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읽기]
정성일의 <복수는 나의 것> 비판론 [1]
2002-04-25
글 : 정성일 (영화평론가)
그들은 이유 없이 죽는다, 코미디다

저 사람들을 용서해주십시오. 저들은 자기들이 하는 일을 모르고 있습니다.

그러나 악의 편견은 공허해져버렸다. 스스로 악이고자 했던 것은 일종의 선일 뿐이며, 악의 매력은 무(無)화시키는 힘에 집착할 뿐이므로 무화(無化)가 완성된 이후에는 그것은 더이상 아무것도 아니다. 악의는 ‘가능한 최대한으로 존재를 무(無)로 변모’시키려 했다. ‘그러나 그의 행위가 실현이므로 무가 존재로 변하고, 동시에 악인의 절대성은 예속으로 들어선다.’ 다른 말로 하면, 악은 선이 그렇듯이 하나의 의무가 되었다. - 조르주 바타유 <문학과 악>

모든 말은 말하여지기 위하여 말하여지지 않은 곳 속에서 그 자체를 둘러싼다. 그리고 문제는 이 모든 말이 어째서 이 금지 자체를 말하지 않는가를 아는 것이다. 즉 이 금지는 그것을 인정하고자 하기도 전에 인정될 수 있는 것일까? 어떤 말은 그것이 말하지 않은 것과 말할 수 없는 것의 부재조차도 표현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진정한 거부는 금지된 말을 배격한 행위에까지 확대되며, 그 부재가 인정되지 않기 때문이다. - 삐에르 마실레 <문학생산의 이론을 위하여>

코러스: (좀 난데없긴 하지만… 중략… 록 밴드) U2는 그들의 이미지를 동명영화에 담았습니다. 특히 <Bullet the Blue Sky>는 정말(본인들이야 진지했겠지만, 듣는 사람들을 진짜 웃긴) 히트였죠. “더운 여름날 로스앤젤리스의 한 호텔 방, 나는 존 콜트레인의 러브 수프림스를 듣고 있었지, (중얼중얼) 옆방의 커플은 목사가 나오는 티브이 프로를 보고 있다네… (그러더니 난데없이 흥분해서) 내가 아는 신은 돈이 부족하지 않다구! 엘살바도르의 하늘 위로 비행기가 날아가지… 미국으로 가기 위한 돈 계단… (어쩌구저쩌구)” 이 내레이션은 너바나의 벨기에 공연에서 다시 패러디되었습니다. “나는 벨기에의 한 호텔에 앉아 있다네, (쫑알쫑알) 갑자기 벨기에의 와플이 먹고 싶다네, (궁시렁궁시렁) 벨기에 와플을 먹기 위한 돈 계단 (어쩌구저쩌구)” (이게 텔레비전에서 다시 인용되는데) 소녀가 하루는 학교에 안 가겠다고 떼를 씁니다. (중략) 그러자 아버지가 일장 연설을 합니다. “네가 학교에 안 가겠다고 하는 동안, 엘살바도르의 상공에서는 미사일이 떨어지고 있다구… (어쩌구 저쩌구)”

목자와 양떼

올해 가장 웃기는 대사를 꼽으라면 나는 이의없이, 판결문, 차영미 피살사건을 심리한 결과, 박동진이, 한국무정부주의자 동맹의 일원을 고문하고, 살해한 죄가 인정되므로, 재판부 전원합의에 의해, 무산계급과 혁명의 이름으로 사형을 언도한다, 라고 쓰여진 종이를 박동진의 가슴에 칼로 꽂을 순간을 선택할 참이다. 이건 비꼬는 말이 아니다. (어찌되었건) 장사는 끝났다. 그렇다면 이제는 진담을 말해야 한다. 목자와 양떼들 사이에서 거짓말쟁이 소년은 누구였는가? 우리는 늑대를 비난해서는 안 된다. 늑대는 양을 잡아먹어야 살 수 있기 때문이다. 목자는 잃어버린 단 한 마리의 양을 찾아 오늘도 헤맬 것이다. 하지만 누가 영화에서 본 것에 보지 않은 것을 덧붙이는가? 보았다고 말한 것이 정말 거기서 보이는가? 이제 소설을 쓰는 일은 중단되어야 한다. <복수는 나의 것>을 보고 너무나 잔인해서 기절할 뻔했다고? 아마 그 말을 듣고 가장 먼저 웃을 사람은 박찬욱일 것이다. 왜냐하면 이 영화는 웃자고 만든 영화이기 때문이다. 이건 내가 아니라 박찬욱이 한 말이다. “어떤 사람들이 아무리 호러라고 주장해도 나는 코미디라고 생각한다. 아무리 사람들이 안 웃어도 모든 장면 또한 다 웃음이 있다.” 나는 그 말이 진심이라고 생각한다. 붉은 페인트가 많이 사용되고, 14명이 누울 자리가 부족하게 죽은 척하고 누워 있다고 해서 영화가 잔인해지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영화광 박찬욱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문제는 정말 사람들이 웃지 않은 것이다. 그러니까 여기에는 무언가 서로 빗나간 대상이 있다. 왜 웃음의 대상이 불가능한 욕망이 된 것일까? 반대로 대중들은 어디서 영화가 바라지 않는 오해의 환상을 연출해낸 것일까? 이 숨바꼭질의 진짜 술래는 누구일까?

