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극영화의 득세가 돋보이는 추석 시즌에 <협상>은 그동안 제대로 다뤄진 적 없었던 경찰청 위기협상가의 세계를 히든카드로 꺼내들었다. 서울지방경찰청 위기협상팀의 베테랑인 하채윤(손예진)이 타이에서 활동하는 무기밀매상 민태구(현빈)의 인질극을 상대하는 12시간의 숨막히는 상황이 영화의 주 무대다. <협상>을 이끈 이는 <국제시장>(2014)의 조감독, <히말라야>(2015)의 각색 등을 거치며 JK필름과 꾸준히 연을 이어온 이종석 감독. “2시간 동안 말로 협상만 한다면 지루할 수밖에 없는데, 상업영화로서 이를 뒤집기 위해 다양한 변주를 취했다”는 그에게, 첫 장편 데뷔작을 완성하느라 남달랐을 그간의 경험들에 대해 물었다.
-<협상>은 어떻게 시작된 프로젝트인가.
=처음 <국제시장> 조감독 면접을 볼 때부터 윤제균 감독님이 “<국제시장> 개봉 전에 너를 입봉시켜줄게!”라고 호언장담했다. 나 역시 그 말을 전적으로 믿은 건 아니지만(웃음) 그렇게 책임감 있게 말씀해줘서 고마웠다. 덕분에 JK필름이 가지고 있던 시나리오들을 운 좋게 많이 접했던 것 같다. <히말라야>는 연출 가능성도 있었던 작품인데, 캐스팅 과정에서 규모가 커지다보니 경험이 풍부한 이석훈 감독님에게 돌아갔다. 이후 각본 및 각색 작업을 꾸준히 하면서 지난 4년간 최소 10여개의 아이템을 다듬었고, 그러던 중 <협상>을 만났다.
-<그것만이 내 세상>(2017)을 연출한 최성현 감독이 초고를 썼다. 시나리오의 첫인상은 어땠나.
=신선했다. 어떤 영화로 데뷔를 할 것인지는 모든 신인감독들의 고민일 텐데, 새롭고 참신한 영화로 입봉하고 싶다는 욕구가 컸다. 기초 자료 조사도 큰 도움이 됐다. 취재를 하다보니 국내 협상가들에 대한 다양한 사례가 있더라. 인질 협상 도중에 뜻대로 일이 풀리지 않아 인질들이 사망한 경우도 있었고, 일이 힘들어 도중에 그만둔 협상가들도 많았다.
-손예진과 현빈은 각기 흥행력을 인정받은 친근한 배우들이면서도 이전에 한번도 만난 적이 없다는 게 의외였다.
=하채윤 캐릭터는 그냥 처음부터 손예진이었다. 큰 영화를 이끌고 갈 수 있는 여성 주연배우들의 후보가 그렇게 많지는 않다. 기존에 규모가 큰 영화들 중 여성이 주연한 작품이 많지 않았던 탓에 새 작품을 찍으려는 연출자 입장에서는 선택권이 줄어드는 악순환도 있다. <협상>의 하채윤이라는 인물은 손예진 배우의 청순한 이미지를 답습하지 않는다는 점에 기대를 걸었다. 손예진의 든든한 연기력, 그리고 ‘강단’이 느껴지는 이미지를 전면에 내세우고자 했다. 민태구 캐스팅엔 조금 사연이 있다. 처음엔 당연히 거칠고 욕을 잘할 것 같은 배우를 떠올렸다. 그런데 시나리오를 퇴고하면서 아예 캐스팅부터 반전을 주면 어떨까 싶었다. 안 어울릴 것 같지만, 그래도 왠지 거칠게 욕하는 모습을 보고 싶은 배우랄까. 그러자 현빈이 보이더라. 실제로는 얼굴도 성격도 매우 반듯한데, 눈빛 속에 묘한 반항기가 있다.
-일반적으로 떠올리는 냉철한 협상가보다 하채윤의 성격과 감정적 온도를 뜨겁게 잡은 의도도 궁금하다.
=여러 협상가들을 만나면서 느낀 건 그들도 똑같이 ‘인간’이라는 점이었다. 직업적 색깔도 결국은 각 개인의 성격이 만든다. 물론 반드시 냉정해야만 하는 부분들이 있다. 이를테면 인질범에게 진정하라고 다그치거나, 제한 시간을 정해주고 압박하는 식의 행동은 절대 하면 안 된다. 이런 점을 제외하면 어떤 면에서 협상가들은 대체로 가슴이 뜨거운 사람들이다. 인질범을 이해하고 공감해야 협상이 가능하니까. 차가운 협상가의 이미지는 스테레오타입일 수도 있다.
-협상가 주연의 영화라는 것에 더해 그 협상가가 여성이라는 지점도 반갑다. 추석 시즌의 대작영화들 중 단연 돋보이는 지점이다.
