심심하고 답답하게 느껴질 수도 있다. 하지만 ‘괜찮다’는 말로 위장한 두려움과 불안의 감정을, 이동은 감독은 누구보다 집요하게 탐구할 줄 아는 연출자이며 그의 영화를 보면 이토록 담담하고 섬세하게 감정의 격랑을 좇는 연출자가 우리에겐 더 많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당신의 부탁>은 이동은 감독의 두 번째 장편영화로, 세상을 떠난 남편이 남긴 아들, 종욱(윤찬영)과 함께 살기로 결심한 30대 여성 효진(임수정)의 이야기다. 상실 이후의 삶을 딛고 새로운 관계 속에서 성장을 도모하는 인물을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이 작품은 이동은 감독의 전작 <환절기>의 연장선상에 있다.
-2013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시나리오 부문 당선작 <당부>가 원작이다. ‘당부’와 ‘당신의 부탁’은 어감이 좀 다른데.
=시나리오를 그래픽노블로 재구성하는 과정에서 <당신의 부탁>이라는 제목을 떠올렸다. ‘당부’라는 말이 요즘에는 문어체처럼 쓰이기도 하고, 모호한 느낌이 들어서 바꿨다. ‘당신의 부탁’이라는 제목은 3인칭으로도, 2인칭으로도 읽힌다는 점이 흥미로웠다. 이건 주인공 효진이 받는 부탁일 수도, 그녀가 연화(김선영)에게 하는 부탁일 수도 있다. 영화 속 등장인물 사이에서 오가는 여러 가지 부탁을 포괄적으로 의미할 수 있는 제목이라고 봤다.
-전작 <환절기>의 미경(배종옥)과 마찬가지로 <당신의 부탁>의 효진은 인생의 환절기에 다다른 인물이다. 혼란과 변화의 한복판에 있는 사람들에 대한 관심이 큰 것 같다.
=다른 사람들에게 내 얘기를 잘 안 하는 편이다. 힘들어도 아무렇지 않게 이겨낼 수 있다는 과잉된 제스처로 나 자신을 위장할 때가 많은데, 주변에서 ‘어, 너 되게 잘 살고 있구나, 얼굴 좋아 보인다’는 말을 들으면 복합적인 감정이 든다. 내가 그런 사람이라 인물들에게도 비슷한 시선을 주는 게 아닌가 싶다. 효진 역시 남편의 죽음 이후 우울증에 걸렸는데도 정상적인 애도의 과정을 거치고 있지 않는 모습을 보이잖나.
-한편으로는 5~6년 전 <환절기>와 <당신의 부탁>의 시나리오를 연달아 쓸 때, 대체 무슨 일이 있었는지 궁금하기도 하다.
=그즈음에 주변 분들에게 좋지 않은 일이 있었다. 장례식장을 많이 갔고, 상처도 많이 받았다. 나 역시 효진이 겪는 애도의 과정 속에 있었던 것 같다. 그래서 이런 이야기가 자연스럽게 나오지 않았나 싶고, 비슷한 두편의 영화가 나온 것 같다. 주제적인 면에서 두 영화 모두 애도의 과정과 상실의 아픔 이후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지만 영화를 완성하는 과정에서는 좀 다른 접근법을 택했던 것 같다. <환절기>는 인물에 몰입해서 쓰고 찍을 때에는 거리를 두려 했다면, <당신의 부탁>은 인물에 일정 거리를 두며 썼지만 촬영할 때에는 배우들과 함께 호흡하며 거리감을 좁혔다.
-효진은 세상을 떠난 남편의 배다른 아들 종욱을 키우게 되는데, 영화는 그 결심의 순간을 직접적으로 보여주지 않는다.
=(임)수정씨, 스탭들과 그 부분에 대해 이야기를 많이 나눴다. 아마도 효진은 어떤 이유가 있어서, 혹은 아이를 키울 준비가 되었기에 종욱을 데려왔다기보다는 덜컥 선택했을 것이다. 남편이 죽은 뒤 잘 사는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 공부방도 차리고 아둥바둥 열심히 살았던 것처럼. 나는 어떤 선택을 할 때 반드시 이유가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 이유는 보통 나중에 찾는 것 같다. 그보다 중요한 건 자기가 내린 선택을 믿고 가는 거라 생각한다. ‘선택하는 건 포기하는 거야. 그리고 포기하는 걸 받아들이는 거야’라는 효진의 대사처럼.
-팟캐스트를 듣고 임수정 배우에게 캐스팅을 제안하게 되었다고.
=그동안 <김혜리의 필름클럽> 팟캐스트를 청취자로서 재미있게 듣고 있다가, 지난해 2월 <당신의 부탁>의 캐스팅을 고민하는 과정에서 불현듯 수정씨가 떠올랐다. 사람을 판단할 때 목소리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편인데 팟캐스트를 들어보니 수정씨에게 여러 가지 목소리가 있더라. 개구진 목소리, 편안한 목소리, 예민한 목소리…. 그렇게 수정씨가 지닌 다양한 목소리가 효진의 다양한 모습과 어울리겠다고 생각했고 실제로도 그랬다.
