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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전> 그레이스 윤 프로덕션 디자이너 - 호러보다는 비탄에 잠긴 드라마
2018-07-05
글 : 김소미
ⒸBrian Goodwin

혈연과 가족 관계의 무시무시한 숙명을 오컬트로 풀어낸 <유전>은 한마디로 굉장한 경험이었다. 아직 얼떨떨하게 크레딧을 바라보고 있을 때쯤, 그레이스 윤의 이름이 어둠을 스치고 지나갔다. 운 좋게 그가 개인 홈페이지를 운영하고 있는 덕분에 메일로 <유전>에 대한 한국 관객의 흥미로운 반응들을 전했고, 며칠 안 되어 윤경진이라는 이름을 덧붙인 다정한 답장이 도착했다. 한국에선 미술감독이라는 호칭이 더 익숙하지만, 미국에서 프로덕션 디자이너는 그보다 넓은 범주에서 세트, 소품, 분장, 조명에 이르기까지 영화의 시각 요소를 예술성에 맞게 감독하는 직책을 의미한다. 디오라마 아티스트인 애니(토니 콜렛)의 처절한 심리 드라마이기도 한 <유전>은 인형의 집 속에서 악마의 손길에 몸부림치는 한낱 미물들을 지켜보는 섬뜩한 미술로 공포와 히스테리의 근원을 서서히 스크린에 물들인다. 생애 첫 오컬트 호러를 준비하며 때때로 악몽에 시달리기도 했다는 프로덕션 디자이너 그레이스 윤을 서면 인터뷰로 만났다.

-엔딩 크레딧에서 한국인의 이름을 발견하고 개인적인 궁금증이 일었다. 미국영화계에서 활동하게 된 배경은.

=미국에서 태어났고 한국과 미국의 언어, 문화가 혼용된 가정 환경에서 자랐다. 기본적으로 부모님은 내게 한국어로 말씀하시고 난 영어에 한글 단어를 조금씩 곁들이며 답하는 방식으로 대화한다. 내 정체성의 분명한 일부인 곳이기에 가끔 한국을 찾아 가족과 시간 보낸다. 나는 80, 90년대 서울이 거쳐온 변화무쌍한 궤적과 현재진행형의 도시 변화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는 편이다.

-파슨스 디자인 스쿨에서 공부하기도 했는데, 영화 미술로 입문한 계기가 무엇인가.

=미국 리버럴 아츠 칼리지에서 철학을 전공하면서 파슨스에서 운영하는 멀티플아트(기술과 결합해 단일한 예술작품이 아닌 복수의 작품을 기획 및 생산하는 디자인의 경향) 프로그램을 수료했다. 다양한 주제를 접하는 경험은 즐거웠지만 그때까지만 하더라도 직업적으로 어떤 방향을 추구해야 할지 감을 잡지 못했다. 비디오아트 수업까지 듣고서야 영화만이 나의 모든 관심사를 종합할 수 있는 활동이라는 결심이 섰다. 졸업 후 몇년간, 프로덕션 디자이너로 데뷔하기 위해 미술팀에서 일하는 동안 이 일이 내게 천직이라고 확신하게 됐다.

-심리 드라마와 오컬트가 호기롭게 결합된 <유전>의 시나리오를 읽고 받은 인상은.

=끔찍하고 지독한 사건들 아래서도 캐릭터의 다층적인 면모가 살아있었고, 특히 가족의 역학관계를 흥미롭게 다루고 있다고 느꼈다. 내게는 개인적으로 시나리오상에서 이미 스토리에 필수적인 미술적 요소가 명료히 언급된 점이 매력으로 다가왔다.

-아리 애스터 감독과의 첫 만남은 어땠나.

=시나리오를 읽은 후 아리 애스터 감독을 만났다. 캐릭터의 전사가 이미 풍부하게 구축된 상태였고, 미술의 중요성에 대한 믿음도 확고했다. 창의적인 수다가 주는 에너지를 즐길 수 있는 만남이었다. 애니의 집과 트리하우스 등의 평면도를 구상하는 프리 프로덕션 초반에는 나와 아리 애스터 감독, 그리고 파웰 포고젤스키 촬영감독이 매일 만나 장면 회의를 거쳤다. 두 사람은 내가 장면의 세부를 익힐 수 있게 각각의 카메라 움직임과 셋업을 매우 자세히 설명해줬고, 그것이 이후에 공간의 면적과 방의 배치도를 결정할 때 큰 도움이 됐다.

-<유전>의 프로덕션 디자인에서 가장 주안점을 둔 부분은.

