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2]
<암수살인> 김태균 감독, "실제 인물과 영화 캐릭터는 다르다"
2018-10-04
글 : 임수연
사진 : 오계옥

이미 범인은 잡혀 있다. 연쇄살인도 자백했다. 그런데 이게 실제로 벌어진 일이 맞나? <암수살인>은 실제 사건으로부터 범인을 추리하는 보통의 범죄 스릴러와는 역으로 수사가 진행된다. 살인죄로 수감된 강태오(주지훈)는 6개의 추가 살인, 총 7개의 살인 리스트를 거침 없이 써내려가고, 형사 김형민(김윤석)은 그와 심리전을 펼치며 사건을 추적해간다. “결이 다른 장르영화에서 충분한 상업적인 성취를 보여주고자 플롯과 미장센, 캐릭터를 다르게 접근했다”는 김태균 감독을 만나 각각의 요소에 대해 자세한 이야기를 들었다.

-2012년 시사 교양 프로그램 <그것이 알고 싶다>의 ‘감옥에서 온 퍼즐-살인 리스트의 진실은?’ 에피소드를 보고 바로 부산에 내려가 취재를 시작했다고.

=잡혀 있는 살인범이 또 다른 살인사건을 저질렀다며 형사를 도발하고, 형사는 피해자가 누구인지 살인범의 진술에 의존해 밝혀야 하는 어려운 수사가 나름 흥미롭고 재밌더라. 두 사람에게 흥미와 호기심이 생겼고, 토요일에 방송을 본 뒤 월요일에 바로 사건 담당인 김정수 형사를 만났는데 흔쾌히 취재를 허락해줬다. 1년 정도 신뢰를 쌓는 기간을 거치기 위해 10번 정도 부산을 왔다 갔다 했다. 형사님도 나를 좀 지켜봐야 했고, 사실은 나도 이분이 미디어가 만든 형사인지 아닌지 검증할 필요가 있어서 동료, 형사님이 데리고 있는 정보원 등 주변부부터 조사를 시작했다. 객관적으로 지금 상황이 어떤지도 판단해야 했고. 이분은 ‘진짜’라는 생각이 들었고, 초고가 나온 건 형사님과 만나고 나서 1년 반이 지나서였다. 현재 진행형인 사건이고, 형사님이 공직에 있는 터라 조금 조심스러운 부분이 있어서 시나리오를 발전시키는 기간이 좀 있었다. 실화는 그야말로 모티브일 뿐이다. 완전히 다른 이야기로 써보기도 했고, 판결이 확정되기 전까지는 승소와 패소에 대한 결론을 작가가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수없이 많은 원고들이 만들어지는 과정에서 2016년 최종 판결이 나서 지금의 엔딩이 만들어졌고, 그사이 곽경택 감독님이 제작자로 합류했다. 그런데 실제 결과가 내가 생각했던 것과 똑같이 나왔다. 되게 새로운 경험이었다. 법이 상식적인 판단을 한다는 생각이 들더라.

-조사한 내용 중 어느 것을 취사선택하느냐의 기준이 <그것이 알고 싶다>와 다를 수밖에 없었겠다.

=1시간 분량의 지상파 방송에서 다룰 수 있는 범위나 수위가 있다. 실제로 취재를 해보니 사건이 훨씬 방대하고 넓고 복잡했다. 사실 자체는 되게 파편적이고 범위도 넓고 인과관계가 없는데, 극영화는 개연성이나 인과관계를 확보해야 그 이야기의 진실이 전달된다. 형사와 살인범의 게임 안에서 그들이 가지는 태도와 감정, 이 사회에 함의하고 있는 바는 그대로 차용했지만 사건의 인과관계와 개연성을 확보해가면서 이야기를 구성했다.

-<그것이 알고 싶다>는 살인범이 여성들에게 폭력을 가하며 우월감을 느끼는 한편 여성이 자신을 무시했을 때 이를 견디지 못하는 타입이라는 전문가의 분석에 초점을 맞췄다. 근데 <암수살인>은 이런 해석을 반영하지 않았다.

=실제 살인범은 그 분석이 맞을 수 있지만 내가 전달하고자 하는 영화의 본질을 생각하면 너무 편협한 해석이었다. 내가 규정한 태오는 그 악마성이 다 이해가 되는 인물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폼 잡는 악인 캐릭터도 아니고, 계층 밑바닥에서 자라고 감정의 기폭이 큰 어떤 악마다. 태오는 피해자가 자기를 무시해서 죽였다는 식으로 자신의 범죄에 핑계를 대는데, 그걸 그대로 받아들이면 되게 무책임한 접근 같았다.

-방송을 보면 실제 살인범의 나이는 40대 이상으로 추정되는데, 강태오를 연기한 주지훈은 30대 중반이다.

