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화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여자와 남자와 카메라. 이게 다다. 개 한 마리가 더해지면 더욱 바람직하다. 다른 사정은 없는 것이 차라리 낫다. 홍상수 감독의 스물한 번째 장편 <클레어의 카메라>(2016) 이야기다. 지난해에 개봉한 <그 후>(2017)보다 앞서 촬영됐고, 촬영지이기도 한 칸국제영화제(이하 칸영화제)에서 2017년 5월 나란히 월드 프리미어를 가졌던 <클레어의 카메라>가 극장에 도착했다. 영화 세일즈사 직원 전만희(김민희)는 칸영화제 출장기간 중 갑자기 회사 대표 남양혜(장미희)로부터 “순수하지만 정직하지 않아 함께 일할 수 없다. 정직함은 노력해서 얻는 것이 아니니까 이유는 알 필요 없다”는 해고 통보를 받는다. 만희는 모르지만 양혜는 세일즈를 맡은 영화감독 소완수(정진영)와 연인 관계였고 남자가 만희와 하룻밤을 보낸 사실을 알아차린 것이다. 어차피 비행기표도 바꾸기 어려운 터라, 만희는 곧장 귀국하지 않고 칸에서 며칠 더 생각이란 걸 해보기로 한다. 한편 친구 따라 영화제에 놀러온 교사이자 시인인 클레어(이자벨 위페르)는 시내와 바닷가를 거닐다가 완수와 양혜, 만희와 마주친다. 클레어는 파란 폴라로이드 카메라를 항상 들고 다니는데, 사진을 찍으면 찍은 사람도 찍힌 사람도 이전과는 달라진다고 믿는다. 우연히 클레어의 피사체가 된 세 남녀는 클레어가 보여준 상대의 폴라로이드를 계기로 진상을 파악하고 과거에 벌어진 일을 새로 음미하게 된다. 탐정을 연상시키는 복장으로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의 토끼 굴 같은 해변 지하보도를 드나드는 클레어는, 개별 캐릭터라기보다 이야기를 성립시키는 어떤 시선이며 우주를 작동시키는 힘의 현신으로 보인다(이를테면 클레어가 문제의 삼각관계를 인지하는 장면은 영화에 없으며 중요하지도 않다). 정도와 방식은 다르지만 <그 후>의 아름(김민희)과 <북촌방향>(2011)의 카메라 든 행인(고현정)이 영화 전체에 하나의 차원을 더했던 예와 비교하고 싶어진다.
클레어에 의하면 사물을 바꾸는 유일한 길은 모든 것을 다시 찬찬히 보는 것이다. 달리 말해 예술의 힘을 신뢰하는 아마추어 아티스트 클레어는 이 영화에서 진정한 사랑을 경험했다고 확언할 수 있는 유일한 인물이기도 하다. 또 인물들의 대사에 의하면 예술가의 능력은 성숙의 정도와 무관하며, 즉석 사진기의 셔터를 누르고 단순한 노래를 짓는 순간들이 진실을 현현하게 만든다. 과거의 시간에 다시 빛을 던지는 현재의 우연과 삶의 긍정적 변화 가능성에 대한 희망은, 여성 시점의 중심화와 더불어 최근 ‘홍상수 시네마틱 유니버스’에서- <누구의 딸도 아닌 해원>(2013), <지금은맞고그때는틀리다>(2015), <당신자신과 당신의 것>(2016), <밤의 해변에서 혼자>(2017)- 눈에 띄는 움직임이기도 하다. 홍상수 고유의 절묘한 타임라인의 교란과 재편은 <클레어의 카메라>에서 가장 미묘하고 투명하게 수행된다. 대신 근작들이 그러했듯 강화된 것은 ‘틈’의 파장과 깊이다. 여기서 ‘틈’이란 <다른나라에서>(2011)의 우산, <당신자신과 당신의 것>의 촛불, <밤의 해변에서 혼자>의 검은 옷 남자, 그리고 <클레어의 카메라>에서 이자벨이 호텔 옥상에서 찍었다고 말하는 만희의 첫 번째 사진처럼 설명 불가한 시공의 블랙홀이다. 감독의 말을 빌리면 “리얼리티를 가리키는 화살표를 줄곧 따라가다가 마지막 순간 비껴가는” 출구들이다. 클레어 드니 감독이 신작 <렛 더 선샤인 인>(2017)을 위한 인터뷰에서 들려준 설명은 홍상수 영화에 우연한 빛을 던진다. “이 영화의 장면들 사이에는 여백(void)이 있다. 장면 사이를 비스듬히 열어놓으면 그곳을 통해 나와 관객 사이에 연계가 생긴다. 구멍이 없다면 영화는 벽처럼 돼버린다.” 그리고 최근 홍상수 영화가 구조를 제지하고 영화의 정점을 양도하는 새로운 ‘틈’은 배우 김민희의 이미지다. <클레어의 카메라>에서 가장 눈부신 찰나는 상상 속 상대방에게 쓸쓸히 대꾸하는 만희의 옆모습이고 무시무시한 심연은 클레어에게 “찍지 마세요”라고 성내는 부서진 얼굴이다. 그에게 묻고 싶은 질문까지 돌려 담아 홍상수 감독과 서면 인터뷰를 가졌다.
