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 10시쯤 읽기 시작한 소설이 재미있을 때만큼 난처할 때는 없다. 기분은 좋다. 남은 페이지를 헤아리며 끝나지 않기를 바란다. 한 단어씩 천천히 꼭꼭 씹어가며 읽는다(어차피 다 읽은 뒤 만 하루가 지나기 전에 다시 한번 읽을 생각이지만). 문제는 다음날 출근을 해야 하거나 일이 있을 때다. 아무 일도 없다 해도 책 읽다가 새벽 4시쯤 잠드는 일이 발생하면 생활리듬(없지만)이 금방 깨지고야 만다. 삶의 요령을 전하는 실용서와 세상의 사실을 모으고 논평을 더한 각종 논픽션에 비하면 소설읽기란 때로 무용한 취미처럼 보인다. 나는 누군가에게 “세상에 알아야 할 것이 많은데 왜 소설을 읽느라 시간을 낭비하나요?”라는 질문을 받은 적도 있다. 실은, 그 무용함이야말로 소설읽기를 취미로 삼는 이유다. 소설가 제임스 설터가 <소설을 쓰고 싶다면>에서 프랑수아 모리아크를 인용해 <고리오 영감>을 쉼 없이 읽고 길에 나선 한 소년이 소설에서 빠져나오느라, 현실에 적응하느라 시간이 걸린 일을 소개하는데, 읽다가 ‘나 이거 뭔지 알아’ 하는 기분에 젖어들었다. 불과 이틀 전에도 느꼈으니까. 그 도취의 순간 말고 뭐가 더 필요한지.
소설을 포함해 책읽기를 좋아하는 (나 자신을 포함한) 사람 대부분이 그렇듯이 설터도 생이 끝나갈 시점에 책을 읽고 있는 그 자신을 상상했다. 에드먼드 윌슨이 생의 마지막 나날에 침대 발치에 산소 탱크를 둔 채 히브리어를 공부했던 일을 떠올리면서, 죽기 전에 읽을 책 리스트를 작성한다. 다니자키 준이치로의 <세설>, 미클로스 반피의 ‘트란실바니아 3부작’, 헤르만 브로흐의 <몽유병자들>. ‘The Art of Fiction’이라는 원제는 ‘소설의 예술’ 정도로 번역할 수 있는데, 소설을 사랑하는 이유를 소설에서 찾아 설명한 책이다. 소설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평생의 친구에게 결혼할 사람을 소개시키듯 좋아하는 소설이나 작가를 소개한다. 적당한 호의란 여기 존재하지 않는다. 이 책을 통해 알게 된 이사크 바벨의 경우를 보자. 바벨을 영업하기 위해 동원되는 다른 유명 작가는 (세상에!) 보르헤스인데, 그는 바벨의 문체에 대해 “산문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라기보다 시를 위해 예비된 것처럼 보이는 장엄하고 훌륭한 경지를 획득했다”라고 말한 적이 있단다. 바벨 자신의 설명에 따르면 “문장에는 지렛대 같은 것이 있어서 그 위에 손을 올리고 약간만, 지나치지도 않고 너무 적지도 않게 딱 적당한 만큼만 돌리면 모든 것이 제자리를 잡을 거라고 했습니다”. 이런 유혹적인 소개글을 읽고 어떻게 바벨을 안 읽는단 말인가. 좋아하는 작가에 대해 이야기하는 동시에, 설터는 자신이 쓴 소설이 어떤 내용이었으며 어떤 시기에 썼는지, 그리고 어떻게 혹평받았는지를 회고한다. 그리고 소설을 좋아하는 독자라면 설터가 작가 한 사람 한 사람을 언급할 때, 그들의 소설의 일부를 소개할 때 반가움에 비명을 지를 것이다. 최소한 나는 그랬다….
이른바 ‘고전’으로 꼽히는 소설을 좋아하고 그중 100권 정도를 읽은 독자라면 <소설을 쓰고 싶다면>을 읽으며 모든 페이지가 직접 말을 거는 듯한 경험을 할 것이다. 잭 케루악을 학교 1년 선배로 뒀고, 블라디미르 나보코프 부부와 어울려 식사를 하기도 했고, 솔 벨로의 권유로 소설을 시작한 적도 있는 설터는 결국 한때 그가 동경했던 작가들만큼 사랑받는 소설가가 되었다. <소설을 쓰고 싶다면>은 세번의 강의를 풀어낸 글과 <파리 리뷰>와의 인터뷰로 구성되었는데, 세 번째 강의 후반부에는 영화에 대한 언급이 있다. 여기에 또 굉장한 에피소드가 있다. 미켈란젤로 안토니오니가 ‘그’ <욕망>(1966)을 찍던 때, 피터 볼스가 감독의 선택에 대해 질문을 했다. 안토니오니는 볼스의 어깨에 팔을 걸치고 가까이 끌어당기며 이렇게 말했다. “피터, 날 믿게. 날 믿으라고. 나는 신이 아니네. 하지만 난 미켈란젤로 안토니오니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