=실제 인물과 영화 캐릭터는 다르다. 영화 캐릭터에 집중해서 표현하는 게 중요하지 실제 인물 그대로를 연기하는 건 아무 의미가 없다. 그래서 주지훈에게 <그것이 알고 싶다>도 아예 보지 말라고 했다. 내가 만든 캐릭터는 보다 정체를 알 수 없고 일반적인 상식으로 이해가 안 되는, 자갈치시장 시궁창에서 탄생한 듯한 괴물이어야 했다. 감정선의 변화가 불가시적이면서 에너지가 충만했으면 해서, 인생의 굴곡을 많이 겪었을 나이대보다는 30대 중반쯤으로 설정했다.

-원래 연쇄살인마에 비해 형사 캐릭터는 특징을 잡기가 힘들다. 그래서 김형민이 골프를 칠 만큼 유복하다는 설정 같은 게 재미있었다.

=김윤석 선배를 설득할 때 형사라는 직업이 새롭지 않지만 형민이 수행하는 미션과 수수께끼를 풀어나가는 방식이 새롭다는 것을 강조했다. 그는 인간과 사회에 대한 예의가 있는 형사다. 수사할 때 가죽 잠바에 운동화가 아닌 단정한 슈트를 입는 모습으로 그 디테일을 잡았다. 범인에게 유린당할 때 감정 기복이 그렇게 크지 않게, 심한 욕도 하지 않도록 갔다. 실제 김정수 형사도 골프를 치는데, 사실은 그런 여유가 사건에 집중할 수 있는 배경이 되기도 했다. 그럼에도 김윤석 선배는 자신이 연기했던 캐릭터들과 싸움을 해나가고 있더라. 단 하나라도 겹치는 것을 싫어했다. 심지어 예전에 어느 영화에서 같은 색깔의 옷을 입었다며 의상을 바꾼 적도 있다. <1987>(2017)과 <암수살인>을 보면 같은 경찰 캐릭터여도 완전히 다른 얼굴을 보여준다. 다양한 스펙트럼을 표현하는 것을 보며 정말 천재라고 생각했다.

-액션 장면이 많지도 않고, 강태오의 살해 장면을 섬뜩하게 찍는 데 힘을 주지도 않았다. 전반적으로 양념을 안 쳤다는 느낌을 받았다. (웃음) 대신 접견실에서 이루어지는 두 주인공의 대화 신이 많다. 볼거리를 기대하는 관객에게 어떻게 충분한 긴장감을 주느냐가 숙제였겠다.

=먼저 관객이 다른 영화보다 훨씬 적극적으로 이야기에 개입했으면 해서, 형민에게 던져진 수수께끼를 함께 풀어나가도록 구성을 짰다. 칼국숫집에서 형민이 태오를 처음 만나듯 관객도 그때 그를 처음 만난다. 캐릭터 면에서는 정적으로 보이지만 텍스트 이면에 숨겨져 있는 에너지를 보여줄 수 있는 배우의 눈빛이 중요했다. 그게 내가 생각해왔던 김윤석 선배의 눈빛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 영화가 실제처럼 보였으면 해서, 미장센은 사실주의에 기반을 두고 디자인했다. 원래는 이런 장르가 갖고 있는 관습대로 접견 장면을 인위적인 조명과 세트로 보여주려고 했는데, 영화랑 안 어울리더라. 멋진 이미지가 이야기를 잡아먹었다. 그래서 실제 부산 사상에 있는 경찰서 옛 건물을 드레싱해서 접견실로 만들었다. 이런 장르에서 망원렌즈를 잘 안 쓰는데, 우리는 관객이 주관적으로 개입하게 만들기 위해 많이 썼다. 특히 현실에 있는 빛을 그대로 재현하기 위해 황기석 촬영감독이 굉장히 노력했다. 김윤석 선배가 이렇게 조명을 많이 치는 현장은 처음 봤다고 했다. (웃음) 원래 <친구>(2001),<형사 Duelist>(2005) 등에서 스타일리시한 촬영을 선보였으며, 한국영화에서 어떤 성취를 일궈낸 분이다. 강한 콘트라스트로 입체감을 표현하는 일명 렘브란트 조명과 룩으로 이후 많은 작품에 영향을 미쳤는데, 이번에는 그런 거 하지 말자고 했다. 단역을 포함한 모든 배우가 양식화된 연기도 하지 않았다.

<암수살인>

-황기석 촬영감독은 미국에서 지내며 조용히 사는 것으로 아는데 어떻게 한국으로 데리고 올 수 있었나. (웃음)

=<억수탕>(1997) 때 만나서 알게 된 지 20년 된 사이다. 김윤석 선배가 캐스팅된 후 이 영화를 꼭 찍어줬으면 좋겠다고 프러포즈했다. 이 영화를 하고 싶은 이유를 묻길래 세 가지를 정리해서 메일로 보냈다. 폴 세잔의 포커 치는 두 남자 그림, 안톤 브루크너의 미완성 교향곡 9번, 그리고 기획 의도. 세잔의 그림은 눈에 보이는 빛이 아닌 주관적 해석을 통해 보여주는 진실에 집중하는 작품이다. 브루크너의 곡은 굉장한 불협화음을 보여주는데 그 안에서 폭풍이 몰아치는 느낌이 있다. 접견실 마지막 클라이맥스에서 그런 느낌을 주고 싶었다.