-<클레어의 카메라>는 2016년 칸영화제 기간에 현지에서 9일 동안 촬영하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이자벨 위페르 배우의 <엘르>(2015)와 김민희 배우의 <아가씨>(2016)가 상영된 해로 기억합니다. 여러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했겠지만 <클레어의 카메라>의 시작이 궁금합니다. 예컨대, 칸에 간다는 결정 다음에 영화를 구상하셨는지요? 아니면 영화제에서 영화를 언젠가 찍으면 어떨까 하는 아이디어를 늘 갖고 계시다가 기회를 찾은 경우인가요.
=김민희씨와 이자벨 위페르씨가 그 영화제에 비슷한 시간대에 참석한다는 걸 알게 됐고, 두 사람 다 힘들 수 있는 촬영 스케줄에도 불구하고 참여하겠다고 했습니다. 각 배우의 비는 시간대를 최대한 이용해서 찍기로 했고, 일단 인물들의 직업을 정해 배우들에게 알려주었습니다. 혹시 몰라서 제 영화를 배급하는 화인컷에 배급 부스를 쓸 수 있냐고 물어서 허락을 받았습니다. 촬영 2~3일 전인가 도착했고, 장소를 보러 다녔고, 그때 해변에 연이어 있는 굴 비슷한 보행자통로- 어떤 건 하수구?- 들을 발견하게 됐습니다.
-언제나 우연에 개방적이고 행장이 가벼운 촬영 방식을 취해왔지만, <클레어의 카메라>의 경우 세계에서 가장 많은 영화인이 북적이는 영화제 와중에 전혀 통제할 수 없는 환경이었다는 점이 특별했을 것 같습니다. 이를테면 배우 중 두 사람이 다른 영화와 관련된 스케줄이 있었고 조연들의 캐스팅은 그 자리에서도 이루어지지 않았나 하는 짐작이 듭니다. <밤의 해변에서 혼자>에도 출연했던 마크 페란슨도 평론가로서 칸에 갔다가 당일에 전화를 받고 촬영을 다녀왔다고 들었습니다. 촬영 당시 기분이 기억나시는지요.
=(영화제 중심부를) 피하려고 한 건 아니고, 그냥 주변쪽 공간들이 원래 맘에 들었고, 그래서 덜 북적이는 곳에서 촬영을 했습니다. 한국에서보다 크게 힘든 건 없었습니다. 배우들의 다른 스케줄들은 받아들이고 거기에 맞췄습니다. 스탭 중 두명이 출연을 했고, 마크 페란슨씨도 거기에 왔다는 걸 알고 쓰게 되었습니다. 좀 정신없었지만 끝내는 보람 있었습니다.
