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2]
<집의 시간들> 라야 감독, “처음부터 공간을 주인공으로 카메라에 담고 싶었다”
2018-11-01
글 : 김성훈
사진 : 오계옥

<집의 시간들>에서 라야 감독이 바라본 둔촌주공아파트는 따뜻하고 포근하다. 라야 감독은 집을 찾아가 찍는 프로젝트인 ‘가정방문’, 뮤지션 이랑의 곡 <신의 놀이>의 뮤직비디오, 다큐멘터리 <불확실한 학교>(2016), 책 <산책론> 등 다양한 작업을 통해 여러 공간을 카메라에 담아왔다. 그 공간은 둔촌주공아파트처럼 라야 감독의 애정으로 가득하다. 그는 “겁이 많아 이 인터뷰가 처음이자 마지막이 될 거(웃음)”라고 말했다. 그가 작업한 영상, 사진들이 더욱 궁금하다면 그의 홈페이지(http://lightonthewall.com)를 방문하면 된다.

-이 영화는 독립출판물 <안녕, 둔촌주공아파트>를 기획한 이인규씨를 만나면서 시작된 것으로 알고 있다.

=독립출판물 서점이자 출판사인 유어마인드에서 2년 동안 일했다. <안녕, 둔촌주공아파트>를 판매해 이 프로젝트를 잘 알았다. 낯선 장소에 가서 카메라에 담는 영상 프로젝트인 ‘가정방문'을 시작하면서 일면식도 없는 이인규씨가 가장 먼저 떠올랐다. 그를 통해 그가 살고 있는 둔촌주공아파트를 더 많이 찍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가정방문’의 첫 프로젝트였던 <합정아파트>를 그에게 메일로 보내주면서 ‘당신의 집을 찍고 싶다’고 ‘떡밥’을 던졌다. 그가 그 영상을 마음에 들어 했고 집 촬영을 허락해주었다. 서로가 서로를 낚았다고 생각하면서 시작된 프로젝트다. (웃음)

-<안녕, 둔촌주공아파트>의 어떤 면 때문에 영화로 만들면 의미가 있겠다고 판단했나.

=그 책의 1호는 둔촌주공아파트의 겨울을, 2호는 봄을, 3호는 아파트 단지 안 놀이터를 각각 다뤘다. 동네 사람들이 직접 쓴 글과 보내온 사진들을 보니 많은 사람들로부터 사랑받는 동네라는 인상을 받았다. 집 근처에 있는 잠실주공아파트 5단지 또한 비슷한 느낌을 가지고 있어 좋아하는데, 둔촌주공아파트가 그런 느낌이 훨씬 크게 남아있어서 더 애착이 갔던 것 같다.

-이곳을 영화로 기록해야겠다고 생각한 이유가 무엇인가.

=인규씨를 만나기 전, 그로부터 “추석 때 집을 비우니 그곳에서 며칠 머물면서 자유롭게 찍어도 된다”는 허락을 받았다. 사람보다 집을 먼저 만난 셈이다. 인규씨의 집에 가보니 고양이 세 마리가 있었다. 고양이를 좋아해 돌보면서 집을 촬영했다. 추석이라 집 밖에서 가족들의 소리가 많이 들려와 정겨웠고, 알록달록 물든 은행나무와 단풍나무들을 보면서 긴 호흡을 가진 영상으로 남겨야겠다고 생각했다.

-빈집에서 원 없이 사진과 영상을 찍었겠다. (웃음)

=그렇다. 밤에 아파트 옥상에서 단지를 내려다보는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그때 찍었다. 가장 먼저 찍은 장면이 영화의 마지막에 들어갔다.

-영화에서 목소리로 등장하는 아파트 주민은 총 13명이고, 이중 집이 나오는 가구는 8가구다. 그들을 어떻게 섭외했나.

=페이스북 채널인 <안녕, 둔촌주공아파트>와 아파트 게시판 등 온·오프라인에 ‘당신의 집을 찍어드립니다’라는 내용의 공고를 많이 붙였다. 간단한 집 사진과 신청하고 싶은 사연을 메일로 받아서 선정했다. 그들은 집이 없어지는 게 안타깝고, 특히 꽃과 나무를 더이상 볼 수 없게 돼 그리울 것 같다는 내용의 글을 보내주었다.

-지원자 중에서 영화에 소개할 집을 선정한 기준은 무엇인가.

=가족 구성원이나 그곳에서 살아온 햇수가 겹치지 않아야 했다. 최대한 다양한 사연을 가진 사람들이 신청해주었으면 하는 바람이 컸는데 생각한 대로 이루어졌다. 영화에서 다루지 못한 집은 책 <안녕, 둔촌주공아파트X가정방문>에 실었다.

-집은 어떤 방식으로 촬영했나.

=처음 방문하는 날에 촬영하면 공간이 어색할 것 같아 아파트 주민을 먼저 인터뷰했다. 한주는 인터뷰만 몰아서 했는데 인터뷰를 할 때 카메라를 들고 가지 않아 주민들이 편하게 집을 보여주었고, 그 덕분에 공간과 친해질 수 있는 시간을 만들 수 있었다. 인터뷰가 끝나면 그 집을 다시 찾아 촬영만 했다. 소품에 얽힌 사연을 미리 파악한 까닭에 그것을 따로 카메라에 담는 데 수월했다.

