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태균 감독의 <암수살인>, 실화를 소재로 한 영화가 취할 수 있는 어떤 가능성에 대하여
2018-10-04
글 : 김성훈 |
김태균 감독의 <암수살인>, 실화를 소재로 한 영화가 취할 수 있는 어떤 가능성에 대하여

“옮긴 물건이 있는데 사람 같더라.” 한 형사가 끔찍한 고백이 적힌 편지 한통을 받는다. 편지엔 자신과 관련 있는 사건이 총 11개나 되니 더 알고 싶으면 만나러 오라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편지를 보낸 사람은 유흥주점 여종업원을 살해하고 시신을 유기한 혐의로 징역 15년형을 선고받고 복역하던 이두홍(가명)씨다. 그에게서 편지를 받은 사람은 22년 경력의 베테랑, 김정수 부산지방경찰청 마약수사대 형사다. 김 형사는 이씨가 수감하는 교도소를 찾았고, 그곳에서 A4 용지 두장에 달하는 이씨의 자술서를 확보했다. 자술서에는 이씨의 범죄 행각이 낱낱이 적혀 있었다. 그날부터 김 형사는 교도소를 들락날락하면서, 진실인지 거짓인지 분간조차 어려운 이씨의 진술을 단서 삼아 휴일도 반납한 채 수사에 매달린다. 영화보다 더 영화 같은 실화는 2012년 한 시사 프로그램에 소개되면서 대중에 알려졌다.



<봄, 눈>(2012)으로 데뷔했던 김태균 감독의 두 번째 장편영화 <암수살인>은 이 사건을 재구성한 이야기다. ‘암수살인’이라면 실제 사건은 발생했지만 수사기관이 인지하지 못하고 있는 살인사건을 뜻한다. 미제사건으로 발전할 가능성이 높은 사건이라는 얘기다. 부산 자갈치시장, 마약수사대 형사 형민(김윤석)은 자신의 정보원인 ‘뽕쟁이’ 정봉의 소개로 강태오(주지훈)를 한 칼국숫집에서 만난다. 태오로부터 6, 7년 전 시체를 옮긴 이야기를 듣기 위해 마련된 자리다. 슬리퍼 차림으로 나온 태오는 “누군가의 부탁을 받아 산에 시커먼 비닐봉지 하나를 묻은 적이 있는데 그게 사람의 발꿈치 같았고, 토막난 상태였다”고 형민에게 말한다. 형민이 시체를 옮기라고 시킨 사람이 누군지 궁금해하자 태오는 맨입으로 되겠냐며 웃돈을 요구한다. 하는 수 없이 돈을 꺼내려던 찰나에 다른 형사들이 급습해 태오를 허수진의 살해 및 사체 유기 혐의로 체포한다. 그로부터 3개월이 지난 어느 날, 형민은 한통의 전화를 받는다. 강태오다. 그는 자신이 죽인 사람이 총 7명이고, 암매장도 하고, 광안대교 위에서도 버렸다고 ‘셀프’ 제보한다. 형민은 태오를 만나 자세한 얘기를 듣기 위해 그가 복역하는 구치소로 향한다. 영화는 실화를 충실하게 끌어오되 사건들을 하나의 서사로 끈끈하게 연결하기 위해 순서를 조금 바꾸었고, 인물에 살을 풍성하게 붙였다.




살해현장이 아니라 접견실이 무대



<암수살인>은 형사가 범인이 누구인지 찾는 범죄 스릴러가 아니다. 범인을 잡는 데서 장르 특유의 쾌감을 주는 형사영화도, 용의자와 나뒹굴거나 총격전을 벌이는 형사 액션물도 아니다. 공판 신이 몇 차례 등장하나 스모킹건을 주고받으며 반전의 쾌감을 주는 법정 드라마는 더더욱 아니다. 이 영화는 범인이 먼저 밝혀졌고 형사는 범인이 한 말을 범죄로 입증해야 하는, 근래 보기 드문 성실하고 독특한 수사극이다. 형사와 범인이 ‘밀당’하며 머리싸움하는 영화라 할까.



실화에서 출발했다지만 범인의 정체를 먼저 드러내는 형사영화의 서사는 누구라도 다루기가 만만치 않다. 범인이 누구인지 찾아가는 과정에서 쌓아올리는 서스펜스를 아예 포기하고 시작해야 하기 때문이다. 범인이 먼저 자신이 저지른 범죄(와 자신의 정체)를 공개한다는 점에서 데이비드 핀처의 2007년작 <조디악>이 떠오른다. <조디악>에서 정체불명의 살인마 조디악은 언론(신문과 방송)에 편지를 보내거나 전화를 걸어 “호숫가 살인사건, 발레이오 살인사건, 워싱턴가 살인사건 모두 내가 한 짓”이라고 고백한다. 자신의 증언에 설득력을 더하기 위해 사람을 죽이는 데 사용한 총, 시체의 위치 등 사건의 구체적 정황과 풍경도 함께 알린다. 언론에 편지를 보내 자신의 신원과 사건에 대한 단서를 던지며 공권력을 조롱하는 살인범은 희대의 살인마 잭 더 리퍼 이후 조디악이 처음이다. 사건이 커지면서 기자 폴 에이브리(로버트 다우니 주니어)와 샌프란시스코 경찰청 강력계 경위 데비이드 토스키(마크 러팔로)는 범인을 잡기 위해 사방팔방으로 뛰어다니지만 별 소득이 없다.



