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비평]
<변산>이 기성세대의 영화에 머문 이유
2018-07-18
글 : 안시환 (영화평론가)
지금의 청년에겐 호시절이 없었다

<변산>은 얼핏 지금의 청년세대에 대해 이야기하는 작품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지금의 기성세대가 청년세대를 어떠한 관점에서 바라보는지를 드러내는 작품에 가깝다. 영화 초반부 학수(박정민)가 <쇼미더머니> 오디션에 참가하는 일련의 상황과 그의 서울살이를 보여주는 몇몇 장면을 제외한다면, <변산>은 학수가 고향으로 내려가 자신의 어두운 과거 속에 가장 빛나는 순간이 있음을 깨닫는 과정을 보여주는 데 주력한다. 자신을 가두고 짓누르는 쓰라린 기억을 피하지 말고 정면으로 응시하라고, 맞서 싸우라고, 그렇게 이겨내라고, 그럴 때 가장 빛나던 순간이 현재에 되살아날 수 있다고 말하는 영화가 바로 <변산>이다. 그것이 학수의 아버지(장항선)가 아들에게 뺨을 내어준 이유다. 하지만 <변산>에는 또 다른 아버지가 숨어 있는 것 아닐까? 무너뜨려야 하는 아버지가 아니라, 결국 그 품에 안기고 마는 아버지. 그것이 <변산>을 청년세대의 영화로 나아가지 못하게 만든 것은 아닐까?

여성, 제한적 기능을 수행하다

학수의 아버지는 잘 사는 게 복수라고 말한다. 지금껏 한국영화에서 아들이 아버지의 얼굴에 이렇듯 노골적으로 주먹을 날리는 영화가 또 있었던가 싶기도 하다. 이준익 감독은 영화 속 몇몇 설정을 통해 청년세대에게 자신들을 88만원세대, 삼포세대, 헬조선으로 몰아넣은 기성세대에게 분노의 주먹을 날리라고 이야기하는 것처럼 보인다. <변산>이 현재를 배경으로 하는 영화인데도 불구하고, 서울에서 변산으로의 공간 이동은 마치 타임슬립 영화처럼 시간을 과거로 되돌리는 듯한 느낌을 준다. 과거의 어느 시간에 던져진 듯한 ‘변산’의 학수 앞에 놓인 삶의 문제들은 오로지 과거와 관련된 것들이다. <변산>은 (아버지로 대변되는) 학수의 모든 문제는 현재가 아닌 과거에 있다는, 그렇기에 현재를 바꾸기 위해서는 과거의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는 <백 투 더 퓨처>의 가르침을 반복한다.

하지만 <변산>에서 중요한 인물 관계는 학수와 아버지보다 학수와 선미(김고은)의 관계다. 학수가 변산으로 내려오는 계기였던 선미는 이상하리만치 과거 그대로의 이미지를 간직하고 있다. 선미는 고향을 외면하고 지내왔던 학수가 잊어버린, 또는 잃어버린 삶의 가치를 고스란히 간직한 채 그곳(또는 그 시간)에 머물러 있다. 선미는 현재의 시간에 놓인 여성이라기보다 학수가 과거로 타임슬립할 때 만날 수 있는 여성에 가깝다. 그러니까 그녀의 순수성은 현재의 시간성을 삭제한 대가다. 그렇다면 선미는 왜, 그리고 무엇을 위해 변하지 않고 남아 있는 ‘과거 그 자체’로서 그곳에 남아 있어야 하는 것일까? 선미는 자기 자신을 위해 존재하는 인물이 아니다. 그녀는 오로지 어두운 기억 속에 가장 빛나는 순간을 학수가 자각하도록 하기 위해 과거 그 자체로 남아 있어야 하는 존재다. 선미는 ‘결핍이 결여’된 충만한 존재처럼 보이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존재의 충만함으로 인해 서사적으로 ‘제한적 기능’만을 수행할 수 있을 뿐이다.

