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읽기]
정성일의 <복수는 나의 것> 비판론 [2]
2002-04-25
글 : 정성일 (영화평론가)
그들은 이유 없이 죽는다, 코미디다

모두들 정시에 도착한다

그러니까 원인과 결과 사이에 어떤 중재자가 들어온다. 이때부터 <복수는 나의 것>은 현실에서 실재의 영역으로 넘어오는 대신 원인이 괄호 쳐진 환상의 형식으로 후퇴하기 시작한다. 그럼으로써 이 영화를 지배하는 것은 하드보일드가 아니라, 절대적 필연성에 사로잡힌 목적론의 세계이다. 또는 신비주의가 서술과정을 장악하고, 그 안에서 인과관계는 중재자를 절대자의 자리에 끌어올려 그의 내재적 결정을 따른다.

류가 화장실에서 소변을 보는 그 순간에 장기밀매단 스티커를 붙이는 청년들이 나타난다. 팽기사는 류의 공장장의 딸로부터 동진의 딸에게로 대상을 바꾸게 만들어주기 위해 그 시간에 도착한다. 누나를 묻는 그 장소에, 그 시간에 뇌성마비장애자가 나타나 잠 든 유선을 깨워준다. 유선은 결국 죽음을 피하지 못한다. 동진이 류의 아파트에 갔을 때 옆방에서는 라디오 프로그램에서 마침 류의 사연을 낭송하고 있다. 그걸 동진은 놓치지 않고 듣고, 그 냇가에 다시 간다. 그 장소에서 돌을 던지는 동진이 돌을 드는 장소는 바로 류가 누나를 묻은 그 나무 아래이다. 그 순간 때를 맞춰 뇌성마비장애자가 (혹시 알아보지 못할까) 목에 목걸이를 걸치고 동진 앞에 나타나 류와 영미의 자동차 번호와 차종과 색깔을 써준다. 모두 죽이고 나니까 그제서야 차를 몰고 혁명적 무정부주의 동맹 회원들이 나타나 동진을 죽인다.

모두들 정시에 그 장소에 도착한다. 이것은 인과율의 세계이며, 그들 하나하나를 넘어서는 전체적인 운명의 법칙이 단 한명도 비켜나가지 않고 집행되는 과정이다. 아무도 여기서 예외가 아니기 때문에, 모두 죽는다. 그러므로 이것은 부조리한 희생을 몰고 오는 신의 코미디이다. 예수는 아직 도착하지 않았고, 죄의식과 희생양들은 온몸으로 폭력을 고스란히 껴안는다. 오직 유선만이 부활하지만, 그러나 동진 앞에서만 온몸에 물을 뚝뚝 흘리며 기적을 행하고 류는 끝내 다시는 그녀를 보지 못한다. (후렴구) 그녀가 아버지에게 돌아오는 동안, 팔레스타인에서는 이란의 탱크가 아이들을 죽이고 있다구! 중얼중얼.

무정부주의 원더랜드의 하드보일드

모두들 하는 말이지만, 가장 이해할 수 없는 인물은 영미이다. 그녀의 서클은 국정원에서도 알지 못하는 지하조직이다. 그녀는 (판결문을 쓰다가) ‘민중’이라는 말이 ‘무산계급’으로 대체될 수 있다고 믿는 세계관을 가지고 있다. 그녀는 무산계급의 이름으로 ‘좋은’ 유괴를 선동하고, 거리에서 “재벌해체, 미제추출, 민중생활 파탄내는 신자유주의를 박살냅시다”라며 전단을 나눠준다. 그런데 그녀의 조직 노선은 무정부주의이고, (동진에게 전기고문 당하면서 한 그녀 자신의 말에 따르면) 테러단체이다. 그녀는 셍-시몽이나 프루동, 바쿠닌, 조르주 소렐을 읽는 적은 없는 것 같다. 그녀는 정부 대신 자본주의와 ‘이상한 방법으로’ 싸운다. 그리고 그녀의 동맹 그룹에서는 판결문에서 “무산계급과 혁명의 이름으로” 동진에게 사형을 언도한다. 만일 영미가 주장하는 슬로건과 행동을 그대로 따른다면 그녀의 이데올로기는 혁명적 신디컬리즘이라기보다는 19세기 무정부주의자 클로포드킨의 테러리즘에 더 가깝다.

한 가지 괴상한 점. 또한 영미는 반공주의자이다. 그녀는 줄넘기 놀이를 하면서 “무찌르자, 공산당… (중략) 대한남아 가는 길, 승리뿐이다”라고 노래부른다. 이 노래는 그녀가 영화에서 부르는 유일한 노래다. 여기서 이상하게도 그 밑바닥에서 웅성거리는 것은 단순-과격-무식한 삼위일체를 이룬 정치적 입장의 모순으로 가득 찬 불편함과 어색함이다. (설마 이것이 자신이 시나리오를 쓰고 연출하지 못한 <아나키스트>에 대한 연민이 리믹스된 복수라고 생각하는 건 아닐 것이다!)

