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전한 놀이터다.” 배우 에즈라 밀러는 코믹콘 행사를 이렇게 설명했다. 지난 8월 3일부터 5일까지 3일간 서울 코엑스 전시장 A홀에서 ‘코믹콘 서울 2018’이 열렸다. 올해로 2회를 맞이하는 이번 행사에 관람객 4만8천여명이 행사장을 다녀갔다. 만화와 영화, 게임을 비롯한 다양한 문화 콘텐츠를 소비할 수 있는 곳. 배우 에즈라 밀러와 마이클 루커를 직접 만나볼 수 있는 곳. 그런데 전세계 대중문화 전반에 영향을 끼치고 있는 코믹콘은 과연 한국 땅에 무사히 상륙한 걸까. 기대 반 의심 반의 심정으로 이 안전한 놀이터가 하루빨리 터를 잡아나가길 바라 마지않는 기자의 염원을 담은 탐방기를 전한다.
무더위가 기승을 부려 서울 하늘의 구름이 마치 신카이 마코토 영화 속 장면과 닮은꼴이 되어 있었던 지난 8월 3일, 코엑스 전시장 A홀 주변의 화장실은 땀을 뻘뻘 흘리며 각종 캐릭터 코스튬으로 갈아입는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나는 <도쿄 구울>의 카네키가 문 앞에서 상의를 탈의한 채 복장을 갖추고 있기에 피해 들어가려다가 세면대 앞에서 <왓치맨>의 로어셰크의 발을 밟았다. 이들은 모두 올해로 2회째를 맞는 코믹콘 서울 2018 행사장에 들어가려는 ‘코스어’(캐릭터 코스튬 복장을 즐겨 입고 꾸미는 이들을 지칭하는 코스플레이어의 준말)들이었다.
코믹콘이 뭐길래
미국에서 시작한 코믹콘은 21세기 대중문화 전반을 아우르는 세계 최대 규모의 행사로 만화와 게임, 영화 콘텐츠를 다루는 업체들이 대형 부스를 차려 자신들의 콘텐츠를 대중에게 알리는 자리다. 할리우드의 대형 스튜디오들은 언제부턴가 이 코믹콘 행사를 통해 자사의 신작 라인업은 물론 해당 영화의 배우와 감독들이 관객과 처음 만나는 자리를 갖기 시작했다. 뿐만 아니라 각종 캐릭터 상품을 코믹콘 한정판이란 명목을 내세워 팔기도 하는 등 전세계 팬들로부터 50여년 가까이 사랑받고 있는 행사다. 샌디에이고 코믹콘의 경우 3~4일의 행사 기간 동안 샌디에이고를 방문하는 사람들이 쓰고 가는 돈만 20억원이 넘는다고 하니 대체 어느 정도의 행사인지 짐작도 하기 어렵다. 사실 한국은 지난해 1회 때만 하더라도 서구인들이 주도하는 콘텐츠를 주로 다루는 이 행사가 과연 한국에서도 통용될 수 있을지를 의심하는 분위기가 없잖아 있었다. 그런데 막상 행사장을 찾은 관람객의 면면을 보면서 그 의심을 거뒀던 기억이 떠오른다. 비싼 입장료를 내고 자발적으로 참여한 관람객이 볼거리에 의존하지 않고 한데 어우러져 서로의 코스튬을 즐기며 노는 모습이 보기 좋았다. 올해도 지난해과 같은 축제의 장을 떠올리며 코믹콘 행사의 꽃이라고도 할 수 있는 한정판 굿즈나 장난감 구매에 대한 기대를 가져보았다. 1회 코믹콘 서울 행사 때 구매했던 플레이모빌의 <고스트버스터즈> 세트는 아직 포장도 뜯지 않고 소장 중이다. 또 지난해 내한했던 배우 매즈 미켈슨과 스티븐 연에 이어 올해 역시 배우 에즈라 밀러, 마이클 루커를 직접 볼 수 있을 거라는 기대도 발걸음을 재촉하게 했다.