-아파트에 대한 다양한 의견과 추억을 담아낸 까닭에 아파트를 입체적으로 바라보는 데 도움이 됐다. 그게 이 다큐멘터리가 가진 장점으로 보인다.

=아파트를 바라보고, 주민들이 해주는 얘기를 듣고, 그것을 기록하는 게 내 역할이라고 생각했다. 재건축을 앞두고 부동산 뉴스는 집값이 오른다, 내린다 연일 보도하고 있는데 주민들은 재건축을 어떻게 생각할까. 집값이 올라서 좋아할까, 아니면 공간에 대한 애정이 많아서 재건축을 반대할까. 의견이 극단적으로 갈리지 않고 마음이 복잡할 것 같았고, 그 복잡한 마음을 카메라에 담아내고 싶었다. 생각보다 사연이 훨씬 다양했다. 찍으면서 아파트에 애정이 생기다보니 그 마음이 영화에 좀더 드러났다. 아파트에 대한 안 좋은 이야기도 가감 없이 넣으려고 했다.

-집을 공개한 사람은 목소리로만 등장할 뿐 모습을 전혀 드러내지 않는데 그건 공간이 주인공이기 때문인가.

=처음부터 공간을 주인공으로 카메라에 담고 싶었다. 주민들의 목소리가 집이 말하는 것처럼 들렸으면 좋겠다 싶었다. 집이 지나간 시간을 되돌아보는 느낌으로 보이길 원했다. 하지만 편집 과정이 쉽지 않아 고생했다.

-어떤 점에서 쉽지 않았나.

=사람들이 어떤 주제로 말을 할 때 한 장면만 길게 보여주는 게 힘들었다. 결국 대사의 핵심만 보여주고 나머지 말들을 잘라내야 했는데 그게 아쉬웠다. 아쉬움을 그나마 달랠 수 있었던 건 영화에서 삭제된 대사들이 책 <안녕, 둔촌주공아파트X가정방문>에 다 실렸다.

-거리를 두고 집을 바라보는 시선이 인상적이었다.

=제3자가 아파트 단지를 돌아다니면서 구경하는 시선으로 느껴질 수 있지만 그보다는 아파트가 스스로를 돌아보는 시선으로 보였으면 했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카메라의 움직임이 땅으로 내려가지 않나. 마지막으로 동네를 돌아보고 눈을 감는 느낌이 들었다. 그런 의도를 가지고 찍지 않았지만 편집하면서 이 장면이 영화의 마지막에 들어가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촬영한 집 중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공간은 무엇인가.

=인규씨의 집. 그곳에서 묵기도 했고, 작업 거점으로 삼아서 많이 찾았다. 그러면서 정이 생겼다. 이주하기 전 가구 전부 빼고 그곳에서 이 영화의 상영회 겸 집의 송별회를 열기도 했다. 이 프로젝트의 처음과 마지막을 그곳에서 해서 기억에 많이 남을 것 같다.

-가수 이랑의 뮤직비디오인 <신의 놀이>, 다큐멘터리 <불확실한 학교>, <발췌된 풍경>(2015), <합정아파트> 등 그간 다양한 매체의 영상을 작업해왔는데.

=처음 만들었던 영상 작업이 대학 졸업작품인 <우울의 경계>(2012)였다. 그때부터 사람보다는 공간의 인상에 따른 분위기의 변화를 찍어왔고, 어쩌다보니 그 작업이 지금까지 이어져왔다. 풍경을 찍거나 전시 작업을 하면서 원경을 많이 좋아했다. 원경이나 시간이 흘러가는 풍경을 찍다보니 건물 옥상을 많이 찾아다녔다. 옥상에서 내려다 본 풍경을 촬영하다보니 창문, 계단 등 여러 대상에 시선이 갔고, 그걸 담아낸 프로젝트가 책 <산책론>이다. <산책론>은 집 근처에서 산책을 시작해 산책 범위가 점점 넓어지면서 찍은 풍경들을 엮은 책이다. 사람에 관심을 두지 않은 채 원경을 카메라에 담는 작업을 하다가 이번 영화에선 사람의 목소리까지 영상에 담게 되었다. 의도한 건 아니지만 그렇게 되었다.

-다음 작업은 사람을 찍을지도 모르겠다. (웃음)

=다른 사람과 협업을 하게 됐다. 장승들만 묻힌 공동묘지가 있는데 그곳에 고속도로 개발이 확정되면서 장승들을 이장해야 할 상황에 이르렀다. 이장해야 하는 집의 손녀가 과거 영화 작업을 함께했던 분인데 그로부터 이장해야 하는 상황이 이상하니 관조적인 시선으로 찍어달라는 부탁을 받았다. 자라온 가정 환경이 그런 문화로부터 거리가 먼 까닭에 이장에 호기심이 생겨 찍기로 했다.

-‘라야’라는 이름은 어떤 뜻으로 지었나.

=읽고 쓰기 편한 이름을 찾다가, 점과 선 영화 페스티벌(Punto y Raya Festival)에서 보고 따왔다. 나중에 뜻을 알아보니 라야는 점선 중에서 선이고, 그게 나쁘지 않아 계속 사용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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