이것이 <복수는 나의 것>의 정치적 무의식이다. 유괴만으로 부족해서, 그 유괴의 논리를 세우기 위해서, 자기의 정당성을 내세우기 위해서, 영미가 개입한다. 그녀는 유괴의 이론이며, 죽음을 알리는 도미노이다. (어찌되었건) 그녀 자신의 말에 따르면 “보통 사람이 아니다”. 그냥 간단히 말하면 영미는 (류의) 이론이며, 지식이다. 한 마디로 더 간단하게 류가 하고자 하는 행동의 안에 자리잡은 초자아이다. 그러니까 그녀는 세상에 대한 판결문이며, 세상으로부터의 명령이다. 그러나 동시에 영미는 류가 만들어낸 환상이다. 류가 영미와 처음 만나는 장면에서 두 사람이 거울을 보고 대화를 나누면서 호주에 사는 머리 둘 달린 사람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는 것은 의미심장하다.

문제는 영미의 정치적 자아가 이 영화의 정치적 무의식이 되어버리는 순간이다. <복수는 나의 것>의 정치적 모순은 계급모순에도 불구하고 계급투쟁의 불가능성을 말하는 것이다(자! 솔직히 말하면 나는 이 순간 이 영화와 정치적으로 결별했다). 영미가 등장하는 순간 이미 결정된 것이다. 진심으로 이 영화가 하드보일드라면, 영미는 팜므 파탈이고 류는 자기도 모르게 사건에 불려간 탐정일 것이다. 류는 희생자이자 범죄의 일부이다. 그런 의미에서 동진조차도 희생자이지만, 더 큰 관점에서 범죄의 일부이다. 왜냐하면 그는 부자이기 때문이다. 부자라는 것은 영미의 판결문에 따르면 사형을 당해 마땅한 유죄이다. 그는 이미 팽기사를 죽이지 않았는가? 영미의 이론에 따르면 따를수록 모든 등장인물들은 점점 더 자기 직업이 만들어낸 토대에 걸맞은 반영(?)으로 축소되고 환원되고 도식화되어간다. 인형극은 지루한 대사를 반복하면서, 서로가 서로에게 책임을 묻는다. 그러나 이들의 복수극은 계급투쟁이 아니라, 살인에 대한 인과응보이며 소급이다. 류와 동진의 계급투쟁은 일어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 두 사람은 닮아가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아주 공들인 류와 동진 사이의 교차 편집들. 그런데 그 몽타주에서 그 둘 사이를 연결하는 것은 폭력의 리비도이다. 어떻게 해서든 리비도는 소비되어야 한다. 한 가지 생각할 점. 예외없이 (노소를 가리지 않고) 여자들은 희생되고, 남자들은 복수한다. 이 영화에는 이상한 마초주의가 있다. 그런데 여기에 대해서 페미니즘은 침묵으로 응답한다.

스탈린주의의 가장, 또는 산타할아버지

좀 우스운 일이긴 하지만 영미의 정치적 실천은 부자와 가난한 자 사이의 “자본의 이동으로 화폐의 가치를 좇나게 극대화”하는 것이었다. ‘착한’ 유괴는 영미의 관점에서 정치적으로-윤리적으로 올바른 것이다. 그러나 예정인과율은 그것을 부정하기 위하여 단 한 가지 사실만을 알려주면 된다. 류의 퇴직금 수령증 한장은 누나의 죽음을 가져오고, 누나의 죽음은 영선의 죽음을 낳고, 영선의 죽음은 영미를 죽음으로 이끌고, 류를 죽게 만든다. 여기에는 희생양의 논리가 있다. 착한 자들이 죽어야 하는 것은 그들이 죄를 지었기 때문이다. 그들이 착하게 살아왔는데도 유죄인 것은 그들이 저지른 죄 때문이 아니다. 류는 가난한 노동자라는 사실이 유죄이며, 동진은 돈을 번 부자이기 때문에 유죄인 것이다. 유괴는 원인이 아니라 결과이며, 그들은 원인 앞에서 유죄이다.

