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MC: 더 벙커>에서 이선균은 북한의 최고위 인물 ‘킹’의 주치의 윤지의 역을 맡았다. 영화 전체를 이끌어가는 건 글로벌 민간군사기업 블랙리저드의 캡틴 에이햅(하정우)이지만, 에이햅의 행보에 중요한 영향을 미치는 건 윤지의다. 촬영이 이미 진행된 상태에서 조금은 뒤늦게 합류한 터라 “국제 학교에 전학 간 전학생이 된 기분”이라 했지만, “두달 동안 매일 같은 시간에 출석해 같은 시간에 급식을 먹고 같은 사람들과 부대끼다 보니 마치 학교생활을 하는 것 같았다”며 촬영의 기억을 즐겁게 회상했다.
-올 상반기엔 드라마 <나의 아저씨>로 많은 사랑을 받았다.
=<나의 아저씨>가 배우로서의 유통기한을 좀더 늘려준 거 같다. (웃음) 작업 과정도 좋았지만 주위 또래 친구들에게서 공감하면서 재밌게 봤다는 연락을 많이 받아 뿌듯했다.
-<PMC: 더 벙커>는 어떻게 출연하게 됐나. 김병우 감독의 전작인 <더 테러 라이브>(2013)에 아내 전혜진 배우가 출연했는데 그 인연도 작동했나.
=혜진씨가 추천한 건 아니다. (웃음) 와이프가 전작을 같이해서 자연스럽게 김병우 감독님을 알게 됐고, 하정우 배우와도 직접적으로 알지는 못했지만 지인들 사이에 교집합이 많았다. 언젠가 작품으로 만나면 좋겠다고 생각하던 이들이다. 이정범 감독의 <악질경찰>을 찍고 있을 때 출연 제안을 받았는데, 실은 2년 동안 쉼 없이 작품을 했던 시점이라 <악질경찰>이 끝나면 좀 쉬려고 했다. 그런데 <PMC: 더 벙커>는 거절하기 힘든 작품이었다. 시나리오를 읽는데, <더 테러 라이브>보다 반전이 많고 템포도 더 빠른 영화였다. 설계가 굉장히 잘돼있는 작품이었다.
-촬영 전까지 영화 속 공간이며 세계가 어떻게 구현될지 감이 잘 잡히지 않았을 것 같은데.
=불안감은 없었다. 다만 혼자 연기하는 장면이 많아서 어떻게 감정을 쌓아야 하나, 어떻게 다른 캐릭터에 영향을 줘야 하나, 그게 제일 큰 고민이었다. 어쨌든 이 영화는 에이햅의 선택에 의해 흘러가는 영화고, 윤지의는 그 선택에 영향을 미치는 사람이기 때문에 캐릭터의 포지션과 역할에 대한 생각을 많이 했다. 기본적으로 윤지의는 더이상 잃을 게 없기 때문에 강단 있고 용기 있는 인물이라 생각했다. 윤지의의 강단 있는 행동에는 사람을 우선 살려야 한다는 직업적 가치관도 작용한다. 목표와 목적이 심플하기 때문에, 오히려 갈등하는 에이햅에게 ‘이 길이 맞다’고 얘기해줄 수 있는 인물이다.
-윤지의는 북한의 킹을 담당하는 주치의다. 드라마 <하얀거탑>과 <골든타임> 등에서 의사를 연기한 바 있지만 북한 사람 역할은 처음이지 않나.
=홍상수 감독의 <밤과낮>(2008)에 북한 유학생으로 두신인가 세신 나온다. (웃음) 홍 감독님 영화 대본은 촬영날 아침에 나오지 않나. 그래도 북한말을 해야 하니 대본을 미리 줄 줄 알았는데 역시나 당일 아침에 대본을 줘서 스스로를 믿고 북한 캐릭터를 연기할 수밖에 없었다. 다행히 이번엔 북한말을 도와주는 선생님이 계셔서 많이 의지하며 찍었다. 익숙하지 않은 언어로 연기를 하는 게 쉽지 않았지만, 액션과 영어까지 소화해야 했던 하정우 배우에 비하면 나는 힘들다고 할 수도 없다. (웃음)
-현장의 배우들이 대부분 외국인이었다. 마치 외국영화 현장에 있는 기분이었겠다.
=맞다. 국제 학교에 전학 간 느낌이었다. 내가 영어를 잘 못해서 외국인 출연자들이 말을 못 붙이게 하려고 ‘샤이’한 사람인 척했다. 그중에 유일하게 부산 사투리를 잘하는 친구가 있어서 회식 땐 그 친구 옆에 붙어 있었다. (웃음)
-영화에서 총격전을 소화하는 건 에이햅과 블랙리저드 팀원들이다. 윤지의는 폐허가 된 벙커 안에서 살아남기 위해 이동하고, 말로 의술을 지시하는 소극적 액션을 한다. 리액션 위주의 연기에서 오는 고충도 있었을 것 같다. 혹 총기 액션이 욕심나진 않았나.
=모두가 쏘는 걸 굳이 나까지. (웃음) 그런데 총소리가 너무 커서 아무것도 못하겠더라. 그 와중에 나는 말로 쉴 새 없이 무언가를 설명해야 하는데, 상상 이상으로 총기 소음이 크고 사방으로 탄피가 날아다니니까 머릿속이 텅 빌 때가 많았다. 대사가 기억이 안 나기도 했고.
-어느 순간 특정 장르에 특화된 배우라고 말하기 힘들 만큼 다양한 장르에 출연하고 있다.
=그렇게 오래된 일도 아니지만, 예전엔 ‘로맨틱 가이’라는 표현이 부담스러웠다. 그래도 꾸준히 주어진 상황 안에서 다양한 시도를 하면 언젠가는 특정한 이미지도 지워지지 않을까 생각했다. 배우에게 붙은 수식어는 자신이 바꾸고 싶다고 바꿀 수 있는 게 아니니까. 작품을 통해 보여줘야 하는 거니까. 내가 가진 결이 그렇게 다양하지 않은데, 여러 시도를 하고 결과를 받아들이고 또 새로운 걸 찾아서 영역을 넓혀가는 게 연기하는 재미인 것 같다.
-내년엔 <악질경찰>과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이 개봉한다. 변성현 감독의 <킹 메이커> 촬영도 봄쯤 들어간다고. 공교롭게도 변성현 감독의 전작 <불한당: 나쁜 놈들의 세상>에도 전혜진 배우가 출연했는데.
=<기생충> 현장은 정말 즐거웠다. 촬영을 했다기보다 마치 가족 패키지 여행을 다녀온 느낌이다. <킹 메이커> 역시 아내와 무관하게 출연을 결정한 작품인데, <킹 메이커>에 대한 불한당원들의 기대가 큰 것 같아서, 내가 정말 잘해야겠구나 싶은 마음뿐이다. (웃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