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에서 아파트 하면 주로 투자나 투기 대상으로 인식된다. 매일 뉴스에 나오는 아파트 소식 대부분이 집값 문제나 부동산 정책과 관련된 얘기가 많은 것도 그래서다. 하지만 10월 25일 개봉한 다큐멘터리 <집의 시간들>은 아파트를, 집값 문제나 부동산에 관련한 욕망으로 다루는 작품이 아니다. 오히려 옷, 음식과 함께 사람이 살아가는 데 꼭 필요한 ‘주’(住)거지로서 집이 가진 의미를 이야기하는 작품이다. 첫 장편다큐멘터리를 연출한 신인 라야 감독을 만나 영화에 대한 자세한 이야기를 나눴다.
나는 아파트 키드가 아니다. 단독주택에서 나고 자랐다. 대학을 진학하기 위해 상경한 뒤로는 성냥갑 같은 원룸들을 전전했다. 결혼하고 나서는 마을 사람들과 함께 지은 공공주택에서 줄곧 살아왔다. 아파트 근처에 가보지 못한 내게 아파트는 주거지로서 어떤 공간인지 한번도 실감해본 적 없다. 오히려 ‘억억’ 하는 집값 탓에 살 엄두조차 내지 못하는 아파트는 그림의 떡에 더 가까웠다. 그런데 다큐멘터리 <집의 시간들>의 주인공인 둔촌주공아파트 같은 아파트라면(여건만 된다면) 한번 살아보고 싶다. 아이러니하게도 재개발 때문에 철거돼 이제는 그곳을 영영 볼 수 없지만 말이다.
<집의 시간들>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기 직전의 둔촌주공아파트를 카메라에 담아낸 다큐멘터리다. 서울 동쪽 끝자락에 위치한 둔촌주공아파트는 1980년 준공돼 143개동 5930세대가 거주하는 대규모 단지로 조성됐다. 1999년부터 재건축 논의가 시작되어 현재는 철거돼 재건축에 들어갔다. 영화에 등장하는 주민들의 사연은 다양하다. 연어가 회귀하듯이 이곳에서 나고 자라 결혼하면서 시댁에 잠깐 살았다가 남편, 아이와 함께 돌아온 사람도 있고, 이곳에서 태어났지만 지금은 다른 곳으로 이사간 사람도 있으며, 이곳에 이사온 지 오래되지 않아 원주민의 텃세(?)를 제대로 경험한 사람도 있다.
녹지가 많은 오래된 아파트 이야기
오게 된 사연도, 살아온 세월의 무게도, 앞으로 살아갈 곳도 제각각이지만, 이곳이 사람이 살 만한 공간이라는 데는 큰 이견이 없다. 이들이 얘기하는 둔촌주공아파트의 가장 큰 장점은 녹지가 많다는 거다. 봄이 되면 벚꽃이 활짝 피고, 창문을 바라보고 누우면 새소리가 들린다. 오솔길 같은 4단지 뒷길은 아름답고, 특히 비 내린 뒤 피는 안개가 근사해 단지 근처에 위치한 올림픽공원이나 일자산을 굳이 갈 필요가 없다. 준공될 때부터 단지 내 통학거리를 고려해 초등학교 2곳이 인접한 까닭에 “베란다에 널어둔 이불이 맞은편 학교 교실에서 보여 아이들에게 정서적으로도 좋”다.
둔촌주공아파트가 이상적인 공간처럼 보이지만, 주민들은 이곳을 다른 집보다 살기 편하다고 찬양하진 않는다. 아파트가 오래돼 머리를 감을 때 머리에서 피가 난 줄 착각할 만큼 녹물이 많이 나온다. 맞바람이 불지 않아 환기가 잘 안 되고, 그러다보니 장롱이나 옷에 곰팡이가 잘 핀다. 외벽이라 찬바람이 벽을 타고 들어와 겨울에는 몹시 춥다. 또 단수가 자주 되고, 뜨거운 물이 나오는 시간이 따로 있다. 이래저래 손이 많이 가고, 여러 불편함을 감수해야 하며, 유지 비용도 덩달아 발생하는 아파트다.
<집의 시간들>은 독립출판물 <안녕, 둔촌주공아파트>와 영상 프로젝트 ‘가정방문’, 두 프로젝트가 만나면서 기획된 영화다. 전자는 둔촌주공아파트에서 17년 동안 산 이인규씨가 아파트가 사라지기 전에 집과 삶을 기록하기 위해 주민들의 도움을 받아 만든 책이다. 주민들이 직접 쓴 아파트에 얽힌 추억들과 보내준 사진들은 아파트에 대한 그들의 애정이 얼마나 큰지 짐작할 수 있고, 그래서 사라지는 아파트에 대한 그리움이 무척 애잔하다.
후자는 말 그대로 라야 감독이 아파트 내 한 가정을 방문해 그의 집을 찍는 영상프로젝트다. 2015년부터 2016년까지 약 2년 가까이 진행된 ‘가정방문’ 시즌1은 합정동에 위치한 오래된 아파트인 합정아파트, 연희동에 있는 스페이스엠, 목동 다세대주택 등 서울시 곳곳의 낯선 공간 10곳을 카메라에 담았다. 아파트 옥상이나 복도에서 내려다본 풍경이 익숙한 듯 낯설다. 평소 <안녕, 둔촌주공아파트>를 잘 알고 있던 라야 감독이 이인규씨가 살던 둔촌주공아파트를 방문해 그의 집을 찍으면서 둘의 인연이 시작됐고, 이인규씨는 라야 감독에게 둔촌주공아파트의 집을 시리즈로 찍는 게 어떻겠느냐고 제안했다. <집의 시간들>은 ‘안녕, 둔촌주공아파트의 가정방문’인 셈이다.
