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비평]
<툴리>가 생략을 통해 강조하고 싶었던 독박 육아의 민낯
2018-12-05
글 : 송경원
가난에는 이자가 붙는다

* 영화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좋은 장면들은 종종 생략을 통해 완성된다. 코끼리를 말하지 말라고 하는 순간부터 코끼리가 계속 생각나는 것처럼 어떤 장면들은 때론 보이지 않는 행간을 전달하기 위한 마중물 역할을 한다. 수면 위에 뜬 몇몇 강렬한 장면이 시선을 빼앗을 때 수면 아래 잠긴 방대한 일상의 시간들, 잉여의 순간들, 프레임 바깥의 이미지들이 슬그머니 차올라 인식의 한구석을 점령하는 것이다. <툴리>는 독박 육아와 우울증의 상관관계에 대한 관찰 보고서 같은 영화다. 출산을 소재로 한 호러영화라는 농담이 농담으로 들리지 않을 만큼 이 영화가 낚아올리는 첫 번째 감정은 공포다. 육아의 의무를 홀로 떠맡는 무게. 육체적으로 얼마나 고되고, 영혼이 어떤 방식으로 고갈되며, ‘내’가 어떻게 지워져가는지, 엄마의 시점에서 반복되는 우울하고 지난한 노동의 시간.

급작스런 엔딩. 생략된 것들은 어디를 가리키는가

엄마란 이름 위에 얹힌 유무형의 압력들이 있다. 어렴풋이 짐작은 하지만 무게를 실감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은데, <툴리>는 부분 클로즈업과 몽타주라는 두개의 지팡이를 활용해 집요하다 싶을 만큼 그 억압의 증세들을 수집해나간다. 부분 클로즈업은 문장으로 치면 ‘따옴표’와 같다. 식탁에서 음료를 쏟고 엉망이 되자 마를로(샤를리즈 테론)는 완전히 지쳐버린 표정으로 상의를 벗어버린다. 마를로의 표현을 빌리자면 그녀의 몸은 “사방에 금이 간 지도”처럼 살이 여기저기 터 있고 부풀어 있다. 출산과 육아에 따른 자연스런 현상이지만 아이는 놀라서 말한다. “엄마, 몸이 왜 그래?” 그건 어쩌면 임신과 육아를 멀찍이서 결과로만 바라본 많은 이들의 언어다. 마를로는 야간유모 툴리(매켄지 데이비스)와 처음 대면했을 때 툴리의 날씬한 배와 허리에 절로 눈길이 간다. 카메라가 이를 새삼 클로즈업해서 보여주는 것으로 좀체 드러나지 않는 마를로의 욕망과 심정을 한컷에 담아낸다.

나중에 밝혀지지만 툴리는 마를로의 젊은 시절이다. 제이슨 라이트먼 감독은 이러한 서사적 트릭을 반전 강박이나 깜짝 파티로 소비하진 않는다. 마를로의 정신분열은 차라리 생기넘치던 자신의 20대를 환상으로나마 다시 소환하여 점차 지워지는 ‘나’를 복원시키고자 하는 쪽에 가깝다. 육아로 인해 자아가 지워지는 것이 당연시되는 상황에 의문을 제기하여 이야기가 소비해온 모성 신화를 해체시키는 것이다. 동시에 라이트먼 감독은 가족이라는 공동체로 상황을 봉합시키는 것도 잊지 않는다. 감독의 성향이 드러나는 부분이기도 한데 내 흥미를 자극한 지점도 바로 여기다. <툴리>는 자아가 소멸될 정도로 끔찍한 육아의 노동을 반복하는 와중에도 따뜻한 색감과 기조만큼은 끝내 유지한다. 스토리는 아이와 함께하는 행복한 순간을 대부분 생략하고 메말라 텅 비어가는 마를로의 일상에 집중하지만 결국에 예정된 해피엔딩을 향해 달려간다. 영화에서 가장 과감하고 비약적인 생략이 이뤄지는 부분도 바로 여기다.

영화의 오프닝은 마를로가 조나의 몸을 솔로 씻겨주는 걸로 문을 연다. 나중에 밝혀지지만 이건 정서적인 문제를 가진 조나의 치료를 위해 마를로가 유튜브에서 찾아낸 치료법이다. 엔딩에서 조나는 말한다. “엄마 이거 진짜 도움이 돼?” “솔직히 나도 모르겠어. 이거 하는 게 좋아?” “엄마랑 같이 있는 게 좋아. 솔이 없어도 될 것 같아.” 여기서 솔은 이를테면 마를로를 도와주러 왔던 젊은 시절의 툴리를 상징한다. 예행 단계에서 필요했던 일종의 도구라고 볼 수 있는데 이제 마를로는 그 힘을 빌리지 않고 직접 아들과 스킨십할 수 있는 단계에 접어든 셈이다. 친절하고 정확한 설명. 하지만 이상하지 않은가. 영화는 마를로가 정신분열이 일어날 만큼 절박한 상황을 극복하고 안정을 되찾았는지 ‘과정’을 설득하지 않는다. 마를로는 그저 회복되어야 했다. 가족과 육아는 삶의 소중한 행복이므로. 이후 사족처럼 붙는 남편과의 엔딩컷 역시 마찬가지다. 집안일을 하는 마를로 옆에 슬며시 다가와 이어폰을 나눠 끼고 요리를 돕는 남편의 뒷모습은 많은 과정을 생략한 변명처럼 보일 지경이다. 관객은 마를로가 늘 그래왔던 것처럼 이번에도 혼자 잘 극복하고 수습하였을 것이라고 기대할 수밖에 없다. 이러한 회복 ‘과정’의 생략은 여러 갈래의 상상을 자극하는 동시에 어렴풋이 영화의 방향을 지시한다. 밝은 톤의 화장으로 불편함을 줄이고 회복과 화해의 극적 드라마를 포기하면서까지 영화가 집요하게 보여주고자 했던 것. 바로 육아가 공포가 될 수밖에 없게 만드는 척박한 ‘환경’이다.

