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인생의 영화]
박규택 감독의 <엉클 분미> 잠시라도 삶이 신비로울 수 있다면
2018-08-28
글 : 박규택 (영화감독)

감독 아피찻퐁 위라세타쿤 / 출연 사크다 카에부아디, 제니이라 퐁파스 / 제작연도 2010년

그 사람이 좋아하는 영화 10편 중에는 나와 본 영화가 없었다. 대부분 오래전 영화였기 때문에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했지만 섭섭한 마음이 쉽게 가시질 않았다. 수많은 영화를 함께 봤고 그중 몇편은 함께 감동했기 때문이다. 물론 그 사람이 감동했다는 건 나의 착각일 수도 있다. 그 사람은 쿠엔틴 타란티노의 영화적 순간과 우디 앨런의 재치를 좋아했다. 피 튀기는 유머가 필수였나 보다. 그 사람은 내게 빌리 와일더의 <선셋 대로>를 보여줬고 ‘007 시리즈’에도 깊은 관심을 갖게 해줬다. 그 사람은 할리우드영화의 가치를 정확히 알고 즐기는 사람이었다. 나는 그에게 영화는 나보다 당신이 해야 하는 거 아니냐는 말을 하곤 했다. 하루는 나도 보답이 하고 싶었다. 내가 좋아하는 영화 중에 그 사람이 만족할 만한 영화가 뭐가 있을까, 생각하다가 B급 고어물인 이구치 노보루의 <머신 걸>을 보여줬다. 그는 특히 주인공의 손이 펄펄 끓는 기름 냄비에 들어갔다가 커다란 튀김 손이 되어 나오는 장면에서 박장대소를 했다. 속으로 하이파이브를 외쳤다. 그 사람은 내가 아는 사람 중 가장 탁월한 영화 미식가임이 틀림없었다. 우리는 신기한 순간들이 일상과 뒤섞이다 결국 삶을 신비한 것으로 만들어주는 영화들을 좋아했다. 나는 내가 좋아하는 영화 리스트 10편 중에서 이에 걸맞은 영화 한편을 찾아냈다. 바로 아피찻퐁 위라세타쿤의 <엉클 분미>였다.

고즈넉한 타이의 어느 시골 마을. 신장 투석으로 생명을 연장하며 평생을 성실하게 살아왔을 집안의 가장 분미와 그의 가족들이 저녁 식사를 하는데 오래전에 죽은 아내의 환영이 나타난다. 가족들의 놀라움도 잠시, 분미는 아내 귀신을 반기며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눈다. 하지만 곧이어 수년 전에 실종된 아들이 온몸에 검은 털이 돋은 기괴한 생명체가 되어 나타나고, 급기야 전생인지 환상인지 모를 사건들이 극사실적으로 표현되어 일상의 모습과 뒤섞이기 시작한다. 이유를 설명하지 않고 펼쳐지는 신기한 사건들을 따라가다 보면 그 사건들 사이의 인과관계를 어느새 관객인 내가 만들게 되고 마치 지금 내 옆에 수년 전에 돌아가신 그리운 할머니가 나타나도 금방 이야기꽃을 피울 것 같은 기분이 들게 한다. 비현실적인 상황 속에서도 당황하지 않고 덤덤하게 자신의 삶 안으로 받아들이는 인물들의 몸짓과 말투가 잊히질 않는다. 삶이 잠시라도 이렇게 신비로울 수 있다면….

그 사람과 이 영화를 같은 극장, 같은 상영시간에 함께 봤을 수도 있다는 얘기를 한 적 있다. 그는 이 영화야말로 영화만이 할 수 있는 가장 영화다운 영화가 아니냐고 말했다. 정말 영화는 그 사람이 해야 하는 거 아닌지 모르겠다. 그 이후로 이 영화는 내가 추구하고 싶고 성취하고 싶은 스토리텔링과 스타일을 미리 보여주는 가장 소중한 여행 안내책이 되었다. 그 사람이 누구인지는 밝힐 수 없지만 ‘내 인생’에 대한 글에서 그 사람 이야기를 하는 것은 지금의 내 목표가 그 사람이 좋아하는 영화를 만드는 것이라고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 사람 없이 새로운 여행을 하는 지금, 늘 손 닿는 곳에 넣고 다니다가 길을 잃거나 간혹 여행지가 재미없으면 이 영화를 꺼내 보곤 한다. 언젠가 내가 만든 영화도 그 사람이 좋아하는 날이 오지 않을까, 하는 희망을 가지면서 말이다. 내 인생의 영화로, 그 사람과 함께 봤을 수도 있는 이 영화를 삼고 싶다.

박규택 영화감독. 공포영화 <터널 3D>(2014), <폐쇄병동>(2017)을 연출했다. 영화를 할수록 무서운 게 없어져서 지금은 다른 장르의 이야기를 준비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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