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영화 <사바하>에는 종교에 대한 여러 이야기들이 나온다. 우선 영화가 시작되자마자 한국의 무속신앙이 등장한다. 16살이 된 주인공 금화(이재인)에게는 숨겨놓은 언니가 있다. 금화는 엄마 배 속에 있을 때 언니 때문에 다리를 다쳤는데, 영화 내내 사람들은 그 언니를 ‘그것’이라 부른다. 현재 금화는 언니와 여러 곳을 이사 다니며 사람들의 눈을 피해 죽은 듯이 산다. 다음으로 기독교에 대한 언급이 나온다. 이정재가 연기하는 박 목사는 기독교인이다. 하지만 그의 행동반경에는 온갖 이교적 분파와 광신 집단이 널려 있다. 기독교에 대한 의심을 가지고 신흥 종교의 비리를 찾는 일은 그의 직업이다. 마지막으로 불교가 등장한다. 어쩌면 불교는 <사바하>의 가장 중요한 키워드라 할 수 있다. 연쇄살인사건의 용의자 나한(박정민)과 동방교주 김제석(유지태)은 불교의 밀교 숭배자들로, 영화가 기독교식 ‘묵주, 성수, 십자고상’을 불교식의 ‘비결 처방, 경전’ 등으로 연결시키는 것은 무속신앙보다는 불교적 세계관에서 출발한 결과라 보아야 할 것이다.
생각해보면 영화에서 ‘죽이는 자’는 불교이고, ‘살려는 자’는 민간신앙의 틀 안에서 움직이며, ‘쫓는 자’는 기독교적 세계관에 대해 고민하는 인물로 그려진다. 이들은 서로 직접 연관되지 않는다. 그렇지만 매우 느슨하게, 운명적으로 서로가 서로를 향한다. 이 부분에 집중해서 영화를 살피면 재미있는 결과가 도출될 것이다. 실제로 <사바하>는 한국 민간신앙의 행위 일부를 불교에서 출발한 몇몇 양상들과 겹쳐놓는다. 죽는 자와 태어난 자 사이의 양자구도는 ‘예언’으로 함께 묶이고, 이들 운명의 불합리성은 사건을 파헤치는 ‘탐정’ 역할의 기독교인이 지닌 시선을 통해 ‘예수 탄생 설화’와 겹친다. 각자 떨어져 도생하더라도, 모든 종교가 결국 기묘하게 엮이고 만다. 왜 관객이 동떨어진 이야기들을 한데 묶으면서 영화를 관찰하는가? 사실 인과적이지도, 일반적 욕구의 원칙을 따르지도 않는데 말이다. 다양한 종교가 겹치는 순간, 우리가 발견하게 되는 것은 ‘상징’이나 ‘장르의 원리’가 아니다. 이 영화의 독특한 점은 바로 여기에 있다. 영화는 지나치게 설명적인 방식으로, ‘구조’를 통해 종교간의 닮은 양상을 소개하며 자신의 세부를 드러낸다.
제임스 프레이저에 따르면 ‘주술’에는 두 가지 원리가 존재한다. 첫째, 유사(similarity)는 유사를 낳는다. 혹은 결과는 원인을 닮는다. 둘째, 한번 접촉(contact)한 사물은 물리적 접촉이 끊어진 이후에도 계속 작용을 미친다. 언뜻 날조된 자연법칙처럼 들리는 동종주술과 감염주술의 두 가지 원리는 각각 ‘술법’과 ‘터부’로 인간세계에 자리 잡는다. 허황되고 무익한 이론처럼 보이지만, 실제로 과학적 세계관만큼이나 주술적 세계관은 규칙적이고 확실하다. 변덕과 우연, 우발성 등을 제외하고 살핀다면, 프레이저의 말처럼 동일한 원인은 동일한 결과를 낳을 것이기 때문이다. 기초 원리란 원래 포괄적이며 거대하고, 상당수 사례들을 끌어안는 진리이다. 앞서 말했듯 <사바하>가 기초적 종교 원리를 끌어들이는 방식을 구조를 통해 습득한다고 본다면, 영화가 겨냥하는 본질적이고 커다란 기초에 우리는 매달려야 할 것이다. 바로 ‘왕의 탄생’에 대한 신화의 원형이다. 실제로 이 영화의 모든 디테일들이 커다란 구조를 향해 나아간다. 새로운 왕이 태어나고, 기존의 왕은 죽는다.