-만희를 모호한 사유로 해고하는 영화 세일즈사 대표 남양혜 역을 장미희 배우가 연기했습니다. 감독님 영화에서 접하기 힘든 스타일의 연기자라고 생각합니다. 몇몇 이유로 <생활의 발견>(2002)의 명숙도 떠올랐습니다. (식당에서 헤어져야 할 이유를 놀어놓는 완수에게 “아니 뭘 말했어?”라고 받아치는 대사가 제겐 백미였습니다.) 어떤 흥미로움을 장미희 배우에게서 보셨고 어떻게 섭외가 이뤄졌나요? 더불어 정진영 배우와 작업하게 된 계기도 함께 말씀해주십시오.
=전부터 두분에게 다 관심이 있었고, 이번에 같이 하게 됐습니다. 기대했던 것보다 제 작업 방식에 잘 적응해주셨고, 정말 열심히 해주셨습니다. 영화에 큰 도움이 됐습니다.
-양혜가 영문 모르는 만희를 일방적으로 해고하는 대화가 거의 코미디로 느껴졌습니다. 양혜의 말 가운데 편의적으로 오용된 개념들 때문이었던 것 같습니다. “순수하지만 실수를 통해 정직하지 않은 너를 알게 되어 같이 일할 수 없다. 정직은 후천적으로 얻을 수 없다”라고 요약할 수 있는데, 사연을 알고 나면 만희가 해고된 이유가 된 행동은 정직성과 무관하고 실수도 아닙니다. 최근 들어 감독님 영화에서 자주 등장하는 정직 혹은 솔직이라는 개념에 대한 생각을 말씀해주실 수 있을까요.
=자신에게 솔직한 건 어렵지만 해야 하는 것이고, 남에게는 노력할 만한 일입니다.
-만희는 우연히 마주친 단편영화 감독에게 성숙과 영화 만드는 힘이 무관함을 말합니다. 또한 <클레어의 카메라>에서 예술의 힘을 가장 순수하게 긍정하고 있는 클레어는 아마추어 시인이자 사진가이기도 합니다. 감독님이 이와 관련해 생각하시는 바가 있는지요.
=성숙이란 걸 사회성이나 생활적 지혜 같은 걸로 정의한다면, 비성숙하고 창조적인 인간이 만든 물건이 어떤 때 성숙한 인간에게 도움이 될 수 있는 겁니다. 그때 정확히는 그의 성숙이나 이해가 그 물건을 만든 게 아니기 때문에 그럴 겁니다.
-(관련하여) <클레어의 카메라>는 제 기억엔 감독님 영화 중 처음으로 청소년 관람불가 등급이 아닌 영화인 것 같습니다. 결정의 배경을 말씀해주십시오.
=다른 영화와 마찬가지로 ‘청소년 관람불가’로 넣었는데, 영상물등급위원회에서 그렇게 나와서 그냥 받아들였습니다.
-이자벨 위페르가 연기하는 아마추어 예술가 클레어는 이야기에 개입하는 방식은 판이하지만 마치 <그 후>의 아름처럼, 하나의 캐릭터라기보다 이야기를 이야기로 만드는 어떤 시선 내지 우주를 움직이는 힘의 현신처럼 영화 안에서 기능합니다. 실망스럽지 않은 사랑을 해본 유일한 존재이기도 하고요. <클레어의 카메라>의 이야기를 짓는 과정에서 가장 먼저 만들어진 인물이었나요.
=만희란 인물과 거의 동시에 만들어진 것 같습니다. 혹시나 해서 가져간 카메라와 이자벨씨가 가져온 옷들 중 제가 고른 옷, 그리고 이자벨씨에 대한 저의 평소의 느낌, 그분과 같이하는 배우들과의 조합, 그런 것들을 받아들이다가 만들어진 인물입니다.
-클레어라는 이름으로 관객은 에릭 로메르의 <클레어의 무릎>과 클레르 드니 감독을 동시에 연상할 것 같습니다. 많은 이름 중 어떻게 클레어를 선택하셨어요.
=촬영 날 아침인가 이름을 지으려고 하는데, 정말 몇 프랑스 여자 이름이 떠오르지 않았습니다. 그중 클레어가 제일 편했고, 그래서 그걸로 했습니다. 지으면서 <클레어의 무릎>이 생각났고, 좀 걸렸지만, 상관없다고 생각했습니다.
