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말 열린 ‘용필름의 밤’ 행사에서 임승용 용필름 대표는 “성질 더러운 제작자를 만나 이해영 감독이 고생하셨고, 이충현 감독은 앞으로 고생하고, 이계벽 감독은 이제 시작이니 잘 부탁드린다”고 말했다. 지난해 이해영 감독의 <독전>을 개봉시켜 흥행에 성공했고, <럭키>를 연출한 이계벽 감독의 신작 <힘을 내요, 미스터 리> 촬영을 마쳤으며, 신예 이충현 감독의 장편 상업영화 입봉작 <콜> 크랭크인을 눈앞에 둔 자신과 용필름의 상황을 단적으로 드러낸 인사말이었다. 겉으로는 무뚝뚝하고 새침하며, 심지어 소심해 보일 때도 많지만 지난해 함께 작업한 동료에게 감사를 잊지 않고, 올해 손발을 맞출 동료에게는 잘하자고 부탁하는 마음을 쑥스럽지만 직설적으로 전달한 그만의 화법이다. 꽃 피는 봄이 오면 <표적>부터 <독전>까지 용필름이 제작한 모든 영화가 세상의 빛을 본 서울 상수동 시대를 마무리하고, 성수동 시대를 여는 임승용 용필름 대표를 지난해 12월 어느 추운 날 만났다. 많은 프로젝트들을 준비하고 있는 그의 에너지는 여전히 뜨거웠다.
-지난해 개봉작인 <독전> 얘기부터 해보자. 결과는 만족하나.
=상업영화이니 손익분기점을 훌쩍 넘겼다는 점에서 1차 목표는 달성했다(<독전>은 관객 506만명(영화관입장권통합전산망 집계)을 불러모았다.-편집자). 작품 내적으로는 영화를 처음 기획 시 구상했던 의도에 가까운 영화가 나오지 않았나 싶다. 감독님께서 생각했던 액션 장르의 느낌이 잘 표현돼 만족한다. 엔딩은 처음 생각과 느낌이 달랐지만 긴장감이 주는 새로움이 있었다.
-아쉬운 건 뭔가.
=(김)주혁이가 영화를 못 봤다. 그와 개인적인 인연이 깊었고, <독전>, <방자전>(2010) 등 여러 작품을 함께했다. 한때 연기가 재미없다고 얘기하곤 했던 그가 최근 들어서 “영화가, 연기가 재미있다”고 작업을 즐기기 시작했는데…. 다만 정가람, 이주영, 김동영, 진서연 등 가능한 한 새로운 얼굴을 기용하려고 한 건 보람 있다. 그들은 앞으로 상업영화 출연이 많아질 거다.
-개봉 직후 이해영 감독에게 차기작으로 무언가를 맡긴 것 같은데.
=감독님께서 다른 회사에서 차기작을 준비하신다. 쉬지 말고 연이어 했으면 좋겠다.
-지난해 촬영을 끝낸 이계벽 감독의 <힘을 내요, 미스터 리>는 오리지널 시나리오인데.
=이계벽 감독과 <올드보이>(2003) 조감독이었던 한장혁 감독이 함께 쓴 얘기다. 원래는 엄마와 아들 얘기였는데 여러 차례의 숙성 과정을 거친 뒤 이계벽 감독에게 시나리오를 주며 연출을 제안했다. 이계벽 감독은 시나리오를 읽은 뒤 아버지와 딸의 이야기로 바꾸고 싶다는 의견을 주었고, 이야기를 자신의 상황에 맞게 다시 썼다. 개발한 지 15년 넘은 이야기인 만큼 여러 인연이 닿은 작품이라 할 만하다.
-지난여름 40도를 넘나드는 대구에서 고생하며 찍은 것으로 알고 있다. 현장에 많이 나갔나.
=전체 분량의 30%만 나갔다. 생각하는 것처럼 현장에 많이 가질 않는다.
-이충현 감독의 <콜>은 얼마 전 촬영을 시작했다. 그가 만든 단편영화 <몸 값>(2015)을 보고 함께한 것으로 아는데 <몸 값>의 어떤 점에 매료됐나.
=소설이든 영화든, 단편이든 장편이든 예상치 못한 자극을 받는 걸 좋아한다. 영화를 전공하지 않은 25살의 감독이 만든 단편영화를 보고 마음 깊숙이 찔리는 느낌을 받은 건 오랜만이었다. 그래서 그를 만났는데 어떻게 그 나이에 그렇게 침착할 수 있나 싶더라. 20대 시절의 나는 그의 10분의 1만큼도 침착하지 못했다.
-이충현 감독에게 자신의 영화를 곧바로 준비하게 하지 않고 <침묵> <유다의 별> 등 용필름이 기획·개발한 영화들의 시나리오를 쓰게 했다.
