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인의 고전, 위대한 영미문학의 주요 리스트로 빠지지 않고 언급되는 <호밀밭의 파수꾼>. 1980년 존 레넌의 암살범 마크 채프먼이 자신의 진술을 <호밀밭의 파수꾼>으로 대신하겠다고 답할 정도로 신드롬에 가까운 지지층을 낳은 소설이다. 1951년 출간된 소설이 세계적인 신화를 자랑하는 것에 비해 J. D. 샐린저라는 작가의 이름은 그보다 늘 한뼘쯤 뒤편에 머물러 있는 듯했다. 샐린저 스스로 철저히 비밀의 삶을 추구했던 탓이다. 그가 살아 있었다면 제작을 극구 반대했을지 모를 <호밀밭의 반항아>는 평생 글쓰기에 있어서는 치열한 파수꾼으로, 기성사회를 향해서는 꼿꼿한 저항군으로 살아가길 원했던 제롬 데이비드 샐린저의 전성기를 요약한 작품. 케네스 슬라웬스키의 <샐린저 평전>에 기반해 실제 사건들을 묘사하는 데 충실하다. TV드라마의 배우로 먼저 얼굴을 알린 뒤, <헝거게임> 시리즈의 각본을 쓰며 활동 영역을 넓혀온 대니 스트롱이 연출 데뷔작의 메가폰을 잡았고, <매드맥스: 분노의 도로>(2015) 이후 강한 장르를 주로 소화했던 배우 니콜라스 홀트가 지적인 이미지에 도전했다. 홀트는 이번 영화에서 특유의 푸른색 눈을 숨기고, 짙은 갈색의 렌즈를 낀 채 J. D. 샐린저를 연기한다. 알면 알수록 심오한 면모를 드러내는 작가 J. D. 샐린저. 그에 관한 몇 가지 디테일들을 짚어봤다.
<호밀밭의 반항아>는 1919년에 태어난 작가 J. D. 샐린저의 대학 시절부터 <호밀밭의 파수꾼>이 탄생하는 과정을 그리면서,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그 기간의 가운데 즈음에서 이야기를 시작한다. 가장 어둡고 참혹했던 시절이 거기 있었다.
파수꾼을 꿈꿨던 낙제아
소파에 잠겨 F. 스콧 피츠제럴드의 <낙원의 이쪽>(1920)을 읽던 문학도는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자원입대해 1944년 노르망디 상륙작전에 투입됐다. 이듬해 그는 룩셈부르크에서의 격렬한 전투 이후 전쟁의 트라우마를 이기지 못하고 정신병원에 들어간다. 아마도 밤새 잠들지 못한 탓에 마주했을 푸르스름한 여명 속, 샐린저(니콜라스 홀트)는 자신의 가장 중요한 은사였던 휘트 버넷 교수(케빈 스페이시)에게 편지를 쓴다.
이는 감독이 만들어낸 내러티브가 아니다. <호밀밭의 파수꾼>의 전개 방식을 영화에 그대로 대입시킨 격이다. <호밀밭의 파수꾼> 속 주인공인 16살의 홀든 콜필드는 연이은 낙제를 빌미삼아 제도권 교육을 뛰쳐나온다. 소설은 홀든이 학교를 관두고 집으로 돌아가기까지 겪는 약 이틀간의 방황을 담는다. 독백에 가까운 회상 끝에, 실은 홀든이 정신적 붕괴를 견디지 못하고 요양소에 있음이 드러난다. 홀든 콜필드는 샐린저가 자신을 십분 반영해 만든 문학적 페르소나다. 한 사람의 삶을 중심으로 무수히 가지를 뻗어나온 창작물들, 즉 아이코닉한 작가가 쓴 단 한권의 장편소설과 그 작가를 다룬 전기영화가 서로 단단히 얽힌 채 공명한다는 사실을 구태여 우선순위로 적어두고 싶다. 파수꾼(catcher)이 있어야 할 자리에 반항아(rebel)를 집어넣은 이 호기로운 제목에는, 자신의 삶과 문학을 일치시킨 J. D. 샐린저에게 스포트라이트를 비추고 싶은 감독의 바람이 깃들어 있다.
이유 있는 반항
“재밌군. 이건 실제로 겪은 일인가?” “아니요, 경험한 일에 허구를 더했습니다.” “그걸 뭐라고 부르는지 아나? 바로 글쓰기라네.” 가장 가깝고, 잘 아는 이야기에서 출발했으나 자아에 압도당하지 않은 글, 그리하여 남들에게도 흥미진진하게 읽히는 글. 버넷 교수와 교류하며 J. D. 샐린저는 좋은 소설의 이치를 빨리 깨우쳤다. <스토리>에 단편소설 <젊은이들>을 실은 것이 데뷔였다. 이후 <뉴요커>의 관심을 받으며 단편을 통해 처음 탄생시킨 홀든 콜필드 캐릭터는 당대의 허위의식을 극도로 혐오했던 샐린저의 대변자로 자리잡았다. 샐린저는 어쩌면 필요 이상으로 세계와 반목했는지도 모른다. 그는 대대로 육류와 치즈를 유통하며 쌓아온 부를 이어받은 유대인 아버지와 아일랜드인 어머니 밑에서 태어났다. 부족함이라곤 없었지만, 중학생 시절부터 성적 불량과 자퇴를 반복했다. 또래보다 조숙하고 예민한 눈을 지녔던 탓이다. 능청스럽고 염세적인 유머가 주특기였던 청년은 뉴욕대, 우르시누스대를 중퇴하고 집안의 문제아로 낙인찍힌다.