마블의 10주년 독주를 기리며
라이브 드로잉의 대가로 알려진 김정기 선생의 드로잉 쇼와 함께 본격적인 행사의 시작을 알린 올해에는 총 104개사 301개 부스가 참여했다. 행사장 전체 부스의 분위기를 둘러보니 게임과 만화, 영화와 드라마, 피겨를 비롯한 다양한 대중문화 콘텐츠를 골고루 다루기 위해 고심한 듯했다. 행사장 왼쪽에는 <포트나이트> <로드 오브 다이스> 등의 게임과 PS4, 닌텐도 스위치 등을 직접 시연할 수 있는 공간이 있었다. 넥슨의 데브캣 스튜디오에서 첫 공개한 모바일 게임 <마블 배틀라인> 부스가 게임 관련 부스 중 가장 호응이 좋았다. 사용자가 200여종의 트레이딩 카드를 수집한 뒤 대전 게임을 펼치는 방식의 게임이다. 그 옆에는 RPG 게임 <페이트/그랜드 오더 듀얼>을 직접 체험해보고 관련 굿즈도 구매할 수 있는 애니플렉스 부스가 마련되어 있었는데 역시나 몇몇 인기 캐릭터 상품은 금세 품절됐다. 행사장 분위기도 익히고 관련 취재도 해야 하는 와중에 한정상품 구매까지 할 목표를 갖게 되니 괜히 마음이 급해졌다.
지갑은 열리지 않았다
올해 코믹콘 행사에 참여하기에 앞서 마블 스튜디오의 10주년 행사를 기념한 부스가 마련된다는 소식을 듣고는 개인적으로 기대하는 바가 컸다. 장난감 회사 해즈브로가 새로 출시한 캐릭터 피겨 ‘마블 레전드’ 신제품이 아직 국내에 정식 출시되지 않은 상태였기에 혹시나 이번 기회에 선판매되지 않을까 기대했지만 몇몇 제품만 전시되어 있을 뿐 판매하지는 않았다. <아이언맨>에서 <어벤져스: 인피니티 워>에 이르기까지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의 지난 발자취를 되돌아 볼 수 있는 영화 포스터 전시가 한쪽 벽면을 가득 채우고 있었지만 기대했던 피겨가 없어 아무런 감흥이 없었다. 맞은편의 출판사 아르누보 부스에서는 한정판 포스터 증정 이벤트를 열고 있어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올해 처음 참여한 CGV 씨네숍도 각종 영화 상품을 판매하고 있었고, 그 주위를 둘러싸고 아드만 스튜디오의 <월레스와 그로밋>, 디즈니의 <겨울왕국>, 카툰 네트워크의 <핀과 제이크의 어드벤처 타임> 부스 등이 캐릭터 상품을 판매하고 있었다. 1회 때는 마땅히 구매할 것이 없어 살짝 아쉬운 마음이 들었는데 올해는 보다 다양한 상품 판매 부스 배치에 주력한 느낌이었다. 만화책을 좋아하는 관람객에게는 시공사와 동방북스 부스가 좋은 안식처가 되어줬다. 시공사에서는 그래픽노블을, 동방북스에서는 각종 굿즈와 아트북 계열의 책을 정가보다 저렴하게 판매했다. 반면에 레고와 핫토이를 비롯해 <스타워즈> 관련 제품을 판매하는 부스의 규모는 상대적으로 작았다. 이번 코믹콘 서울 2018의 주최사인 리드팝(ReedPOP)은 명색이 <스타워즈> 셀러브레이션 행사를 꾸리는 업체인데도 <스타워즈> 관련 부스의 존재감이 약했던 점은 아쉬움으로 남는다. 하지만 국내에서 활동하는 자선 코스튬 단체 ‘501군단’과 ‘레벨리전’ 부스는 올해 코믹콘 참가사 중에 가장 멋진 존재감을 드러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들 단체에 대해서는 뒤이어 따로 소개하겠지만 올해 참가한 부스 중 유일한 민간 비영리 단체이기도 하다. 3일 내내 무겁고 또 무더운 코스튬을 껴입고 돌아다니며 관람객과 즐겁게 시간을 보내는 그들의 모습이 감동적이기까지 했다.
