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레이애니메이션에는 가끔 애니메이터의 지문까지 전달될 정도로 아날로그적인 느낌이 흠뻑 묻어난다. 지금은 익숙한 기법 중 하나지만 1989년 <월레스와 그로밋>이 등장했을 땐 놀람의 연속이었다. 흉내낼 수 없는 고유의 질감과 독특한 캐릭터로 사랑받은 ‘월레스와 그로밋’의 아버지 닉 파크 감독이 오랜만에 장편 <얼리맨>(2018)으로 돌아왔다. 선사시대를 배경으로 한 다양한 볼거리, 원시인들의 기발한 축구경기 등 신선한 아이디어로 무장하는 등 안팎으로 한층 풍성해진 클레이애니메이션이다. 시대에 맞춰 여러 기술이 변화하기 마련이지만 때론 변하지 않아서 더 안심이 되고 좋은 것도 있다.
-이번엔 선사시대로 돌아갔다. <얼리맨>의 아이디어는 어떻게 시작됐나. 애니메이션의 특성상 프리 프로덕션이 처음 기획에서 많은 변화가 있었을 것 같은데.
=우선 소재가 끌렸다. 어딘가 어설프면서도 때로는 바보스러운 면이 있는 원시인들이 점토의 투박한 질감과 순수함과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다만 원시인에 관한 단순한 모험영화를 만드는 것 정도에서 만족할 수 없었다. 아드만 스튜디오만이 만들어낼 수 있는 특별하고 기발한 작품을 만들고 싶었고 그 해답을 축구에서 찾았다. 지금까지 원시인들이 스포츠 경기를 즐기는 장면을 한번도 본 적이 없기 때문에 굉장히 좋은 아이디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를 구현하기 위해선 정말 할 일이 많았다. 원시시대를 표현하기 위해 스케치 단계부터 많은 아이디어가 가미됐고 그때마다 디자인 등 다른 부서에 내 생각을 온전히 전달하기 위해 수많은 피드백을 거쳤다.
-<월레스와 그로밋> 시리즈, <치킨 런>(2000) 등에서 선보인 독특한 캐릭터 디자인이 이번에도 등장한다. 특히 인물의 얼굴은 트레이트마크처럼 닮았다.
=특별한 의도가 있었던 건 아니다. 캐릭터 구상 단계에서는 이번 영화의 주인공인 ‘더그와 호그놉’이 ‘월레스와 그로밋’과는 다른 모습이 되길 원했다. 그럼에도 아드만 스튜디오의 캐릭터들에 기본적인 공통점이 있는 게 사실이다. 내 작품의 DNA적 특성상 넓은 앞니와 커다란 퉁방울 눈, 커다란 주먹코와 입 등은 기본적으로 닮을 수밖에 없다. 사실 그게 효과가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디자인 외의 특질은 확연히 구분된다. 가령 그로밋은 사람 같은 측면이 더 강한 반면에 호그놉은 호기심 많은 강아지의 성격을 더 많이 가지고 있다. 그로밋을 개로 취급하면 아마도 그로밋이 굉장히 기분 나쁘게 생각할 것이다. 그로밋은 자신이 좀더 사람스럽고 고상하며 지적인 존재라고 생각하니까. (웃음)
-<치킨 런>의 모티브는 1960년대 영화 <대탈주>였다. 이번 작품도 모티브가 있나.
=물론이다. 레이 해리하우젠의 영화들이 나에게 많은 영향을 끼쳤고 초반 장면들에 그의 작품에 바치는 오마주들이 있다. 11살 때 나는 커다란 공룡에 온 마음을 빼앗겼다. 공룡을 너무 사랑했고 공룡의 모습을 정말로 보고 싶었다. 하지만 커다란 영화 화면을 통해서는 본 적이 거의 없기에 내가 직접 그런 장면을 만들면 흥미진진할 거라고 생각했다. 물론 내가 바라는 상상은 과학적인 재현이라기보다는 공상과학에 가깝다. 그런 상상을 허락한다는 점에서 영화는 매력적이다. 영화에 ‘레이’와 ‘해리’라는 이름을 가진 공룡이 등장하는데 이는 위대한 애니메이터 레이 해리하우젠에게 감사와 존경을 표하는 의미이다.
-애니메이션이 원래 시간과 공이 많이 드는 작업이라고 하지만 클레이애니메이션은 특히 그렇다. 이번 영화는 제작기간이 12년이라고 하던데.