악인은 없다

<툴리>에는 무서운 장면이 산재해 있다. 카페에서는 “디카페인은 몸에 좋지 않다”며 착한 엄마가 되길 압박한다. 출산 후 빠르고 건조한 몽타주로 제시되는 육아의 순간들, 쌓여가는 기저귀와 불면의 밤, 끊기지 않은 아기 울음소리와 보는 사람마저 아픈 모유 착유 장면은 문자 그대로 보는 것만으로 진이 빠진다. 하지만 가장 인상 깊은 대사는 따로 있다. 조나의 학교에서 선생님은 조나가 일반 학생들과 함께하기 어렵다며 제적을 권고한다. 선생님은 조나를 ‘독특한 아이’라고 표현하며 단어 하나도 조심스럽게 말하지만 현실의 피로에 전 마를로는 그런 배려가 더 거슬린다. “그냥 솔직하게 저능아라고 말해!”라고 고함을 치는 마를로에게 선생님은 평정심을 잃지 않고 차분한 목소리로 말한다. “우리는 당신을 싫어하지 않아요. 그저 여기가 맞지 않을 뿐이죠.” 나는 이 친절하고 교양 있는 대사를 듣고 소름이 돋았다. <툴리>의 현실 육아가 고되고 험난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이 한마디 대사에 담겨 있다.

<툴리>는 여성과 출산을 소재로 한 제임스 라이트먼의 세 번째 영화다. <주노>(2007)가 신체적인 변화, <영 어덜트>(2011)가 과거를 꿈꾸는 심리적인 변화에 집중했다면 <툴리>는 개인에게 지워지는 육아의 현실과 이를 유발하는 시스템의 문제를 좀더 거시적으로 짚어낸다. 마를로가 야간보모를 탐탁지 않아 하는 건 “인생을 하청에 맡길 수 없다”는 개인적인 이유다. 어린 시절 세명의 새어머니를 겪은 마를로는 자신과 같은 불안한 경험을 아이들에게 안기고 싶지 않다. 하지만 마를로가 직접 고백하지 못하는 또 하나의 이유가 있다. 바로 경제적인 문제다. 마를로의 피로, 육아를 정신마저 갉아먹는 노동으로 만드는 모든 상황의 대전제는 마를로가 그다지 부유하지 않다는데 있다. 마를로와 마찬가지로 아이들을 키우는 오빠의 집은 윤택하고 여유로워, 문자 그대로 행복이 가득한 것처럼 그려진다. 오빠와 부인이 더 나은 인격체라서 그런 걸까? 그럴 리 없다. 단지 오빠가 경제적으로 훨씬 나은 처지이기 때문이다. 마를로의 육아를 돕지 않는 남편은 악인이 아니다. 영화는 남편을 위해 애써 변명해주진 않지만 남편의 처지를 충분히 설명은 한다. 마를로의 남편은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 과도한 노동에 시달리고 있으며 적어도 마를로 또한 그에 동의하고 있는 것처럼 묘사된다. <툴리>에는 악인이 없다. 상황이 있을 뿐이다. 마를로는 조나의 치료를 위해 무엇이든 하고 싶겠지만 역시 그녀에게 허락된 것은 유튜브의 무료 조언 정도다.

“가난에는 이자가 붙는다.” 미국 가수 테이 존데이가 트위터에 남긴 이 한마디는 자본주의 계급의 부조리를 예리하게 짚어낸다. 마를로는 피곤하다. 그래서 항상 예민하고 날 서 있다. 주변에서는 교양 있게 마를로를 돕고 조언을 하지만 아무리 선한 의도와 배려도 받아들일 사람이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면 소용이 없다. 때로 교양과 인격은 상황의 결과물에 불과하다. 요컨대 마음만큼 중요한 건 물리적인 환경이다. 최소한의 물질적 조건이 갖춰진 다음에야 배려든 심리든 그다음을 이야기할 수 있다. <툴리>가 집요하게 드러내는 진짜 공포는 가난의 기회비용이 불러오는 상황들이다. 가난하기 때문에 보모를 들이는 것이 힘들고, 가난하기 때문에 남편이 일을 쉴 수도 없으며, 가난하기 때문에 출산 후 자기 관리나 다이어트는 꿈도 못 꾼다. 아이들에게 냉동피자를 돌릴 수밖에 없는 마를로에게 주어진 유일한 휴식이라곤 지친 몸으로 야밤에 감차칩을 먹는 일이다. 몸은 점점 살찌고 자존감은 갉아먹는 악순환. 그렇게 가난에는 비용이 든다. 독박 육아는 개인의 책임이나 도덕심에 미룰 사안이 아니다. 시스템과 공동체의 문제로 인식을 확장시킬 필요가 있다. <툴리>가 화해와 회복 과정을 생략하고 마치 판타지 동화인 양 급하게 마무리한 건 드라마적인 봉합이 불가능할 뿐 아니라 그런 방식으로 봉합되어서도 안 된다는 걸 알고 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툴리>의 해피엔딩은 면죄부나 타협이 아니다. 차라리 그럼에도 행복했으면 하는 희망 혹은 의지다. 그래서, 더 무섭고 애처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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