=단편영화를 만든 감독이 곧바로 장편 상업영화 시나리오를 쓰는 건 아름다운 곡 몇 소절을 만든 사람이 교향곡 악보를 써야 하는 상황과 같다. 그건 위험해 보였고, 그렇다고 해서 현장에 연출부로 투입시키는 건 소모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보다는 <침묵>을 작업하던 정지우 감독의 동의를 구해 흔쾌히 각색을 맡기는 방향으로 정리가 됐다. 이후 자신의 시나리오를 포함해 추리물부터 사회 드라마까지 다양한 장르의 시나리오를 쓰게 해 장르의 컨벤션이 무엇인지 체화하도록 했다.
-올해는 <은하수> <부활남> <램스> 세편도 시나리오를 작업할 계획으로 알고 있다.
=박성신 작가의 소설 <제3의 남자>가 원작인 <은하수>는 1970년대 남파된 고정 간첩 이야기다. 최근의 남북 화해 분위기와 어울리지 않을 수도 있지만 이 이야기에 매료된 지점은 크게 두 가지다. 편협하고 교육받은 이데올로기로 살아가야 했던 시절, 한 남자가 세상을 바라보는 자신만의 시각과 감성에 눈뜨면서 조금씩 변화해가는 구성이 재미있었다. 또 하나는 이 영화로 장편 상업영화 데뷔하는 유광굉 감독은 CF계에서 무척 유명한데, 그가 1970년대가 가진 모순을 어떻게 영화적으로 표현할지 기대가 크다. <부활남>은 와이랩 웹툰이 원작으로, 백종열 감독이 준비하고 있다.
-<램스>는 제68회 칸국제영화제 주목할 만한 시선 부문에서 대상을 받은 작품과 제목이 같다.
=맞다. 당분간은 <램스>가 영화를 원작으로 하는 용필름의 마지막 작품이 될 것이다. 이 작품 이후로 영화 판권을 계약한 작품이 없다. <램스>는 아이슬란드영화로, 40년 동안 말을 하지 않고, 할 말 있으면 쪽지를 주고받는 형제의 사연을 그린 이야기다. 뉴욕에 사는 후배가 추천해주었고, 그 영화를 보자마자 한국에서 영화로 만들고 싶다는 생각이 직감적으로 들었다.
-백종열 감독이 준비하던 <413>은 왜 접었나.
=왕가위 감독의 영화 <중경삼림>에서 “사랑에 유통기한이 있다면 내 사랑은 만년”이라는 대사가 있는데 내가 생각하는 영화의 유통기한은 그 정도는 아닌 것 같고. (웃음) 영화마다 유통기한이 있는데 <413>은 그 기한이 지났다고 판단해 감독님과 협의해 다음 프로젝트로 넘어갔다. 그렇게 아이템을 정리하는 일 또한 기획의 일환이라고 생각한다.
-백종열 감독이 이끄는 제작사 슈퍼픽션은 용필름과 어떤 협업 시스템으로 운영되고 있나.
=슈퍼픽션은 백종열 감독과 용필름이 함께 만든 회사다. 백 감독은 비주얼을 드라마보다 먼저 고민하는 스타일이다. 용필름은 그간 구축해온 제작 경험과 노하우를 슈퍼픽션에 이식할 거다. 백 감독이 용필름과 작업하지 않고, 브랜드가 달라졌을 때 그 브랜드가 가진 결도 덩달아 달라질 수 있잖나. 시간이 지나면 슈퍼픽션만의 색깔을 가진 영화를 선보일 수 있을 것이다.
-김종관 감독과도 무언가를 준비하고 있던데.
=프로젝트 두개를 동시에 진행하고 있다. 김종관 감독과 여러 차례 만나보니 내가 가진 시선이나 결과 잘 맞더라. 어느 날 아침 출근하다 하라 히데노리 만화가가 1990년대에 쓴 <내 집으로 와요>를 그가 하면 어떨까 싶어 전화를 걸었더니 그 만화를 잘 안다고 하더라. 그래서 그와 함께 이 만화를 가지고 시나리오를 쓰고 있다. 또 하나는 나도 감독님도 위스키를 좋아해 감독님과 내 사무실에서 위스키를 마시면서 위스키를 소재로 영화를 만들 수 있는 방법이 없을까라는 생각에 이르게 됐다. 위스키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위스키 양조장이 많이 모인 스코틀랜드로 여행 가는 프로젝트를 진행하면 재미있을 것 같다. 무엇보다 위스키를 많이 마실 수 있으니까. (웃음)
-지난해 가을 런던에서 박찬욱 감독을 만나지 않았나. 박찬욱 감독의 국내 복귀작은 어떻게 진행되나.
=박 감독님과 함께 만들기로 한 작품이 있다. 워낙 공사다망하고, 고려 중인 프로젝트만도 네댓개가 돼 감독님과 구체적인 논의를 해야 어떻게 진행할지 알 수 있을 듯하다. 같이 진행하기로 한 프로젝트는 할리우드 작가가 각본을 쓸 것 같다.