그러나 <복수는 나의 것>은 원인을 다루지 않는다. 류와 동진이 같은 방식으로 죄를 짓기 전에 결백을 호소하는 것은 의미심장하다. 류는 다른 사람의 입으로 “나는 착한 사람입니다”라고 자기를 소개하고, 동진은 봉고차 안의 보이지 않는 위치에서 “나름대로 착하게 살아왔다”고 진술한다. 이건 마치 (의도적인) 고해성사처럼 보인다. 그런 다음 죄를 저지르는 두 사람은 희생자의 유죄 논리이다. 여기에 이 영화의 정치적 무의식이 드러난다. 그들은 자기 위치에서 모두 유죄이다. 혁명에 참여하지 않은 모든 이들에 대한 혁명의 이름으로 내리는 판결문으로서의 유죄, 여기에는 스탈린주의가 어슬렁거린다.

그런데 마지막이 이상하다. 동진 앞에 나타난 4명의 혁명적 무정부주의 동맹이 그를 죽이는 대목은 정말 이상하다. 죽이는 게 이상한 게 아니라 영화가 스스로를 부정하기 때문에 이상한 것이다. 영미가 죽은 다음 경찰의 조사에 의하면 “혁명적 무정부주의 동맹회원은 그녀 혼자”였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 말만 믿었고, 죽어가는 영미의 말을 믿지 않았다. “나한테 무슨 일 생기면, 우리 조직 테러단체니까, 아저씨 죽어, 백 프로, 확실히.” 우리는 이 영화를 받아들이기 위해서 상식을 버려야 한다. 상식을 버려야만 희생자들의 유죄를 받아들일 수 있게 된다. 동진이 죽어야 하는 것은 류를 죽였기 때문이 아니라 영미를 죽였기 때문이다. 이점이 이 영화의 히트다! 동진을 죽여야 하는데, 이제 죽일 사람이 남아 있지 않은 것이다. 어디서 불러와야만 한다. 사법의 테두리 바깥에서 진행되어온 이 영화는 구조 바깥으로 나가지 않으려고 버틴다. 영미에게서 시작한 도미노는 영미의 동맹회원들에 의해서 끝나야 한다. 영화는 크리스마스 이브의 부모님이 된다. “물론 우리는 산타할아버지를 믿진 않지만, 우리 아이들을 위해서 믿는 척해야만 한다….” 그러고나면 어어부밴드의 중얼중얼거리는 제목 낭송이 시작되고, 영화는 끝난다.

말씀(들)

한겨레신문 2002년 3월22일자 “폭력의 가속도 가볼 데까지 가봤다”(이상수 기자의 질문) <복수는 나의 것>이란 제목의 출전이 있나? (박찬욱의 대답) 구약성서 ‘신명기’에서 야훼가 “유대민족을 괴롭히는 인간들은 내가 다 처치하겠다”고 선언한다. 정의는 내가 세워줄 테니 사사로이 너희들이 그러지 말라는 신의 말씀이다. 그러나 이 영화에선 주인공들이 ‘신이 보낸 처형자’라도 된 양 서로에게 앙갚음한다.

나는 영화가 끝나는 순간 신약성서에서 누가복음 23장34절이 떠올랐다. 말씀하시길 “아버지, 저 사람들을 용서해주십시오. 저들은 자기가 하는 일을 모르고 있습니다.” 나는 14명이 죽어나가는 동안 끝내 그들의 죽음의 의미를 알 수 없었다. 또는 정치적으로 혁명적 무정부주의 동맹에 동의하지 않는다. (갑자기 흥분해서) 뉴욕 쌍둥이 빌딩 건물 지하에는 아직도 사람들이 묻혀 있다구! 복수로 가는 돈 계단, 중얼중얼….

주 (1) 본문의 첫 문단은 월간 mdm 4∼5월 합본호 20쪽 김치완님의 글에서 빌려온 것이다. 원문은 이보다 좀 길지만 전문을 게재하기 힘들어 ‘약간’ 수정하였다. 그룹 U2의 이 노래가 실려 있는 음반 <Rattle and Hum>은 ‘꽝’이라 내 라이브러리에 없어서 내용을 확인하지는 못했다. 한 가지 더. 이 영화의 영어제목은 <Sympathy for Mr. Vengeance>인데, 아마도 롤링 스톤스의 앨범 의 첫 곡 <Sympathy for the Devil>의 인용이 아닐까, 라고 생각한다. 이 영화와 제목이 같고, 감독 자신도 스스로 빌려왔다고 말한 이마무라 쇼헤이의 <복수는 나의 것>의 영어제목은 <Vengeance is Mine>이다.

(2) 나는 영화가 끝난 다음 이 글을 쓰기 위해 박찬욱의 인터뷰를 찾아보았다. 내가 읽은 인터뷰는 씨네21의 김지운과의 좌담 이외에 키노, 필름2.0, 시네버스, 프리미어, 스크린, 무비위크, 그리고 한겨레신문이었다. 그런데 이중 다섯 군데에서 그는 스스로 이 영화는 코미디라고 대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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