-클레어가 선글라스까지 완전무장하고 해변의 지하보도로 들어가는 숏은 짧고 강렬합니다. 이 장면은 촬영 기간 중 언제쯤 어떻게 결정하셨나요.
=굴을 쓸 거란 생각은 말씀드린 대로 도착해서 제일 먼저 한 결정 중 하나고요, 촬영 순서는 거의 영화에서 보신 순서대로니까, 그날 아침에 구체적인 쓰임새는 결정되었습니다. 저도 그 신을 좋아합니다. 좀 연하게 표현됐지만 그 굴로 들어가고 나오는 게 영화를 타고 가는데 중요하니깐, 어떻게들 받아들였을지 궁금합니다.
-클레어는 탐정처럼 옷을 입습니다. 숄더백과 폴라로이드 카메라의 파란색은 도드라집니다. 옷차림과 소품은 배우와 상의를 통해 마련됐나요.
=이자벨씨가 두 트렁큰가 세 트렁큰가를 가져와서 도착하자마자 모든 옷을 맞춰보았고, 그 노란 옷과 모자가 좋았습니다. 그리고 파란 가방도 그 옷과 색 조합이 좋아서 골랐고요. 카메라 색도 좋아했습니다. 이자벨씨도 제 선택에 많이 만족해 했습니다.
-소완수 감독의 이름은 영어식으로는 아무개씨(So and so)로 들립니다. 배우의 연기와 무관하게 캐릭터로서 <클레어의 카메라>에서 가장 희망 없고 재미없는 인물이기도 합니다. 마치 감독의 관심 밖에 있는 것처럼. 작명 계기와 이 남성에 대해 어떻게 바라보시는지 알고 싶습니다.
=제 영화 속 인물들을 제가 어떻게 보는지 제가 말하면 안 좋은 것 같고요, 가능하면 안 하려고 합니다. 소는 그 소란 말의 느낌이 제게 있었고, 완수도 일단 수자가 들어가는 말이고, 완수란 말이 제게 주는 느낌이 또 있었습니다. 그게 다 주관적이고 꽤 명료한데 말로 안 옮기겠습니다.
-소완수는 도서관에서 망설임 없이 마르그리트 뒤라스의 <이게 다예요>를 뽑아 클레어에게 읽어달라고 청합니다. 잠깐 만난 젊은 만희를 향한 미련의 표현일까요? 클레어가 이 책을 시라고 지칭하는 것은 인용된 부분만 가리키는 말인지요.
=촬영 전에 도서관 섭외를 할 때 한권 빌려본 책이고요, 그중에서 고른 페이지입니다. 뒤라스란 사람 이름은 알았지만 전 그게 무슨 책인지 제대로 읽을 수도 없었고, 그 짧은 문장들이 있는 공백이 많은 페이지가 그냥 좋았습니다. 프랑스어 하는 친구에게 번역해달라고 해서 들어보니 괜찮았습니다. 전 그게 시집인 줄 알았습니다.
-만희와 이자벨이 따로 또 같이 보게 되는 카페의 회색 개는 역시 현장에서 영화 속에 들어온 우연인가요? 촬영 과정에서 개에게 무리는 없었나요.
=그 카페를 섭외한 이유가 그 개 때문입니다. 돌아다니다 그 영화에서처럼 길 한복판에 누워 있는 거대한 개를 보고 맘에 들었습니다. 그 카페 주인의 개였고, 카페 주인도 촬영에 호의적이었고, 적극적으로 도와줬습니다. 영화에 나오는 남자가 그 주인입니다. 개에겐 무리가 없었습니다.
-만희가 일하고 있는 첫 장면과 마지막 장면을 촬영한 실내 공간에서 <당신자신과 당신의 것> 포스터를 본 것 같은데 어디인가요? 마지막 숏도 같은 날 촬영됐는지, 만약 그랬다면 영화의 엔딩을 처음부터 얼마간 정해두고 있었는지요.
