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 동창생들의 부부 동반 모임이 스마트폰 하나로 산산조각 나버린다. 창밖에선 한창 월식이 진행 중인, 이 비일상적인 저녁에 새삼 타인의 아득함을 깨닫는 세 여자가 있다. 보수적인 남편과 전업주부의 규율에 짓눌린 수현(염정아), 남부러울 것 없으나 어딘가 마음이 허기진 정신과 의사 예진(김지수), 그리고 신혼의 기쁨과 염려로 물든 수의사 세경(송하윤)이 그들이다. 동갑내기인 염정아, 김지수 배우와 가장 막내였던 송하윤 배우는 갓 촬영을 끝내고 돌아온 사람들처럼 생생한 이야기들을 쏟아냈다. 화기애애한 분위기에 한번, 허심탄회한 답변들에 두번 놀랐던 세 배우와의 만남을 전한다.
=염정아_ 태수(유해진)의 아내 수현은 문학에 빠진 전업주부다. 시나리오에서 표현된 것보다 좀더 순진하고 한편으론 맹해 보이는, 그래서 관객에게 귀엽게 다가갈 수 있는 지점을 열어뒀다.
=김지수_ 예진은 속내를 잘 드러내지 않는 인물이다. 얼핏 차갑게 느껴질 수도 있을 것 같다. 시나리오를 읽으면서 예진의 과감함에 자주 놀라곤 했다. 비밀을 품고 있으면서도 그렇게 다부지게 행동할 수 있는 사람은 세상에 많지 않을 것 같다. 구조상 영화는 인물들의 과거를 보여주지 않지만, 남편인 석호(조진웅)와 보낸 20년의 결혼생활을 가늠해보면서 배우로서 인물의 상처를 헤아리게 됐다.
=송하윤_ 세경은 사랑에 있어서만큼은 직진하는 인물이다. 그게 다른 누군가이건 나 자신이건. 표현도 과감하고, 사랑 앞에선 눈치 안 보고 최선을 다하는 여자라서 좋았다.
염정아_ 배우들은 직업상 시나리오를 많이 접하지만 <완벽한 타인>처럼 완성도 높은 시나리오는 드문 편이다. 동료들이 그려낼 캐릭터를 상상하고, 그 사이에서 내 몫을 찾고 고민하는 것만으로도 기대감이 높았다.
김지수_ 이재규 감독님은 과거에 MBC 드라마 <보고 또 보고>(1998) 조감독일 때 이미 한번 만난 적 있다. 그때는 나도 감독님도 참 젊었지. (웃음) 그리고 자주 하는 이야기지만… 여성배우로서 마음이 단박에 동하는 작품을 만나기 어려운 것도 사실이다. 비중 면에서도 그렇고. 그래서 <완벽한 타인>은 내 캐릭터가 돋보이는 것보다도 작업 자체에 의미를 뒀다.
송하윤_ 현장에서 느낀 이재규 감독님의 지휘력도 인상적이었다. 배우들이 자기만의 방식으로 캐릭터에 접근할 수 있게 정확히 유도하시더라. 나는 완벽하게 연습하기보다 현장에서 찾아나가는 것들을 중시하는 편인데, 그런 부분까지 신경 써주셨다.
염정아_ 이번 현장이 참 즐거웠다. 긴 호흡의 신을 여러 번 촬영해야 하는 점이 좀 힘들긴 했지만. 대사가 쉴 새 없이 치고 빠지는 생생한 느낌이 중요해서 이 부분을 잘 살려보려고 애를 먹었다.
김지수_ 여러 사람이 모여서 밥 먹다보면 자연스럽게 말이 겹치기도 하고 가까이 앉은 사람들끼리 따로 소곤거리기도 하잖나. 각자 다른 주제로 말하기도 하고. 사운드 감독님과 스탭들의 고생이 많았다.
송하윤_ 한참 찍다가 한번 엔지가 나면 그 지점부터 다시 시작하는 게 아니라 아예 처음부터 찍을 수밖에 없었다. 계속 톤이 달라지고, 애드리브도 다르니까. 가끔은 정말 실시간 상황 같았달까.
김지수_ 굉장히 연극적인 설정이지만, 막상 연극처럼 완벽히 연습하고 짜맞춘 상태로 연기하진 않는다는 점이 아이러니였다. 그래서 개인적으론 고민이 많았다. 기존에 해왔던 방식을 깨끗하게 버려야 했으니까. 처음 7명이 모인 날, ‘멘붕’이 와서 밥을 못 먹었다. (웃음) 특히 영화 초반엔 예진이 스마트폰 공개 게임을 제안하기 때문에 상황을 리드해야 하는 부담감이 있었다.
염정아_ 각 인물에게 돌아가면서 각자의 휴대폰에 전화나 문자가 오니까 촬영일마다 중심이 되는 배우가 있었다. 무슨 일이 있어도 7명의 배우가 모두 필요한 컨셉이어서 어떤 날은 하루 종일 ‘병풍’ 역할에 집중하기도 했지.
김지수_ 컷이 바뀔 때마다 연결 동작 맞추느라 고전했던 기억, 하루 종일 같은 음식을 먹었던 기억도 생생하다. (웃음) 그래도 <완벽한 타인>은 배우 생활 중 웃는 얼굴이 가장 많이 담긴 영화가 될 것 같다.
염정아_ 지수의 필모그래피에서 분위기가 가장 밝은 작품이 아닐까?
김지수_ 아마도. 정아가 연기한 수현은 남편과 가정의 일들로 스트레스가 참 많은 여자다. 억눌린 감정들이 있다.
송하윤_ 정아 선배님이 원래 가지고 있는 귀여운 매력도 잘 드러났다!
김지수_ 그리고 원래 정아가 그렇게 복잡하게 사는 사람이 아니다. (웃음) 순수하기도 하고, 스트레스 관리도 잘한다.
염정아_ 요즘은 인간적인 면모가 돋보이는 캐릭터를 만나면 반갑다. 한때는 차가워 보인다는 이미지에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고, 아니라고 말하기도 했는데 이제는 타인이 규정하는 내 모습도 나의 일부분이겠거니 생각한다. 누구나 매우 복잡하기 마련이니까. 보여진 대로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지고 싶다.
김지수_ 나는 보기보다 그렇게 냉정하지 못한 사람이다. 타인들로 인해 자주 흔들리기도 하고, 주변에 감정이입을 많이 해서 스스로를 힘들게 만드는 편이다.이제는 그러지 말자고 생각하면서도 잘 안 된다.
염정아_ 감수성이 남다른 거지. 배우로서는 큰 장점이라고 생각한다.
송하윤_ 나는 지금껏 밝고 통통 튀는, 슬퍼도 억척스럽게 이겨내는 캔디 같은 역할을 할 기회가 많았다. 앞으로 여러 작품을 만나서 다양한 이미지를 보여주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