이 영화의 주인공은 8가구의 집이다. 집들은 자신의 공간을 차례로 안내한다. 카메라는 거실, 방, 부엌 같은 집 안과 오솔길, 산책로, 놀이터, 야외 주차장, 현관 등 아파트 단지의 곳곳을 멀리서 관조하되 부모에게 물려받은 가구, 단전되면 켜지는 전조등 등 특별한 사연이 있는 소품이나 인테리어를 클로즈업숏으로 따로 강조한다. 집 구조나 가구의 배치, 공간의 쓰임새는 저마다 다르지만 모두 포근하고, 따뜻해 보인다. 8개의 집에 사는 13명의 주민들은 얼굴을 드러내지 않는 채 목소리로만 등장한다. 이름, 나이 같은 주민들의 신상 정보는 자막으로 따로 안내하지 않는 까닭에 집과 주민들이 들려주는 사연을 통해 어떤 사람(가정)인지 짐작할 뿐이다. 그러다보니 집과 아파트에 온전히 집중할 수 있다. 카메라의 움직임이 거의 없는 까닭에 동영상이지만 사진집을 보는 느낌을 준다. 주민들의 얼굴이 등장하지 않아 집이 직접 말을 건네는 듯하다.
한국의 아파트는 중산층과 정부 그리고 건설업자의 합작품이다. 1970년대부터 독재 정권이 재벌 기업과 함께 주택 시장을 좌지우지했다. 건설 업체들은 토지 및 정책적 지원을 받아 대량의 아파트 단지를 건설해 공급했고, 그렇게 벌어들인 수익을 발판 삼아 대기업으로 성장했다. 당시 많은 사람들은 내 집을 마련해야 중산층으로 진입할 수 있다고 믿었고, 너도나도 아파트 투기 열풍에 몰려든 것도 그래서다. 강남의 뽕밭이 콘크리트 숲이 되는 건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고, 둔촌주공아파트도 그때 준공된 아파트 중 하나다. 아파트를 직간접적으로 다루거나 배경으로 한 몇편의 한국영화들은 그때 그 시절 강남의 부동산 개발을 둘러싸고 정치 건달들의 이권 다툼을 그리거나(<강남 1970>(2014)), 잠실 부동산 개발과 흥망성쇠를 함께한 한 가족의 일대기를 통해 부동산에 대한 인간의 욕망을 다루어왔다(다큐멘터리 <버블 패밀리>(올해 12월 개봉예정)).
사적 다큐멘터리에서 공적 다큐멘터리로
부익부 빈익빈이 극대화되고, 아파트값이 천정부지로 솟으면서 중산층 진입 장벽이 높아진 지금, 아파트를 주거지로서의 기능보다는 부의 증식을 위한 투자나 투기의 대상으로 보는 시선이 훨씬 많다. 어쩌면 (특히 수도권 지역의) 아파트는 더이상 중산층을 상징하는 대상이 아닐지도 모른다. <집의 시간들>이 의미가 있다면 당신에게 둔촌주공아파트가 ‘집값이 얼마인가’라는 질문 대신 ‘어떤 공간인가’라는 질문을 던진다는 사실이다. 그 질문에 대한 주민들의 대답은 크게 다르지 않다. “애들이 (이곳에서) 안정적으로 컸다는 것에 만족해요. 이곳이 우리 집이다, 우리 홈타운이다라고 생각해요.” “오랫동안 참 길을 열어준 집이구나, 고맙다.” “여기서 제일 오래 살았죠. 제 고향보다도 훨씬 오래 살았죠. 우리 딸의 고향이기도 하고.” 많은 사람들에게 둔촌주공아파트는 고향이자 요양원이자 영감을 주는 곳으로 기억된다. 동시에 “여기서 노후를 보낼 것인가 아니면 좋은 값에 팔리면 (사는 곳을) 한번 바꿔봐? 생각이 반반이에요”라는 욕망을 솔직하게 드러내는 사람도 있으니 이 영화가 마냥 순진하지만은 않다.
어쨌거나 <집의 시간들>은 이제는 사라진 둔촌주공아파트를 그리워하는 송가에 그치지 않는다. “개발이 되면 이곳의 풍경은 없어지잖아요. 인공적인 조명, 조경, 분수대 이런 거 싫어요. 대리석을 발라놓고 ‘삐까번쩍’한 걸 바라는 게 아니라 자연과 조화롭고 우리 단지 안에 있는 산과 녹지를 살리는 방향으로 재건축이 되었으면 좋겠어요. 그런 아파트를 원해요.” 허물고 쌓아올리기를 반복하는 게 아파트라지만, 영화는 주민의 입을 빌려 아파트 재건축이 어떤 방향으로 진행되어야 하는지 제시한다. 사적 다큐멘터리에서 출발해 공적 다큐멘터리로서의 기능으로 확장된달까.
서울에서 둔촌주공아파트 같은 사람 냄새 나는 아파트를 또 볼 수 있을까? 둔촌주공아파트는 영영 볼 수 없지만, 아파트가 남긴 시간들은 영원히 남아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