=제 영화를 해외배급해주는 화인컷의 배급 부스였습니다. 촬영 가기 전에 주인공 만희의 직업을 일단 배급사 직원으로 정했기 때문에 부스를 쓸 수 있도록 허락을 받아두었고, 촬영을 쭉 하다 보니, 영화제 막바지가 돼서 화인컷에서 부스에서 촬영할 건지 물어왔습니다, 오늘 안 찍으면 이제 짐을 다 치울 거라 부스를 찍을 수 없다고 해서요. 그래서 가서 찍은 게 첫 장면과 마지막 장면이 되었습니다. 영화를 처음 찍기 시작할 때 만희가 아침에 숙소에서 나오는 신부터 찍었는데, 부스에 간 김에 첫 장면을 새로 만든 겁니다.
-위와 중복되는 질문일 수 있겠습니다. <자유의 언덕>(2014)과 같은 예외도 있었으나 보통 영화에서 보는 장면 순서대로 촬영하십니다. <클레어의 카메라>는 대체로 순차적으로 이야기가 흘러가는 것 같지만, 명백한 플래시포워드와 플래시백이 초반에 있고, 소완수 감독의 영화가 공식 상영된 날 파티와 이어지는 만희와 클레어, 그리고 양혜가 찾아오는 밤 장면이 어느 쪽이 실제로 먼저 일어난 일인지 불분명합니다. 편집실에서 순서를 결정한 부분에 대해 듣고 싶습니다.
=말씀드린 첫 신과 소완수의 창가에 기차 지나가는 인서트를 빼고, 모든 신은 보신 그 순서대로 쓰고, 찍었을 겁니다.
-실제의 토끼 굴로 해변의 지하보도가 있다면, 이야기상으로는 클레어가 도착한 아침 찍었다는 호텔 옥상에서 사람들에 둘러싸여 있었던 만희의 사진이 불가해한 구멍이 아닌가 싶습니다. 만희는 정말 거기 있었을까요? 해변에서 클레어와 만희의 첫 만남을 촬영하기 전 가능했던 잠재적 스토리의 흔적일까요.
=편한 대로 보시면 됩니다. 감각적으로 열고 받아들이면 ‘이해함’으로는 잡히지 않는 경험이 생겨나길 항상 기대합니다.
-만희는 글을 쓸 때나 대화할 때 매우 몰입해 상체를 앞으로 기울입니다. 크루아제트 해변의 지하보도 아래를 푹 숙여 들여다보기도 하고요. <밤의 해변에서 혼자>에서 영희(김민희)가 꽃을 향해 몸을 접는 이미지가 기억났습니다. 김민희 배우의 수그린 어깨가 주는 감흥은 어떤 것인가요.
=이 영화 첫 장면에서 김민희씨의 그 꺾인 듯한 고개 숙임에 대해서 저도 여러 번 얘기했습니다. 배우의 자세 같은 것이 주는 표현의 힘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때가 많습니다.
-보태어, 클레어에게 만희가 노래를 들려주는 장면은 <밤의 해변에서 혼자>의 노래 신에 이어 천진한 아름다움을 만들어냅니다. 노래로 말미암아 감독님의 영화를 보다 감각이 확 깨어난 경험은 <해변의 여인>(2006)에서 고현정 배우가 수풀 속을 헤매다 흥얼거리는 장면이 처음이었던 걸로 기억합니다. 노래는 어떨 때 감독님의 영화 속으로 들어오게 되나요.
=다른 것들과 마찬가지로 아침에 쓸 때 저절로 결정되는 듯 보입니다. <밤의 해변에서 혼자>에 나온 노래는 촬영날 아침에 갖고 다니던 미니 피아노로 제가 지은 곡이고요, 이 영화에 나온 노래는 제가 촬영 몇달 전에 산책을 하다가 그냥 흥얼거리다 나온 노랜데, 그걸 계속 흥얼대다보니 나중에도 기억할 정도가 됐습니다. 그게 그날 아침에 쓸 때 기억난 겁니다.
-관습적 의미에서 아름다운 숏이 드물었던 감독님 영화에 김민희 배우가 합류한 이후 변화가 보입니다. 예를 들면 <그 후>의 택시나 <밤의 해변에서 혼자>의 해변, <클레어의 카메라>에서 폴라로이드를 돌아볼 때. 저의 선입견일까요.