=<유전>은 가족이란 얼마나 축복인 동시에 저주인가 하는 탐구를 담은 영화다. 가족은 서로에 대해 잘 안다고 생각하지만 그런 믿음이 상대를 향한 진정한 연민과 동정심에 방해가 되기도 한다. 사랑은 종종 해로운 방식으로 발현되지 않나. 애니의 죽은 엄마 엘렌은 자신이 가족에게 크나큰 축복을 내리고 있다고 진심으로 믿었을 거라 생각한다. 또 다른 중요한 테마는 가족의 죽음 이후 겪는 비통함이 어떻게 온전한 정신을 풀어헤치고 관계에 균열을 내는지 디자인적 측면에서도 고민하려 했다. 인물 곁에서 가장 현실적으로 보일 만한 환경을 조성하고 싶었던 동시에 여러 갈래의 주제를 시각적으로 묶어줄 만한 모티브와 컬러들을 적극적으로 사용하고자 했다.

-오컬트적 요소를 연구한 과정이 궁금하다. 파이몬 왕의 경우 특히 한국 관객에겐 매우 생소한 대상이었다.

=초자연적 현상의 이론과 실제를 담은 책들을 탐독했다. 특히 파이몬 왕에 관해 자세히 알기 위해서 악마학 서적과 이교도 의식들, 신성기하학, 약초학, 고대 문자들과 온갖 종교 상징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저술들과 이미지들을 뒤지고 다녔다. 영화 속 세계를 이루는 문화적 토대를 개발하는, 작은 조각들을 모으는 시간이었다. 이렇게 원재료들을 최대한 모은 뒤, 영화 디자인에 맞게 가공하는 과정을 거쳤다. 육체를 갈망하는 파이몬 왕의 상징은 집의 세부 디자인과 사소한 소품에도 모두 깃들어 있다.

-애니는 디오라마 아티스트이고, 그의 미니어처 집 속으로 카메라가 들어가면서 영화가 시작된다. 미술적으로 어떤 의미가 있다고 보나.

=영화 후반에 애니는 자신과 가족을 구하는 데 집중하기 위해 작업을 관리하는 에이전시를 잃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사실상 애니는 한번도 선택권이 없었던 사람이다. 애니의 집은 인형의 집을 연상시키도록 디자인되어 있고, 인형의 집 속에 놓인 미니어처 복제품들이 그렇듯이 애니와 가족들은 벗어날 수 없는 지독한 운명 속에서 저주받았다는 사실이 강조된다. 악마의 영혼이 그들을 인형처럼 가지고 노는 것 같은 느낌이다. 디오라마는 애니가 겪은 가장 최신의 일을 반영한다는 점에서도 핵심적인 시각 요소로 기능한다.

-애니의 집 인테리어에 관해 조금 더 말해줄 수 있나. 개인적으로는 창과 실내 조명이 흥미로웠다.

=첫 번째로 염두에 둔 부분은 각각의 방이 확연히 구분되는 시각적인 기표로 느껴지길 바랐다. 색채감, 공예품, 창문과 스테인드글라스, 실내 조명 등이 서사의 전개에 맞춰 함께 굴러가야 했다. 그중에서도 피터와 찰리의 방이 중요했다. 둘의 방은 비슷하면서도 서로 대조되는 지점을 가진다. 피터의 방이 10대 소년의 방처럼 어지럽다면, 찰리의 방은 예술가적인 혼돈이 느껴진다. 찰리의 방엔 얕은 단이 있고 A자형으로 천장 실링이 갖춰져 찰리가 가장 영적인 공간으로 느끼는 트리하우스가 또렷이 보인다.

-처음 작업하는 호러영화라는 점에서 힘든 점은 없었나.

=처음으로 디자인해본 호러영화인 건 맞지만 나는 <유전>이 아주 진지한 드라마라는 생각으로 접근했다. 호러영화다운 사건들은 인물들이 겪는 깊은 슬픔과 원치 않는 운명에 시달리는 과정이 어떤 것인지를 보여주는 일종의 징후라고 생각했다.

-<먹거나 먹히거나>(2016), <퍼스트 리폼드>(2017) 등 폴 슈레이더 감독과 꾸준히 작업한 것도 놀라운 성과다.

=신진 디자이너인 내게 기회를 준 폴에게는 늘 감사한 마음이다. 함께 일하며 느낀 폴 슈레이더는 새로운 영화 세계를 발굴하기 위해 끊임없이 연구하고 공부하는, 의지가 뛰어난 감독이다. 영화에 헌신하는 그의 태도에 깊은 존경을 느낀다.

-관심 있게 지켜보는 한국 감독이 있나

=<방황의 날들>(2006), <나무없는 산>(2008) 등을 만든 한인 감독 김소영을 좋아한다. 시적이고 내밀한 영화의 분위기를 영화 미술에서도 감지할 수 있다. 박찬욱, 봉준호 감독 역시 영화 미술을 매우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감독이라는 점에서 항상 관심을 가지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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