아무튼 결과적으로는 <스타워즈> 부스를 비롯해 마블 중심의 콘텐츠가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다. 엄연히 DC코믹스도 존재하는데 업계 전반적으로 디즈니의 영향력이 강하다 보니 어쩔 수 없이 마블 중심이 되어가는 것은 아닐까. 그래서 DC의 캐릭터 코스튬을 입은 코스어를 보면 괜히 더 반가웠다. 오전에 화장실에서 마주쳤던 <왓치맨>의 로어셰크 코스어와 굳이 사진도 한장 찍었다.
코믹콘일까, 무비콘일까
해외의 코믹콘, 특히 샌디에이고 코믹콘의 경우에는 언제부턴가 할리우드영화 프로모션 행사장으로 변모한 느낌마저 들 정도로 영화 관련 콘텐츠 부스의 비율이 급증한 것이 사실이다. 원래 코믹콘은 만화를 좋아하는 청년들이 모여 소장한 만화책을 판매하거나 교환하는 행사에서 시작됐다. 그래서 지금은 만화를 포함한 영화와 게임 분야를 두루 포용한 형태로 자리잡았는데, 코믹콘 서울에서도 지난해보다 영상 콘텐츠 부스의 역량을 강화하려고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올해는 <AMC 채널>의 <피어 더 워킹데드> 새 에피소드가 공개되기도 했고, OCN 채널의 드라마 <보이스> 정주행하기, <BBC>의 <닥터후> 크리스마스 스페셜 보기, 애니메이션 플랫폼 라프텔의 상영회 등이 3일 내내 스크리닝 라운지에서 이루어졌다. 영화와 관련된 이벤트로는 윤예령 특수분장 감독의 ‘실리콘을 이용한 특수 노인분장’ 토크 행사도 주목할 만했다. <은행나무 침대>(1996), <퇴마록>(1998)에서부터 최근의 <그림자살인>(2009), <내가 살인범이다>(2012) 등의 특수분장을 담당했던 윤예령 감독이 직접 당시 촬영현장의 클립 영상을 보여주며 실리콘 특수분장을 무대 앞에서 재현해보기도 했다. 그녀는 과거 이명박 정권 당시, 모 뮤직비디오에 등장할 크리처를 제작했다가 의도치 않게 대통령과 너무 닮아버리는 바람에 결국 찍지 못하고 삭제할 수밖에 없었던 웃지 못할 해프닝도 소개했다. 해당 크리처의 비공개 클립 영상도 보여줬는데 서둘러 카메라를 들어 촬영했다.
올해 코믹콘 서울에 내한한 많은 게스트 가운데 일찍부터 주목했던 작가는 한국계 미국인 그렉 팍이었다. 그는 장편영화 <로봇 이야기>(2003)를 만든 영화감독 출신으로 지금은 마블과 DC 코믹스의 작가로 활동 중이다. <토르: 라그나로크>(2017)의 원작인 코믹스 <헐크: 플래닛 헐크>를 비롯해 <엑스맨> 시리즈, DC 코믹스의 <배트맨/슈퍼맨> 시리즈 등 여러 작품을 쓰고, 그렸다. 마블 슈퍼히어로 가운데 한국계 미국인 히어로인 ‘아마데우스 조’가 바로 그의 손끝에서 탄생한 캐릭터다(<어벤져스: 에이지 오브 울트론>에서 수현이 연기한 닥터 헬렌 조가 그의 엄마라는 설정이다). 행사 첫날 ‘코믹스 작가로서의 삶’ 토크에서 그렉 팍은 “히어로란 완벽한 사람이 아니라 정의로운 일을 하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사람”이라고 소개했다. 그는 또 “한국계 미국인으로서의 자신의 정체성이 창작에 많은 영향을 끼쳤”으며, 주류 코믹스 내에서 “정체성 내지 아시아 문화를 담아내는 것이 너무 뿌듯하다”고 말했다. “마치 우리 삼촌과 이모들처럼 밥 먹다가 갑자기 싸우고 노래방으로 달려가 노래 부르며 화해하는 모습을 그려 넣었더니 사람들이 너무 좋아하더라”고 말하는 그는 앞으로 만들어질 차기작도 소개했는데, “새로운 <스타워즈> 그래픽노블 시리즈와 <007 제임스 본드>의 그래픽노블 작업에 합류한다”고 밝혔다. 제임스 본드의 경우, <007 골드핑거>(1964)에 등장했던 한국인 악당 오드잡(해럴드 사카타) 역할을 섹시하게 재해석해 “최고의 적 혹은 최고의 친구가 될 수도 있는 인물의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 예정”이라고 밝혔다.