-박찬욱 감독이 최근 연출한 ＜BBC＞ 드라마 <리틀 드러머 걸>은 봤나.
=1부만 ‘구경’했다. 놀라운 드라마라는 느낌이 들었다. 드라마를 찍어도 이렇게 근사하게 찍는구나 싶더라.
-용필름은 리메이크 작업을 잘한다는 얘기가 충무로 안팎에서 나오는데 이러한 평가가 어떤가.
=골드문트라는 ‘메이드 인 스위스’ 오디오 브랜드가 있다. 오디오 안에 있는 디지털 부품은 몇십만원 내지 몇백만원밖에 안 하는데 그것을 포함한 오디오 전체 가격은 몇 억원을 호가한다. 골드문트를 구입하는 건 양심적으로 문제가 있지 않나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을 거다. 그런데 골드문트는 몇십만원이나 몇백만원짜리 러시아나 일본의 부품들을 조합해 각 부품들을 조합해 브랜드의 고유한 사운드 색깔을 입혀 아주 정갈한 소리를 낸다. 리메이크 작업을 골드문트 브랜드에 비유하고 싶다. 원작보다 더 잘 만들 자신이 없다면 원작 그대로 남겨두는 게 훨씬 낫다. 두기봉 감독의 <마약전쟁>(2013)을 가지고 우리 식으로 가공할 때 이해영 감독만의 소리와 색깔을 입혀 만들어내는 작업이 재미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세라 워터스의 소설 <아가씨>를 각색해 영화로 만들 때 계약서에 원작자에게 시나리오를 보여줘야 한다는 조항이 있었다. 우리가 개발한 시나리오를 본 세라 워터스는 “훌륭한 영화를 만들 수 있는 시나리오를 썼고, 이 또한 하나의 창작물”이니 영화 크레딧에 “원작자 대신 ‘인스파이어드 바이’(inspired by) 세라 워터스라고 표기해달라”고 요청했다. 소소하지만 대단히 감동적인 일이었다. 자신의 이야기를 가지고 또 다른 창작물을 만든 것을 인정하는 건 좋은 자세다. 새로움이 반드시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것만을 뜻하지는 않는다.
-최근 용필름이 내놓는 영화들은 큰 실패를 하지 않았다. 그 비결이 무엇이라고 생각하나.
=그 비결을 알고 있으면 너무 좋은 거 아닌가. (웃음) 예전에는 기획이 새로운 것, 남들이 안 하거나 잘 모르는 것, 세상 사람들에게 잊히는 것을 다루는 거라고 생각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기획은 남이 무엇을 좋아할지 고민하는 게 아니라 내가 좋아하는 걸 남도 좋아하게 만드는 것이라고 생각이 바뀌었다. 내가 좋아하는 건 무엇인가, 내가 영화에 끌렸던 게 무엇인지 끝까지 견지하려고 한다.
-3월에 성수동 새 사옥으로 이전할 계획인데.
=사람이 결혼을 하고, 대출을 받아 집을 장만한 뒤 아이를 낳아 기르고 살다가 여유가 생기면 마음에 드는 공간을 만들고 싶어 하지 않나. 이처럼 공간은 사람이 만들어지는 곳이라고 생각한다. 공간에서 사람들은 생각하고, 움직이며, 무언가를 받아들인다. 공간이 소중하지 않으면 흥미가 생기지 않는다. <표적>부터 <독전>까지 많은 영화들을 제작한 상수동 시대를 마무리 짓고 새 사옥을 짓는 것도 그래서다.
-지금 사무실은 전세인가.
=월세다. 셋방살이를 하다가 우리만의 공간에서 다음 영화들을 계속 만들고 싶다.
-위스키 애호가로서 올해 용필름에 가장 잘 어울리는 위스키를 꼽는다면.
=위스키 하면 해안가에 세계적인 양조장이 많은 스코틀랜드산을 떠올릴 것이다. 라프로익, 라가불린 같은 스코틀랜드산은 소독약 냄새가 많이 나는 위스키들인데, 희한하게도 2015년과 2016년 전세계 위스키 품평 1위를 차지한 위스키는 대만에서 만든 카발란이라는 브랜드였다. 비싸진 않은데 풍미가 깊다. 위스키를 전문적으로 만드는 나라가 아닌데도 완성도 높은 위스키를 만들어 전세계 위스키 애호가들로부터 인정받았고, 그러면서 그들만의 스토리를 구축했다. 우리 또한 영화의 완성도, 상업영화를 해석하는 수준과 방식에서 지난해보다 발전하기 위해 고민을 많이 할 것이다. 그런 고민들이 겹겹이 시스템에 반영돼 감독님들께 ‘쇼트커트’(지름길)를 제안할 수 있는 회사가 되도록 노력하려고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