컬럼비아대에서 자리를 잡는 듯했으나, 이내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했다. 전쟁의 트라우마로 고통받으면서도 그가 <호밀밭의 파수꾼>을 완성할 수 있었던 이유는, 군대에서도 늘 종이와 펜을 휴대했기 때문이었다. 환멸과 냉소의 작가였지만, 샐린저는 동시에 치열하게 이상을 추구했다. <호밀밭의 파수꾼> 속 홀든 콜필드는 호밀밭에서 뛰노는 아이들이 낭떠러지 가까이에 다가가면 얼른 뛰어가서 붙잡아두는 파수꾼이 되고 싶다고 말한다. 아마 전쟁 당시의 샐린저에게 홀든 콜필드 캐릭터가 정확히 같은 역할이었을 것이다. 틈틈이 작업을 해나간 정도가 아니라, 노르망디 상륙작전 개시일에 유타 해변에 상륙할 때도 원고를 가득 챙겼다. 미래의 <호밀밭의 파수꾼>이 될 6개 챕터가 샐린저의 군복 주머니 속에 잔뜩 구겨져 있었다.
신드롬과 함께 사라지다
전쟁에서 돌아온 이후 기대 끝에 <호밀밭의 파수꾼>을 완성했음에도 출판 섭외는 쉽지 않았다. 기성세대는 홀든 콜필드를 이해하지 못했다. “그는 미친 거지요?” 같은 질문들이 매우 예의바르게 튀어나왔다. 그러나 1951년 소설이 세상에 소개된 뒤, 샐린저 자신도 예상하지 못했던 규모로 엄청난 반향이 일어났다. 이른바 샐린저 신드롬의 시작이었다. 출판 당시 인기를 구가한 것은 물론이었고, 체제에 대항하는 전세계의 전복적 움직임이 시작된 1960년대에 이르러서도, 자유를 부르짖는 청년들에게 교본처럼 여겨졌다. 1961년 9월 15일자 <타임>의 표지로 샐린저가 선정된 것이 그 상징적인 의미를 보여준다.
하지만 샐린저는 초판 발행 2년 후 세상과 등지기로 결심했다. 수수께끼의 작가(enigmatic author). 영미권에서 샐린저를 수식할 때 어김없이 불려나오는 단어다. 1953년 뉴햄프셔의 외딴곳으로 이주한 그는 일체의 인터뷰를 거절하며 남은 여생을 보냈다. <9개의 단편>(1953), <프래니와 주이>(1961), <목수여, 지붕의 대들보를 높이 올려라>(1963) 등 중·단편 작업을 이어가다 1965년 이후 작품 공개마저 거부했다. 영화에서 묘사한 대로 그사이 단 한건의 인터뷰가 있었지만, 이마저도 불협화음으로 끝났다. 지역 고등학교 교지 <데일리 이글>의 인터뷰에 응했으나, 인터뷰가 멋대로 편집되어 지역신문에 게재되자 분노한 것이다. 샐린저는 그길로 집 주위에 높은 울타리를 쳐서, 표면적 의미 그대로 세상과 등을 졌다.
“아무것도 보상받지 못할지라도 글쓰기에 평생을 바칠 수 있는가?” 대학 시절 출판사를 전전하며 열의를 불태우던 신인 작가의 채찍질과도 같았던 질문이 중년의 샐린저에게는 자기 치유적 의미로 변주된다. 정신 건강을 위해 명상에 심취한 것이 계기였다. 서양인들이 관심을 갖기 시작한 선종 불교의 수련을 갈고 닦은 샐린저는 이어서 힌두교를 공부했고, 크리스천사이언스와 사이언톨로지 같은 이단 종교에도 관심을 가졌다. 영화가 다루진 않지만 한편으로 그의 이런 관심은 다소 기행적으로까지 이어진 것으로 보인다. 동종요법과 매크로바이오틱(제철음식을 뿌리부터 껍질까지 먹는 식습관) 채식을 거쳐, 샐린저의 딸이 발표한 전기에 의하면 이후에는 자신의 오줌까지 먹었다고 한다. 오스트리아 출신의 정신 분석학자가 발명한 상자에 들어가서 오르곤 에너지 회복이라 불리는 의식을 이어가는 등 신비주의 세계에도 관심을 넓혔다. 샐린저의 소설은, 역시나 정직하고 투명하게 작가의 상태를 반영하고 있었다. 그의 후기작들은 보다 명상적이고 내면적인 성향을 드러낸다. 타자와 불화했던 샐린저의 삶은 그렇게 오로지 자신의 소설을 통해서만 세계와 연결되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