=쉽지 않은 작업이다. 하지만 온전히 12년이 걸린 건 아니다. (웃음) 5, 6년 정도 걸렸다고 말하는 게 좀더 정확한 표현이다. 대본을 쓰는 과정이 특히 오래 걸렸다. 스토리보드 작업과 기본적인 세팅을 하기까지 셀 수 없이 많은 회의와 토론이 이루어졌다. 캐릭터들을 정하는 일에도 인형을 만드는 사람들이 굉장히 많이 참여했다. 작가마다 서로의 개성이나 원칙이 달라서 다양한 퍼펫을 만들어 테스트했다. 애니메이터들이 퍼펫의 동작과 표정을 스케치하는 과정에도 오랜 시간이 걸렸다. 아드만에는 축구장만 한 크기의 스튜디오가 있는데 커다란 풍경을 보여주는 실내 장식부터 동굴을 재현한 작은 방까지 각각의 용도에 따라 다양한 크기로 섹션이 나뉘어져 있다.
-1989년 <월레스와 그로밋>이 첫선을 보였을 때와 비교하면 기술적으로도 많이 달라졌을 것 같다.
=기계적인 장비는 약간 달라졌지만 기술 자체는 똑같다고 보면 된다. 지금은 디지털카메라를 사용한다. 캐논도 사용하지만 주로 니콘 카메라를 사용하는 편이다. 디지털카메라로 모든 프레임을 촬영하는데 퍼펫이 아주 조금이라도 움직일 때마다 사진을 찍고 퍼펫을 또 움직이게 하고 다시 사진을 찍는 과정이 반복된다. 1초의 동작을 찍기 위해서는 이 과정을 약 12번에서 24번 정도 반복해야 한다. 그러니 시간이 오래 걸리는 건 당연하다. 물론 퍼펫들을 움직이게 하는 것 자체가 엄청난 스킬을 요구하지만 그게 다가 아니다. 퍼펫들이 실제 살아서 숨쉬는 것처럼 보이게 하는 것은 차원이 다른 기술을 요구한다. 이런 재능을 가진 사람들은 그렇게 많지 않다. 캐릭터들이 실물처럼 보이게 만드는 것이 아드만의 노하우다.
-에디 레드메인, 톰 히들스턴 등 유명 배우들이 목소리 연기를 맡았다.
=정말 재미있었다. 솔직히 이야기하면 너무 유명한 배우들이라 처음엔 살짝 긴장했다. (웃음) 하지만 그들은 너무나 친근했고 정확히 내가 원하는 것을 그대로 해내고 싶어 했다. 에디의 경우 내게 처음 더그의 나이를 물었고 15살 정도라고 답했더니 녹음할 때마다 15살 소년이 되어서 나타났다. 대단한 재능과 열정을 가진 사람이다. 톰의 경우 웃기는 순간이 너무 많았다. 특히, 누스 경이 마사지를 받는 장면에서 덜덜 떠는 목소리를 내기 위해 우리는 스튜디오 안에서 서로의 등을 두드려줬다. 스타 배우들에게 아주 비싸고 즐거운 마사지를 해준 셈이다. (웃음)
-애니메이션은 예쁘고 아기자기할 거라는 고정관념이 있지만 당신의 영화는 장르적인 접근이 다채롭다. 어떤 에피소드는 괴수영화 같고, 어떤 에피소드는 호러 같기도 하다.
=좋은 지적이다. 런던국립영화학교에 다녔던 게 소중한 자양분이 되었다. 그곳에서 난 영화를 만드는 것에 관한 모든 역사를 배웠다. 그 덕분에 애니메이터인 동시에 영화감독이 될 수 있었다. 나는 히치콕 감독을 비롯해 영화 역사 속의 훌륭한 감독들을 사랑한다. 스스로 언제나 영화감독이란 자각을 가지고 카메라의 사용이나 조명의 활용, 음악, 이야기의 전개 등 모든 것을 받아들이려고 애쓴다.
-기본적으로 슬랩스틱이 기반이다. 클레이애니메이션으로 구현될 때 어떤 시너지가 있는지.
=애니메이션은 매우 시각적인 매체다. 한편 점토는 손으로 만질 수 있기에 물질적인 성격이 강하다. 그 교차점에 슬랩스틱이 있다고 본다. 나는 항상 육체적인 코미디를 좋아했다. 버스터 키튼, 로렐과 하디, 톰과 제리 같은 캐릭터들 말이다. 이들은 사람의 심리나 성격을 개그의 소재로 삼을 줄 안다. 사람들의 행동방식이나 상호작용 관계에 대해서 재치 있고 유쾌하게 묘사하는 거다. 나 역시 그런 클레이 애니메이션을 만들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