=여성 주연의 영화를 좋아한다. 개인적으로 어머니와의 관계도 큰 영향을 미친 것 같다. 강한 여성, 리더십을 발휘하는 여성들에 대한 이야기를 이전 각본 작업 때도 꽤 여럿 써왔다. 사회 분위기를 의식한 건 아니다. 다만 여성 인물 외에도 더 다양한 주인공에 대한 필요성을 언제나 느낀다.
-모니터를 사이에 두고 서로 멀리 떨어진 배우들을 동시에 촬영하는 이원촬영 방식에도 공을 들였다고.
=과거로 돌아가 <국제시장> 이야기를 잠깐 해보자면, 클라이맥스 부분에서 TV에 ‘이산가족찾기’ 방송 장면이 나오지 않나. 프리 프로덕션할 때부터 이 장면은 반드시 이원촬영으로 하자고 제안했었다. 당시만 해도 한국영화계에서 이원촬영을 제대로 한 적이 없었다. 한국과 미국에서 멀리 떨어져 상대를 처음 보게 된 느낌, 그 느낌을 현장에서도 그대로 만들어내야 한다는 생각이었다. 당시에 ‘액션’을 외치는 순간 덕수(황정민)와 막순(최스텔라김) 역의 배우들이 실제로 처음 만났다. 이번 <협상>에서도 양쪽 다 실제 상황으로 모니터를 연결시킨 다음, 배우가 어떤 동선이나 시선을 취해도 디테일 면에서 자유롭도록 여러 대의 카메라를 설치해 360도 모두 잡힐 수 있게 만들었다. 그러다보니 컷을 나누는 방식도 기존과 달리 접근해야 했다. 한번 촬영할 때 6~7분가량으로 분량이 긴 컷이 많았고, 우선 배우의 연기에 집중해 가장 메인이 되는 오케이컷을 만들고 나면 그 컷에 맞는 편집을 고려해 새로운 컷을 찍는 방식이었다.
-좁은 공간에서 배우가 긴 호흡으로 연기해서인지, 연극적인 느낌도 든다.
=편집의 방식이나 영화의 밑그림에 대한 접근 자체가 기존과 달라야 했다. 시나리오에 맞춰 미리 콘티를 순서대로 설계하는 방식이 불가능했기 때문에 배우들이 종종 촬영하다가 ‘어, 이런 컷이 있었어요?’라고 되물어올 정도로 매 순간이 새로웠다. 한번은 현빈 배우가 꼭 연극 무대에 올라간 느낌이라고도 하더라.
-프레임에 갇히지 않고 길게 연기할 수 있으니 배우들에겐 좀더 자유롭지 않았을까.
=배우들 입장에서는 좋지 않을까 예상했는데, 나중에 들어보니 두 사람 모두 손발이 묶인 사람처럼 답답했다고 하더라. 어쩌면 그래서 좁은 공간에서 집중력을 더 발휘할 수 있지 않았나 싶기도 하고. (웃음) 모니터 너머로 상대방도 동시에 연기를 하고 있으니 하나라도 놓치지 않기 위해 남달리 긴장해야 했을 거다.
-채윤과 태구의 두 실내 공간 바깥으로 풍경을 열어주는 작업도 필수였겠다.
=실내의 상황이 반복적으로 보일 수 있기 때문에 채윤의 선배 경찰인 혁수(김상호)가 바깥에서 수사를 하거나, 태구의 기지로 향하는 특공대의 상황을 교차로 보여주는 등 협상 테이블 바깥의 동적인 상황들을 보여주려고 했다.
-첫 영화로 추석영화 4파전(<물괴> <안시성> <명당>)에 뛰어들게 됐다.
=영화 외적인 것, 추석에 개봉할 수 있는 기회라든지 호화로운 스탭과 출연진에 대해서는 그저 감사하는 마음이다. 개인적인 의미로는 원하는 영화를 열심히 만들어서 완성시킨 것, 그 영화가 스크린에서 상영되는 것을 지켜볼 수 있다는 것만으로 충분하다. 사실은 ‘협상’이란 게 상업영화로 만들기 힘든 소재다. 두 시간 내내 협상만 한다고 생각해보라. 아마 ‘뭐라고?’ 하고 싶을 거다. (웃음) 정석대로 간다면 지루할 수밖에 없다. 상업영화의 관점에서 이를 극복하기 위해 여러 도전을 했으니 관객이 그 부분을 눈여겨봐주면 좋겠다.
-차기작 계획이 있나.
=베트남전쟁 당시에 있었던 한국군 포로 이야기를 준비 중이다. 포로로 붙잡혔다가 탈출했는데, 캄보디아 국경으로 잘못 넘어간 나머지 스파이로 오인받은 남자의 이야기로, 일명 ‘한국판 <빠삐용>’이다.
감독이 추천하는 <물괴> 이렇게 보면 더 재밌다!
“이 영화의 장점은 궁을 배경으로 한 괴수영화로 접근한 것이다. 물괴 자체는 무서우면서도 리얼해야 했다. 괴수와 조준방, 궁궐이라는 공간을 유심히 봐주시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