3일간의 빽빽한 행사 스케줄의 대미를 장식한 건 내한 스타들의 토크 행사였다. 에즈라 밀러와 마이클 루커 모두 스타패스 등 특정 옵션 혜택을 구매한 팬들과의 일정을 모두 소화한 뒤에 무대에 올라 일반 관람객과도 만남을 가졌다. 등장하자마자 “밥먹었어?”라는 인사말로 팬들을 무장해제시켰던 에즈라 밀러는 코믹콘을 “안전한 놀이터”라고 표현했다. 증오와 폭력이 만연한 이 세상에서 이렇게 안전하며 창조적인 공간은 중요하다는 뜻이었다. 그는 “우리가 살면서 느끼는 것을 마음껏 표현하는 공간, 뭐든 하고 싶은 대로 할 수 있는 공간, 종교와 신념, 젠더에 상관없이 마음껏 무엇이든 추구할 수 있는 공간”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마이클 루커 역시 ‘욘두’라는 한글이 박힌 모자를 쓰고 돌아다니면서 무대 행사 내내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사진촬영을 철저하게 금지했던 에즈라 밀러와 달리 마이클 루커는 객석에 직접 내려와 관객과 일일이 악수하고 포옹하며 질문을 받아 환호를 받기도 했다.
3일간의 ‘코믹콘 서울 2018’ 행사는 자발적으로 참여한 코스어들뿐만 아니라 공식 경쟁 행사인 ‘코리아 코스플레이 챔피언십’ 무대에 참여한 코스어들 모두가 함께 만들어나가는 축제의 장을 끝으로 막을 내렸다. 코스튬을 입고 사진을 찍고 즐기는 이들은 행사에서 고용한 전문 행사 인력이 아니다. 이들은 모두 자발적으로 영화를 즐기기 위해 수개월을 정성껏 공들여 준비한 사람들이다. 게임과 만화, 영화, 드라마 등 다양한 분야의 콘텐츠를 즐기고 또 자신의 취향을 마음껏 드러내는 자리로서 이번 코믹콘 서울 2018은 더욱 뚜렷한 자기 색깔을 갖춰나가고 있다는 인상을 받았다. 그것은 어떤 특정 업체가 참가하느냐, 하지 않느냐의 문제를 가볍게 뛰어넘고 있었다. 관람객 스스로가 만들어가는 문화의 장으로서의 가능성을 엿봤다고 해야 할까. 에즈라 밀러가 표현했던 ‘안전한 놀이터’라는 말이 계속 귓가에 맴돈다. 사람들이 다양한 취향을 마음껏 드러내고 즐길 수 있는, 즉 소비할 수 있는 안전한 공간이 마련되려면 무엇이 갖춰져야 할까. 대규모 영화 프로모션 행사를 열어 신작 라인업을 소개하고 예고편을 최초로 공개하면 되는 것일까. 평소 볼 수 없었던 스타들을 한자리에서 만날 수 있는 행사가 늘어나면 되는 것일까. 여러 고민을 안고 집으로 돌아와 얼마 전 개최됐던 샌디에이고 코믹콘 행사에서 공개된 한정판 <존 윅> 블루레이 스틸북을 이베이에서 웃돈을 주고 구매했다. 너무 근사해 살 수밖에 없었다. 내가 바라는 코믹콘의 모습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