-접견실 장면을 비롯해 두 배우의 날 선 긴장감이 잘 포착된 촬영이었다.

=현장의 유기성과 생동감이 중요한 작품이라고 촬영감독과 합의했고, 프리 프로덕션 때 완전히 숏을 디자인해서 정하지 않고 현장 상황을 포착하는 방식으로 가자고 했다. 그래서 A캠과 B캠을 운용하며 두 배우를 찍었다. 보통 카메라 하나로만 찍으면 한쪽은 가짜 연기를 하는데, 라이브하게 두 배우를 찍으면서 진짜 연기로 서로 부딪칠 수 있게 했다. 카메라 두개를 운용한다는 게 쉽지 않다. 조명도 두개 세팅해야 하고, 현실적 제약도 있는데 촬영감독이 정말 탁월하게 디자인해줬다. 스탭들은 현장에서 순발력을 발휘해야 해서 좀 힘들었을 수 있는데, 내 입장에서는 영화가 잘 나와야 하니까. (웃음)

-<억수탕>, <닥터 K>(1999)의 조감독으로 본격적인 영화 커리어를 시작했다. 그때 함께한 곽경택 감독의 이름이 <암수살인> 각본과 제작 총지휘 크레딧에 올라왔다.

=단편 <줄서기>(2001)에도 감독님의 이름이 제작 총지휘에 올라와 있다. 제작자 이상의 기여를 해주신 감독님에게 드리는 예우라고 이해해주면 될 것 같다. 개인적으로 나와 감독님의 관계는 영화적 유전자가 섞여 있고 경계가 모호한 지점이 있다. 시나리오도 핑퐁처럼 주고받으며 썼고, 제작자가 아니었을 때도 내가 쓴 트리트먼트에 대해 다 인지하고 계셨다. 워낙 다 지켜봐주고 서로 99% 이해할 수 있는 관계라, 주지훈의 사투리 교육도 정중하게 부탁드렸다.

-원래는 보도국 기자가 되고 싶었다고 들었는데, 어쩌다가 영화계에 발을 들이게 됐나.

=병장 시절 후임들이 쇼 프로그램을 보길래 장난으로 교육방송이나 틀라고 했는데, 그때 본 게 EBS 영화소개 프로그램 <시네마 천국>이었다. 장준환 감독의 <2001 이매진>(1994)을 보여준 후 스튜디오에 모인 사람들이 작품의 사회문화적 의미에 대해 토론하는 모습이 재미있어 보였다. 나도 잘 만들 수 있겠다는 아주 무모한 생각을 했다. (웃음) 제대 후 <씨네21>을 보며 영화 공부를 하다가 잡지에 광고로 실린 한겨레영화학교에 들어갔다. 이후 단편영화제를 기획할 때 곽경택 감독의 <영창 이야기>(1995)를 선정하면서 그 인연이 지금까지 이어졌다.

-<세이 예스>(2001) 조감독을 한 후 단편영화 <자백>(2010)을 연출하기까지 그사이 활동이 뜸하다가 2012년에 장편 <봄, 눈>을 찍었다.

=장편 데뷔 준비는 2001년부터 했는데, 메이드가 잘되지 않았다. 그 과정에서 스스로 준비되지 않은 부분이 뭔가를 생각하면서 감독으로서 성장할 수 있었던 거 같다. 그러다 내 실제 얘기를 담은 <봄, 눈>을 저예산으로 만들 기회가 생겼는데, 거의 20세기 독재자 감독처럼 찍었다. 그렇게 하니 내가 만족할 만한 결과물이 나오지 않더라. 영화는 감독이 귀를 열고 전문가인 스탭들과 함께 만들어야 한다는 생각을 그 이후에 했고, 그렇게 만난 게 <암수살인>이다. 곽경택 감독님, 김윤석 선배, 황기석 촬영감독 등이 도와주는데, 그들의 경험에 귀를 기울이지 않으면 나와 작품에 손해다. 바뀐 태도로 영화를 연출하니 요즘처럼 칭찬도 듣게 되는 것 같다. 돌이켜보면 그동안의 시간은 귀를 여는 과정이었던 것 같다. 앞으로도 이런 방식으로 영화를 만들고 싶다.

-휴먼 드라마 <봄, 눈>과 범죄 수사극 <암수살인>이 너무 다른 작품이라 앞으로 이 감독은 어떤 영화를 찍게 될지 되게 궁금하다.

=장르적으로 보면 굉장히 다르지만 ‘과연 인간이란 무얼까’ 하는 인간에 대한 관심이란 공통분모가 있다. 다음 작품도 아마 그런 ‘사람에 대한 이야기’가 될 것 같다. 나에게도 사회적으로도 의미가 있다는 판단이 될 때는 장르적으로 굳이 제약을 두지 않을 거다.

관련 영화

관련 인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