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모이>는 모처럼 유해진이 영화의 배경을 채우는 쪽이 아니라 온전히 극의 무게중심을 가져가는 작품이다. 그가 연기하는 극장 기도 김판수는 교도소에 들락날락할 만큼 사고를 허다하게 치지만, 중학교에 다니는 아들의 월사금을 마련하기 위해 조선어학회에 들어갔다가 한글의 매력에 눈을 뜬다. 기본적으로 <택시운전사>(2017) 등에서 보여준 ‘소시민의 각성’ 플롯과 유사하지만, 유해진은 익숙하다고 생각한 이야기에 엣지를 만드는 베테랑이다. 확실한 웃음을 주고 노련하게 관객을 울리는 <말모이>의 유해진을 보고 있자면 조만간 영화상 시상식의 남우주연상 후보로 만날 수 있겠다는 확신이 들 정도인데, 여전히 그는 치열한 고민을 안고 있었다.
-<택시운전사> 제작사인 더 램프와 다시 만났다. 당시 시나리오를 썼던 엄유나 작가는 <말모이>로 감독 데뷔를 했다.
=으레 하는 말인 줄 알았는데, 정말 엄유나 감독이 날 두고 시나리오를 썼다고 하더라. 그래서 내가 출연을 결심했을 때 굉장히 기분이 좋았다고 한다. 시나리오를 읽었을 때 ‘순한 맛’이 느껴졌다. 한편으로는 걱정도 됐다. 너무 강한 맛, 자극적인 맛에 익숙해진 요즘인데 이런 영화도 괜찮을까, 하고. 하지만 <말모이>를 찍으면서 ‘순한 맛’을 안고 가는 과정에서 생기는 재미를 발견했다.
-영화 초반에는 포마드를 바르고 가죽점퍼를 입은 비주얼로 나온다.
=난 그 비주얼이 정말 편했다. 있는 그대로의 내 모습은 이쪽에 가깝고, 오히려 나중에 판수가 각성한 이후가 가공된 모습 같더라. (웃음) 잘 보면 가죽점퍼 지퍼의 이가 빠져서 일정 정도 이상 지퍼를 올리지 못하는데, 이것도 내가 직접 뺀 거다.
-변사처럼 영화 대사를 따라 하는 코미디 등이 초반에 등장한다. 최근 <완벽한 타인> 때도 그랬듯, 유해진 배우가 등장하면 이쯤에서 웃겨줄 거라고 기다리는 관객이 많다.
=<웃으면 복이 와요> 같은 TV프로그램에서 변사가 하는 코미디를 접하며 자라긴 했는데, 유튜브에서 비슷한 영상을 찾아보면서 그런 코미디를 체화하려고 했다. 웃음을 줘야 하는 작품도, 그래서는 안되는 작품도 있는데 관객이 기대하는 바가 있어 고민이 될 때도 있다. 객석에서 웃음이 터지면 보람을 느끼지만 한편으로는 ‘그 색으로만 입혀지면 안 된다’는 걱정이 생긴다. 아무래도 배우의 숙명이 아닐까. 비교적 내 나름대로는 이것저것 섞어서 해왔다고 생각한다. 웃음에도 여러 색깔이 있다. <말모이>의 웃음은 따뜻한 색을 갖고 있다.
-한글도 몰랐던 김판수는 <조선말 큰사전>을 만들기 위해 전국 각지의 말을 모으는 조선어학회에서 누구보다 헌신하는 인물이 된다. 또한 최근 출연한 <택시운전사>, <1987>(2017), <말모이> 등 근현대사의 굴곡을 그린 작품에서 전부 평범한 소시민을 연기했다.
=자식이 없었으면 판수도 그렇게까지 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자신이 그렇게 대단한 일을 하고 있는지 판수 자신도 몰랐을 수도 있다. 엄청난 사명감을 가진 인물도 필요하겠지만 역사는 우연치 않게 발을 들인 사람들이 만들어가는 경우도 많다. 어떨 땐 내가 소시민을 대변해도 되나, 이렇게 좋은 모습으로 보여져도 되나, 라는 배우로서 양심의 문제도 생긴다. 실제 그 시대를 살며 희생했던 분들에게 부끄럽지 않게 해야겠다는 부담감과 책임감도 더욱 안게 되는 것 같고.
-김판수가 두 아이의 아빠라는 점이 영화에서 중요하다.
=아직 자식이 없으니까, 그냥 흉내만 내는 거다. 애 키우는 분들이 봤을 때 내 모습이 괜찮게 보일지 자신이 없을 때도 있다. <말모이>는 무책임하고 무식하고 한량이었던 가장이 자식을 생각하게 되는, 아버지로서의 성장을 그린 영화이기도 하다. 현장에서 아이들이 너무 귀여웠다. 큰애는, 이렇게 말하니 꼭 진짜로 내 자식 같네. 덕진이를 연기한 조현도는 정말 똑똑하고 참 바르다. 바르다 O선생, 바르다 조현도~. (웃음) 막내 순희(박예나)는 아, 정말이지…. 영화 보면 되게 귀엽게 느껴질 거다. 촬영하면서 이런 자식들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전국 각지의 산을 돌아다니며 현재 <전투>(감독 원신연)를 찍고 있다고 들었다. 지금 머리를 아주 짧게 잘라서 공식 석상에서는 모자를 쓰던데.
=작품 공개될 때쯤 딱! 보여드리고 싶어서 머리를 가리고 있다. 사실 짧은 머리를 되게 좋아해서 이런 스타일로 나오는 작품을 기다려왔다. 많은 분들이 왜 수염을 안 깎냐고 묻는데, 솔직히 나도 꼴 보기 싫다. (웃음) 차기작에서 좋은 모습을 보여드리기 위한 노력이니 이해해달라. 그리고 산만 다니는 게 아니라, 전국의 들이니 강이니 그런 곳만 찾아다니며 촬영 중이다. ‘봉오동전투’를 그린 작품인데, 류준열 배우와 함께 독립군으로 나온다. 나는 ‘바위’ 같은 인물을 연기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