왜 술래는 속지 않는가?

<복수는 나의 것>은 처음부터 술래잡기를 자처하는 영화이다. 이 영화의 첫 대사, 그러니까 시작하자마자, 전 착한 사람입니다, 성실한 근로자죠, 라는 여자의 목소리가 먼저 들릴 때, 그리고 나서야 그 목소리와 글의 주인이 다른 사람이라는 것을 알려주는 순간 우리는 경기장에 들어서는 것이다. 이 경기는 끝까지 계속되는데, 이 술래는 자기가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라고 말한 그 장소로 되돌아와야 한다. 경기장은 결국 거기이다. 엽서에 그려보낸 강가는 실재하는 장소이고, 그 장소에로 모든 등장인물들은 결국 돌아와야 한다. 영화는 거기서 시작해서 거기서 끝난다. 술래에게 붙들려 그 장소로 가면 그건 결국 죽는 것이다. 그러나 그림 그려진 그 강가의 물 속으로 카메라가 잠길 때, 그 순간 의도적인 페이드가 개입할 때, 우리는 이제부터 벌어지는 이야기가 사건인지 상상인지, 실재인지 무의식인지, 종잡기 힘들어진다. 그렇게 생각할 만한 이유. 라디오 소리를 듣지 못하는 류가 신청엽서를 보내고 누나와 듣는(척 한)다. 글은 하나인데, 말하는 사람과 듣는 사람, 그리고 글을 쓴 사람 중 어느 것 하나도 일치하지 않는다. 결여를 결여로서 자리매김하는 과정으로서의 빈자리의 술래들. 그리고 다시 페이드.

생략과 설명, 원인과 결과의 비대칭

그렇게 페이드는 반복된다. 그때마다 우리들은 어리둥절해진다. 페이드는 설명을 괄호친다. 그때마다 우리는 알아서 알았다 치고, 넘어가야만 한다. 생략은 점점 과감해지고, 설명은 점점 늘어진다. <복수는 나의 것>은 빼먹고 넘어가는 것이 많은 영화이다. 반대로 지루한 설명이 반복되는 장면이 많은 영화이다. 또는 그것을 미덕으로 여긴다. 류(와 영미)가 동진의 딸 유선을 유괴하는 장면은 빼먹지만, 동진에게서 돈가방을 빼앗는 장면은 장소를 옮겨가며 그 과정을 보여준다. 류가 장기밀매 사기에 말려들어 수술하는 장면은 빼먹지만, 물에 빠져죽은 유선을 부검하는 장면은 꼼꼼하게 (복부를 가르는 데까지만 보여준 다음) 들려준다. 또는 장기밀매단 가족을 죽이는 장면은 꼭 챙긴다. 팽기사가 자해극을 벌이는 장면은 보여주지만, 팽기사 가족이 음독자살극을 벌이는 과정은 빼먹는다. 여기에는 원인과 결과의 비대칭이 존재한다. 비대칭의 구조 속에서 가장 이상한 점. 남은 것은 모두 자살, 살인, 자해, 꽁꽁 묶인 채 헐떡거리는 숨소리, 고문, 비명, 피, 그리고 죽음과 직접적인 관계가 있다.