=따로 더 “예쁘게 찍겠다”는 맘은 없었습니다. <밤의 해변에서 혼자>의 해변 신은 전에 누군가의 누운 뒷모습 뒤로 보여진 수평선을 기억했고, 그래서 조금 구도에 대한 주문이 특별했던 것 같고요, <그 후>의 택시 신은 필요에 의해서 잡은 구도와 김민희, 기주봉씨의 좋은 연기에 하늘에서 내려준 아름다운 눈이 더해져 된 신입니다. 이 영화에서 클레어가 뒤에서 찍고, 창가에서 돌아보는 만희의 숏은 찍으면서 곱게 되었다고 생각했습니다.
-만희와 양혜는 클레어에게 사진을 찍힌 다음 진실을 파악하고 변화합니다. 만희는 실제로 상처의 자리를 찬찬히 다시 보고 다시 대꾸합니다. 매우 아름다운 장면이며 전에 없던 보이스 오버가 활용되기도 했는데요.
=‘그 일’이 일어난 곳을 둘이 다시 찾아가는 장면은 제게도 중요한 장면이라고 생각하며 찍은 신입니다. 현장에서 장미희씨가 옆에 앉아 보이스 오버를 했고, 김민희씨는 그 목소리를 직접 들으면서 의자에 가서 앉았습니다.
-한편 아마 많은 관객이 만희와 양혜가 소완수의 한심함을 눈앞에서 확인하면서도 직접 반박하지 않는 것에 대해 갑갑해할 것 같습니다. 그녀들을 너그럽게 만드는 것은 무엇일까요.
=못난 소위 윗사람들이 더 똑똑한 부하 직원들, 더 순수한 어린 사람들과 어울리면서 계속 살아가는 걸 너무 오래 봐서 그런 걸까요, 그냥 그 정도로 할 거 같았습니다.
-감독님의 영화가 시간과 함께 세상을 더 따뜻하게 바라본다는 느낌은 오래됐지만 <지금은맞고그때는틀리다> 이래 감독님의 작품은 사랑과 예술이 삶을 개선할 수 있는 가능성에 대해 현저히 낙관적이고 희망적인 태도를 명시하고 있다고 느낍니다. 특히 <당신자신과 당신의 것>과 이번 영화가 그렇습니다. 실제로 어떤 관점의 변화가 있었는지요.
=어떤 변화가 있다면 좋겠습니다. 제가 원하는 건 압니다. 그걸 의식해서 할 수 있는 게 별로 없습니다. 매일 부닥치고 경험하고 만들 뿐입니다.
-비발디의 <사계> 중 ‘겨울’ 2악장이 영화를 열고 닫습니다. 중간에도 한번 흘렀던 것 같습니다. <사계> 전체 가운데에서도 템포가 느린 악장이고, 5월의 칸에서 쉽게 떠올릴 수 있는 음악은 아닙니다. 어떻게 선곡하셨습니까.
=촬영을 마친 다음날, 거기서 편집을 하는데 음악이 필요해서 뒤지다보니 컴퓨터에 원래 깔려 있던 몇개의 음악이 있었습니다. 그중 하나였는데, 너무 익숙한 음악이라 기대하지 않고 붙여봤는데 아주 잘 맞았습니다.
-이진근 촬영감독을 소개해주신다면요.
=건국대에서 저하고 수업한 학생이었고요, 졸업 후 한국영화아카데미에서 공부했습니다. 좋은 사람이고, 성실하고 유능한 사람입니다.
-올해 베를린국제영화제에서 공개된 <풀잎들>의 다음 작품에는 기주봉 배우가 출연한다는 사실만 알려져 있는데 지금 해주실 수 있는 이야기가 있을까요? <풀잎들>의 개봉은 언제로 계획하십니까.
=새로 찍은 영화에선 기주봉씨가 주인공 중 한 사람입니다. 영화는 올해 2월쯤 찍었습니다. <풀잎들>은 지난해 9월에 찍었고요, 개봉은 이르면 올해 가을이 될 거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