리타 펠스키는 서사적 전통 속에서 남성이 직선적 시간의 궤도 속에서 앞으로 나아가는 반면에, 여성은 늘 같은 시간에 붙박이로 머무는 존재로 곧잘 묘사되어왔음을 지적한다. 철없고 타락한 남성에 비해 순수하고 성숙한 여성이라는 구도. 그 결과, 시간의 속도에 지친 질식 직전의 남성은 시간을 되돌려 숨을 크게 쉴 수 있는 향수의 대상으로 여성을 갖게 된다. 실제로 <변산>의 영화적 계보는 청춘영화가 아니라 2000년대 초·중반 한국영화의 주된 흐름이었던 일련의 향수영화의 계열과 맞닿아 있다. <박하사탕>(1999), <파이란>(2001) 등은 타락한 남성과 순수한 여성, 그리고 직선적 시간을 사는 남성과 제자리에 머물며 타락 이전의 가치를 온전히 간직한 여성이라는 이분법적 구도를 반복했다. 변산이라는 타임슬립된 시공간에 도착한 청년들 역시 바로 이 도식에 갇힌다.

소유한 적 없는 과거를 향수하기

나는 <변산>의 이러한 서사적 구도 자체에 문제가 있다고 보는 편은 아니다. 그것이 남성 인물의 각성을 위해 시간성이 거세된 존재로 여성을 격하시킬 위험이 있음은 인정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그러한 여성이 결핍된 현실을 비판적으로 검토하며 대안적 미래를 상상하게 하는 계기로 자리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변산>의 문제는 향수의 정서 자체가 아니라 그것이 청년세대와 조화되지 못한 채 뭔가 시대착오적인 느낌을 준다는 데 있다. <변산>이 내세우는 삶의 가치를 선미가 대변할 때, 그 속에는 현재의 시간에서 지금의 청년세대를 압박하는 삶의 무게가 없다. 현재의 중력이 사라진 무중력의 시공간에서 청년에게 삶의 해결책을 제시하는 <변산>의 태도는 학수에게 자신의 문제를 정면으로 바라보고 돌파하라는 그 가르침을 스스로 위반한다. 물론 이러한 선미(가 대변하는 삶의 가치)의 비현재성이야말로 언제나 옳은 만고의 진리의 증거라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그것은 저잣거리의 약장수가 이야기하는 만병통치약에 불과하다는 의미일 수도 있다.

하지만 청년과 향수의 부조화에 관한 근본적인 의문은 지금의 청년세대에게 향수의 대상으로서 ‘그 시절’이 과연 존재하는가, 라는 질문과 맞물린다. 2000년대 초반에 등장했던 일련의 (남성) 향수영화는 그 분기점에 IMF 금융사태가 있었고 그것을 계기로 근대의 시간을 관통하며 우리가 잃어버린 ‘이전 시절’을 향한 것이었지만, 지금의 청년세대에게 과연 (특정 세대라는 집단의 것으로서) 그런 시절이 존재할까? 어린 시절 IMF의 후유증에 시달리는 부모를 보며 자랐고, 그리고 이어진 신자유주의의 경쟁 체제에 던져진 채 살아온 그들에게 ‘현재와 단절된 시절로서의 과거’를 이야기하는 것이 과연 적합한 것일까? 그것이 가능하다고 믿는 것은 기성세대의 상상에서나 가능한 것 아닐까? 어쩌면 지금 청년세대의 비극은 그들이 돌아갈 만한 것으로 상상할 수 있는 그 시절(또는 고향)이 부재하다는 것에 있는 것 아닐까?

어쩌면 <변산>이 청년세대가 상실했다고 이야기하는 그 시절은 청년세대가 한번도 소유한 적이 없는 대상이다. 물론 소유한 적이 없던 어떤 시절을 꿈꾼다고 문제가 될 건 없겠지만, 그 상상의 결과가 얼굴에 주먹을 날리면서까지 넘어서려 한 아버지 세대의 것의 반복이라는 사실은 이 영화를 과연 청년세대의 영화라고 말할 수 있을지 의심하게 한다. 이는 그저 기성세대에게 익숙한 상상을 대물림할 뿐이다. <변산>이 청년세대에 대한 영화라기보다 청년세대를 바라보는 기성세대의 관점이 드러난 영화라고 말하는 것 역시 이 때문이다. 아버지의 입을 빌려 정면을 마주하라고 했던 그 충고는 청년을 이야기하면서도 그들을 정면으로 응시하지 않으려는 <변산> 자신을 향해야 했다.

물론 꽤 유쾌한 화해에 흐뭇해지는 마음이야 인지상정이겠지만, 그것이 보다 진짜처럼 느껴지기 위해서는 현재라는 시간의 갯벌 위에서 진흙투성이가 되어 좀더 굴러야 했다. 제아무리 학수가 변산 갯벌에서 악전고투하며 과거와 싸운다 해도, 현재의 청년의 상처와 치유를 말하기에 <변산>은 너무 말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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