이 모든 것이 2천400만원을 챙기려는 유괴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런데 도대체 (영화 중반 이후) 돈가방은 어떻게 된 것일까? 왜 아무도 그 돈가방을 기억하지 못할까? 그 비대칭 사이에서 등장인물들 사이에는 이미 벌어진 사건을 할 수 있는 한 가장 나쁜 선택으로 해결하고 싶은 의지가 개입한다. 류의 누나는 류의 바지에서 퇴직금 수령증을 보는 순간 신기하게도 유선의 유괴를 (본능적으로?) 알아차리고, 유선을 돌려주려는 그 어떤 노력을 하는 대신 그냥 자살한다. 그 누나의 시체를 차에 태워서 류는 밤새 차를 몰아 고향까지 간다. 더 대담하게 생각되는 점. 그 옆에 유괴한 유선을 태워서 같이 간다.

류는 내가 알고 있는 한 영화사상 가장 대담한 유괴범이다. 또는 가장 무모한 유괴범이다. 그리고 기어이 그 강가에 도착해서 유선은 죽어야 한다. 유선은 거기서 죽어야 할 어떤 이유도 없다. 만일 있다면 딸은 죽어서 사랑하는 아버지를 그 장소로 기어이 불러온다. (동진은 류의 방에서 때려죽일 수도 있었는데, 기어이 강가로 데려온다. 마치 딸의 추억을 되살리기라도 하듯이) 엘렉트라 이야기의 가장 무시무시한 버전. 궁금한 점 한 가지 더. 돈을 받는 데 성공했는데, 또는 애인의 유일한 혈육인 누나가 죽었는데, 영미는 도대체 어디로 간 것일까? 그녀는 유괴에 성공한 날도 쉬지 못하고, 그녀의 말을 빌리면 “그런 자본의 이동으로 화폐의 가치를 좇나게 극대화”하는 데 성공한 날도, (아마도) 혁명동맹 건설에 너무 바쁘다. 또는 오직 그녀만이 강가에 오지 못한다. (후렴구) 내가 아는 신은 돈이 부족하지 않다구! 천국으로 가기 위한 돈 계단, 어쩌구저쩌구.

거꾸로 선 결정주의, 원인에 우선하는 결과

류는 동진을 협박하기 위해 어린 유선의 사진을 찍는다. 그런데 그녀는 류의 집에서 모두들과 참 친하게 지낸다. 그녀를 울리기 위해 달라는 목걸이를 빼앗는다. 사진을 찍은 다음, 유선의 아버지에게 보내기 위해 목걸이와 유선의 인형을 바꾸자고 제안한다. 그리고 마침내 사진과 인형이 유선의 아버지에게 도착한다. 그런데 그 사진 속의 유선의 목에는 목걸이가 걸려 있다. 어리둥절. 죽은 유선의 시신을 거두면서 딸을 죽인 자들을 찾는데, 그 앞에 유선의 목걸이를 한 뇌성마비 장애인이 나타난다. 사진 속의 목걸이와 장애인을 대조한 동진은 그가 그 순간 그 장소에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 장애인은 (정말 보통 사람이 해내기 힘든) 탁월한 기억력으로 류가 타고 온 자동차 번호와 색깔을 알려준다. 옥의 티?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원인과 결과 사이의 비대칭은 점점 이 영화를 웃음의 도가니로 몰고가기 시작한다. 사건은 원인으로 시작해서 결과를 향해 가는 대신 모든 결과가 원인을 만들어내기 시작하고, 또는 원인은 결과에 의해 채워지고, 그 순간 일어나는 대상에 대한 착란은 구조의 고정점을 정하지 못하게 만든다. 술래가 기만하는 것인가, 쫓기는 자가 착각한 것인가? 이 비대칭의 구조 안에서 실재가 모순을 일으키는 단계까지 밀고 나아가자, 그 반대로 원인과 결과의 연쇄를 차단하고 그 의미의 연쇄망의 내부에서 모순을 만들어내고 마침내 그 틈새를 메꾸는 결정주의가 개입한다. 이 순간 사악한 순환이 시작된다. 실재의 왜곡을 지배하는, 우연과 필연이 자리를 바꾸는, 모든 차이가 필연성으로 와해되는, 그래서 설명하려는 대상들이 결정상태에서 모순을 무시하고서라도 사후승인이라고 불리는 그 어떤 절대적 질서를 끌어들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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