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백의 화면에서도 반짝 하고 빛을 발했던 <메리크리스마스 미스터 모>(2016)의 고원희는 드라마 <으라차차 와이키키>의 코미디 연기로 시청자들을 기습 공격했다. 예쁜 신인 배우에게 기대하는 예쁜 모습 따위엔 애당초 관심이 없다는 듯, 털이 많아 웃픈 ‘츄바카’ 서진을 연기하며 큰 웃음을 안겨주었다. 어떤 장르에서건 안정감을 주는 고원희는 도전정신으로 무장한 채 성큼성큼 앞으로 나아가고 있는 중이다. 그 씩씩한 행보는 <으라차차 와이키키> 이전에 촬영한 <죄 많은 소녀>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죄 많은 소녀>에서 고원희는 친구의 죽음 앞에서 죄책감을 느끼는 고등학생 한솔을 연기한다. 온전히 한솔이 되어 감정의 세부에 집중해야 했던 현장에서 고원희가 느끼고 배운 것은 무엇일까.
-오디션을 통해 <죄 많은 소녀>에 합류한 것으로 안다.
=처음에 영희 역으로 오디션을 봤다. 김의석 감독님이 오디션을 굉장히 꼼꼼하게 보셨는데, 연기 얘기뿐만 아니라 개인적인 얘기도 많이 나눴다. 가까운 친구를 떠나보낸 경험이 있어서 그때 느꼈던 감정들도 이야기했다. 아마도 그런 대화 덕분에 한솔 역을 맡게 된 것 같다. 오디션이나 미팅이 촬영현장보다 떨릴 때가 많다. 그래서인지 연기만 하고 나온 경우보다 감독님과 대화를 많이 나눈 경우에 캐스팅되는 확률이 높았던 것 같다.
-어느 누구 할 것 없이 모든 배우가 각자의 상황에 맞는 최고의 리얼리티를 보여준다.
=영화 속 상황이 누구나 겪을 수 있는 일이고, 누구나 영화 속 인물들처럼 행동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나 역시 한솔이와 같은 상황에 놓였다면 한솔이처럼 행동했을 거라고 생각한다. 다른 배우들도 마찬가지였겠지만 ‘척’을 할 수 없었다. 이해하는 척, 감정을 표현하는 척하면 거짓말이라는 게 너무 잘 보였던 작품이다. 감독님이 원하는 감정의 수준에 치닫지 못하면 절대 오케이가 나지 않았다. 영화 후반부에 중요한 병원 신을 찍을 때, 그 상황에 완벽히 몰입하지 못해서 촬영이 다음날로 미뤄진 적이 있다. 집에서 잠을 편하게 자고 나오면 또다시 그 장면을 성공시키지 못할 것 같아서 소주를 마시고 밤을 지새운 채 다음날 현장에 갔다. (웃음)
-이전에도 연기하면서 이만큼의 낙담과 좌절을 경험한 적이 있나.
=처음이었다. 그날 울면서 회사 대표님한테 전화를 걸었다. (같은 소속사 배우인) 배두나 선배님한테 직접 전화해서 물어보고 싶었지만 그럴 순 없어서 “대표님, 저 계속 연기해도 되나 싶어요. 혹시 두나 선배님도 이런 경험이 있을까요?” 하고 물었다. 그랬더니 나뿐만 아니라 모든 배우들이 그런 고민을 한다고 하시더라. 그러면서 이걸 이겨내면 그만큼 성장할 거라고 하셨다. 그 말이 큰 위로가 됐다.
-김의석 감독이 특별히 주문한 게 있는지.
=한솔이가 되어 연기하는 동안 행복하지 말라고 하셨다. 영화와 동떨어진 채 내 개인적인 시간들이 너무 행복하면 안 될 것 같다고 하셨다.
-혼자서 액션하는 장면보다 무리 중 한명으로 리액션하는 장면이 많다.
=표현하려고 하지 않고 최대한 느끼려고 했다. 그 순간의 감정을 느끼고 나에게 집중했다. 한솔이의 감정만 생각하기에도 벅찼던 현장이다.
-<죄 많은 소녀> 이후 드라마 <으라차차 와이키키> <당신의 하우스헬퍼>에 연이어 출연했다. 특히 <으라차차 와이키키>에서 보여준 능청스런 코미디 연기가 꽤 반향을 일으켰다.
=가리지 않고 여러 경험을 하고 싶은데 마침 그 기회가 드라마쪽에서 많이 들어왔다. 아직까지 특정한 이미지에 고착되어 있다고 생각하진 않지만, 초창기 아시아나항공 모델로서의 차분하고 단아한 이미지를 기억하는 분들이 있는 것 같다. 그런데 <으라차차 와이키키>의 서진 역시 내 안에 있는 모습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누구를 만나는지, 어떤 상황인지에 따라 내 모습이 변하니까.
-소화할 수 있는 영역이 넓은 배우라는 생각이 든다. 어떤 장르나 형식에도 자연스럽게 녹아든다.
=끊임없이 궁금해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내가 왜 이 말을 하고, 내가 왜 이런 감정을 느끼는지. 그걸 잘 모르고 임할 때와 명확하게 이해하고 임할 때의 차이가 크다. 그래서 감독님의 이야기를 많이 들으려 한다. 한 작품, 한 작품 최선을 다하는 건 당연한 거고. 후회로 남을 작품을 남기고 싶지 않다. 그게 내가 작품에 임하는 자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