<조디악>이 살인마 조디악을 맥거핀 삼아 사건 단서를 확보하는 과정에서 서스펜스를 쌓아올리듯이 <암수살인> 또한 형민은 태오가 던져주는 (진실이든 거짓이든) 단서들을 하나씩 접근·검증하는 과정을 동력 삼아 전개된다. 형민은 태오가 그려준 범죄 장소 약도를 찾아가 단서를 뒤지고, 사건과 관련된 사람들을 일일이 만난다. 용의자를 잡기 위해 쫓고 쫓기는 장면은 이 영화에 하나도 등장하지 않지만, 누구도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 사건을 놓지 않는 형민의 발걸음은 누구보다 바쁘고 꽤 성실하다. 단서가 하나씩 나타날 때마다, 형민이 그게 사실인지 아닌지 확인할 때마다 우리는 사건의 실마리가 풀리지 않을까 내심 기대하며 지켜보게 된다. 다만, 범인이 자신의 얼굴을 끝내 드러내지 않는 <조디악>과 달리 <암수살인>의 태오는 구치소 접견실에서 형민과 마주하면서 설전을 벌인다는 사실이다.



이 영화의 백미가, 수차례 만남이 이어지는 접견실 신인 것도 그래서다. 태오는 진실인지 거짓인지 입증하기 힘든 진술들을 던지고 그 대가로 구치소에서 지낼 영치금과 물건들을 형민에게 요구한다. 형민은 태오가 접견거부 신청이라도 할까봐 때로는 구슬리고, 때로는 질문을 다음 기회로 미루며 태오를 조심스럽게 다룬다. 태오가 한 말 중에는 진실도 거짓도 있으니 그가 범인임을 입증할 수 있는 증거나 증언을 확보하는 건 전적으로 형민의 몫이다. 단서를 더 끄집어내려는 자와 자신을 과시하고 경찰을 조롱하며 상대의 수사에 혼선을 주려는 자의 불협화음에서 서스펜스가 구축된다. 상황에 따라 얼굴을 노련하게 바꾸는 베테랑 형사 김윤석과 어디로 튈지 모르는 럭비공 같은 살인마 주지훈이 보여주는 접견 장면은 그야말로 일촉즉발의 긴장감이 감돈다.



접견실 신과 형민의 수사가 현재에서 벌어지는 이야기라면 접견실 신에서 나온 태오의 증언은 회상 장면으로 재구성된다. 태오의 증언이 사실인지 거짓인지 확인할 수 없는 상황에서 플래시백을 통해 재현 혹은 재연되는 범죄 장면은 태오의 증언을 단순히 관객에게 설명해주는 역할뿐만 아니라 태오가 어떤 사람인지, 왜 무자비한 범죄를 저질렀는지, 형민의 수사에 어떤 퍼즐로 기능하는지 등 다양한 역할로 쓰인다.




형민과 태오를 알아가는 과정



이 과정에서 형민과 태오, 두 남자가 어떤 사람인지 양파 껍질이 벗겨지듯 선명해진다. 이것은 주인공이 어떤 캐릭터인지 설정된 뒤 이야기가 시작되는 보통 형사영화와 다른 점이다. 형민은 경험 많고 성실하며 끈기 있는 형사다. 조금이라도 수사 가능성이 보이면 미제사건이라도 끝까지 놓지 않는 사냥개 핏불 같은 면모가 있다. 특히 김윤석은 형사로서의 집요함과 여유를 형민의 얼굴에 오롯이 새겨넣는 동시에 서사를 안정적으로 끌고 간다. 반대로 태오는 기억력이 좋고, 그림을 잘 그리며, 택시 운전을 오래해 지리 감각이 매우 좋다. 스포일러 때문에 자세한 설명은 못하지만 태오가 자신의 범죄 행각을 형사에게 알리는 이유와 극악무도한 범죄를 저지르는 배경도 후반부에 자세히 드러난다(그렇다고 동정심이 가진 않지만 말이다).



수사는 사람이 한다. 사건이 발생했을 때 수사기관이 수사만 제대로 해도 더 큰 피해를 막을 수 있다. 그럼에도 암수살인이, 미제사건이 많다는 건 단서가 적고, 시간이 오래 걸리는 데다 실적이 크지 않는 등 여러 변명 때문에 제대로 수사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영화 <암수살인>은 형민과 태오의 ‘밀당’을 맥거핀 삼아 모든 걸 다 바쳐서 밝힐 건 밝히려는 형사의 직업인으로서의 태도가 얼마나 중요한지 역설하는 영화라 할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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