-효진과 종욱의 공통점은 무해하다는 거다. 두 사람 모두 각자의 삶을 주제넘게 침범하려 하지 않으며 누구에게도 폐를 끼치지 않는다. 이토록 쿨하고 단정한 인물들은 연출자의 반영인가.
=당연히 나와 닮은 점이 있을 것이다. 기본적으로 너무 노골적이고 징글징글하게 인물과 감정을 다루는 영화를 좋아하지 않는다. 최소한의 애티튜드를 가진 사람들의 이야기를 해보고 싶은 생각이 있었다. 자신의 모든 걸 내려놓지 않고, 밑바닥을 보는 인물도 없다보니 당신의 영화엔 왜 악인이 안 나오냐, 답답하다는 식의 얘기도 많이 들었다. 최근 그런 부분에 대한 고민을 하고 있다. 어쨌거나 나는 아주 아트하우스적인 영화를 만든다거나, 작가적 마인드가 더 강한 영화를 지향하는 건 아니기 때문에 동시대 관객과 호흡하고 싶은데, 관객과 어떻게 접점을 가질 수 있는지 고민하고 있다.
-종욱과 친구 주미(서신애)의 관계도 흥미롭다. 연인으로 오해할 만한 상황 속에서 우정을 얘기하는 점, 아빠가 아닌데도 종욱이 주미의 아이를 책임지려 하는 모습이 그렇다.
=스탭들의 해석이 가장 분분했던 관계다. (웃음) 어찌됐건 나는 어릴 때부터 같은 동네에서 자란 남자사람친구, 여자사람친구의 관계를 의도했다. 종욱은 아마 주미에게서 태어날 아이로부터 자신의 모습을 봤을 것 같다. 태어나면서부터 친엄마와 함께 살지도 못하고, 어른들의 선택에 의해 이동을 해야 하는. 그래서 무모하지만 준비가 덜 되었지만 나중에 이 아이가 자기처럼 열병을 앓지 않길 바라는 마음에 아빠가 되어주고 싶다고 생각하지 않았을까.
-영화의 영제가 ‘엄마들’(Mothers)이다. 일면식도 없는 남편의 아들을 키우는 효진, 삶에 대한 분노를 딸에게 쏟아붓는 그녀의 엄마, 어린 시절 종욱을 키웠던 연화 등 다양한 엄마들이 등장한다.
=처음에는 ‘엄마’에 주목했다기보다는 역할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가족 안에서 스스로에게도 역할을 강요하고, 타인에게도 역할을 강요하게 되는 상황에 대한 이야기를 생각하다보니 자연스럽게 엄마들에 대한 이야기를 하게 되었다. 다만 모계사회, 넓게는 여성의 연대에 성장하는 남성들을 편입시켜보고 싶은 욕심이 있었다. 그게 더 건강하다는 생각을 한다.
-어린 종욱을 키웠으나 이제는 무속인이 된 연화의 존재가 강렬했다.
=종욱의 모티브가 된 친구가 있는데, 그 친구의 친엄마- 연화는 종욱의 친엄마가 아니지만- 가 실제로 신병을 앓으셨다고 하더라. 어딘가로 사라진 엄마를 어렵게 수소문해 찾았더니 연화처럼 산속에 살고 있었고, 영화에서처럼 “미안하다, 힘들었지”라는 말을 했다고 한다. 나는 이 말이야말로 종욱이 듣고 싶은 말이었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힘든 순간 신을 찾는 이유와도 같은 말이라고 생각하고. 김선영 배우의 연기는 기대 이상이었다. 그동안 코믹한 역할을 많이 하셨고, 스케줄 문제로 사전에 자주 만나지 못해 걱정했지만 연화의 분량을 찍고 서울로 올라올 때 울컥하는 기분이 올라올 만큼 감응이 큰 연기를 선보이셨다.
-다른 독립영화 감독들보다 비교적 빠른 시일 내에 두 번째 장편을 개봉시켰다. 두 번째 영화를 찍으며 고민의 지점이 있었다면.
=내가 하고 싶어 하는 이야기는 중간 사이즈의 영화고, 장르로는 드라마에 가까운데 이런 작품에 대한 시장이 크지 않다보니 두가지 선택의 기로에 서게 된다. 투자사의 취향에 맞춰 인물과 스토리와 장르를 수정하는 방향이 있고, 더 예산을 줄여 독립영화로 완성하는 방법이 있는데 나는 지금까지 후자에 가까웠던 것 같다. 다음 영화 <니랑내랑>을 찍으면서도 이런 선택을 또 하게 될 텐데, 그때는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이 많다. <당신의 부탁>이 손익분기점만 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요즘 심리적으로 압박을 많이 받는지 늘 악몽을 꾼다. 어제도 시험을 치는데 시험지에 글이 안 써지는 악몽을 꿨다. (웃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