탄생에 앞서 ‘죽음’에 대한 이야기를 먼저 해야 한다. 널리 알려졌듯 ‘신의 유한성’ 개념은 예수에게서도 발견된다. 예수는 인간의 몸에서 태어났으며 육체적 삶의 마감을 경험한 인물이다. 인간세계에서 ‘죽음의 필연성’이란 기본 원리를 그 역시 피하지 못한다. 만일 <사바하>를 통해 감독이 이러한 죽음의 신화를 말하려 했다면, 주인공은 김제석이어야 했다. 이 경우 우리의 관심사는 ‘왕의 살해’에 놓이게 된다. 하지만 완성된 영화의 주인공은 금화에 더 가깝다. 그녀의 나머지 한쪽이 ‘숨겨진 왕’의 본분을 드러내기까지 작품은 그녀를 향해 달려간다. 그렇다면 ‘그것’은 어떻게 탄생하는가? 먼저, 아기 예수의 탄생을 막으려 헤롯왕이 베들레헴에서 저지른 ‘유아 대학살’ 이야기가 그것과 연관되어 떠오른다. 그의 집안은 대대로 왕이었고, 그는 자신의 집이 아닌 새로운 곳에서 왕이 탄생할 것이란 예언에 초조해한다. 비슷한 사례는 더 있다. 제우스의 탄생 신화가 그렇다. 제우스는 티탄족의 왕 크로노스와 레아의 아들로, 아버지 크로노스는 아이들이 태어나기만 하면 잡아먹었다. 자식 중 한명이 자신을 권좌에서 밀어낼 것을 미리 알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어머니가 제우스를 크레타 동굴에 숨겨놓았고, 그곳에서 자란 그는 아버지를 몰아내고 세계의 지배권을 얻어내는 데 성공하게 된다.
앞서 나열한 왕의 탄생 설화에는 몇 가지 규칙이 정해져 있다. 먼저 예언이 등장한다. 하지만 그 예언을 내뱉는 자는 왕의 탄생에서 비롯되는 직접적 혜택을 받지 못한다. 둘째, 아버지인 왕이 존재한다. 그는 전지전능하며, 특히 시간에 있어서 절대적이다. 크로노스가 대표적이며, 헤롯왕 역시 ‘대대로’ 왕이 나오는 집안 사람이었다. 셋째, 예상치 못했던 어둡고 갇힌 공간에서 새 왕이 탄생한다. 암흑 속에서 발견된 이 인물은, 시간이 아닌 ‘빛의 왕’으로 불린다. 이 세 가지 원칙을 <사바하>에 대입하면 영화 속 주요 인물들이 차례로 호출된다. 먼저 예언을 발견해서 전달하는 박 목사가 등장하고, 이어서 그가 뒤쫓는 교주 김제석이 나타난다. 그리고 마침내 어둠 속에서 후광을 비추는 ‘그것’의 존재가 김제석을 몰아낸다. 때로 의식과 결과의 실현은 너무 동떨어져 있기에, 사태의 원인을 제대로 깨닫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 주술의 오류를 확인하기까지 그 오류가 쉽게 간파되지 않을 확률이 높고, 실패 또한 명백한 것이 아닐 가능성이 있다. 요컨대 대부분의 왕 탄생 설화에서 인과관계는 명확히 언급되지 못한다. 단지 구조적인 원리만이 모든 믿음의 근원이 된다.
한마디로 <사바하>는 인과관계를 중요시하는 영화가 아니다. 이 영화에서 인과적으로 인식되는 모든 장치들은 편집을 통해 사실적으로 재배치되어 나타난다. 기독교의 ‘아멘’과 동일한 위상을 차지하는 ‘사바하’가 제목으로 등장하는 것에서부터 영화의 플롯 파괴는 시작된다. 기존 상업영화의 서술방식과 확연히 구별되는 ‘신화적 구조 탐색’이 작품의 혼란을 가중시키지만, 종교적 영화인 만큼 이 편이 더 적절하단 생각도 든다. 그리고 한가지 더, 영화를 보는 내내 여섯 번째 손가락처럼 도드라지는 캐릭터 금화가 신경 쓰였다. 마치 <해리 포터> 시리즈의 네빌 롱바텀처럼, 그녀는 남들에게 ‘운명의 아이’라는 착각을 일으킨다. 하지만 실제로 여섯 번째 손가락은 그녀의 쌍둥이 언니다. 우리는 금화가 불러일으키는 심리적 허구를 ‘분신의 테마’와 연결시켜야 한다. 영혼의 저주받은 어두운 면이 구체화되는 장소로서의 프시케(Psyche)를 이 쌍둥이들은 구현한다. 현기증을 불러일으키고 불안감에 휩싸이게 만드는 그들의 존재는 우리 마음 속에도 있다. 영혼으로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