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2]
한국영화 화제작 감독 인터뷰②_ <돈> 박누리 감독
2019-03-21
글 : 이주현
사진 : 최성열
평범한 주인공의 성장 드라마로 만들고 싶었다

<돈>은 증권회사에 입사한 평범한 청년이 ‘당신도 부자가 될 수 있다’는 위험하지만 달콤한 제안을 받아들이면서 변해가는 이야기다. 큰돈을 벌 수 있을 거라는 부푼 꿈을 안고 여의도에 입성한 신입 주식브로커 조일현(류준열)을 중심으로, 일현을 부자로 만들어주는 작전 설계자 번호표(유지태), 번호표를 오랫동안 쫓아온 금융감독원의 한지철(조우진)이 서로를 이용하고 대립하는 구조다. <돈>이 전제로 하는 것은 ‘누구나 부자가 되고 싶어 한다’는 마음이다. 영화는 많은 시간을 할애해 부자가 되고 싶지만 현실은 수수료 0원인 신입사원 일현의 처지를 소상히 보여준다. 겹겹이 쌓아 올린 리얼리티는 일현에 대한 감정이입의 강도를 높이는 장치가 되는데, 이때의 리얼리티는 여의도를 부지런히 뛰어다닌 박누리 감독의 발품 덕에 확보될 수 있었다. 돈에 대한 사람들의 보편적인 욕망을 현실적으로 담아낸 <돈>은 <남자가 사랑할 때>(2013), <부당거래>(2010), <베를린>(2012)의 조감독으로 일해온 박누리 감독의 첫 번째 영화다. <돈>이 우리와 닮은 평범한 인물 일현의 성장 드라마로 읽혔으면 한다는 박누리 감독을 만났다.

-첫 영화의 개봉을 앞둔 소감은.

=언론배급시사회 때 배우들이랑 처음으로 같이 영화를 봤는데, 초반엔 숨도 안 쉬어지더라. (웃음) 개봉 때까지 걱정과 긴장의 연속이지 않을까 싶다.

-장현도 작가의 소설 <돈>이 원작이다. 어떻게 기획되고 시작된 작품인가.

=<남자가 사랑할 때>의 조감독 일을 끝내고 시나리오를 쓰던 중 <돈>의 원작 소설을 읽게 됐다. 주식을 소재로 한 책이라고 해서 주식을 모르는 사람으로서 우려 반 기대 반으로 책장을 펼쳤는데, 첫장부터 몰입했다. “숫자 뒤에 0이 10개 붙으면 얼마인지 아는가”라는 문장에선 손가락을 펴 그 수를 세어보았다. 일, 십, 백, 천, 만, 십만…. 0이 10개인 숫자가 100억원으로 금방 인식되지 않았다. 크고 낯선 금액이었다. 내게 친근한 금액을 생각하면서 나는 얼마짜리 인생인가, 백원짜리 인생인가, 천원짜리 인생인가, 하는 생각을 했다. (웃음) 돈과 인생을 결부시킬 수 있는 이야기에 마음을 빼앗겼다. 다음으로 주인공 조일현에 끌렸다. 특별히 잘난 것도 없고 가진 것도 없는 평범한 친구가 큰돈을 벌 수 있는 기회를 잡는다. 그리고 변해간다. 그 모습을 보면서 ‘나도 저렇게 될 수 있을까?’ 싶더라. 내가 이렇게 일현에 공감했다면 관객도 일현의 행동과 감정에 충분히 공감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그래서 도전했다.

-돈을 좇는 증권가 사람들의 욕망에 관한 이야기라고 하면 올리버 스톤의 <월스트리트>(1987)나 마틴 스코시즈의 <더 울프 오브 월스트리트>(2013)를 단번에 떠올리게 된다. 영화를 만드는 동안 이 두편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 같은데.

=물론 두편 다 재밌게 본 영화들이다. 하지만 레퍼런스로 삼는다거나 의식해서 일부러 다르게 가야겠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돈>은 그 영화들과 결이 다른 영화라고 생각했다. 욕망의 민낯을 보여주고 욕망을 좇는 이야기로 갈 생각이었다면 지금과는 다른 결과물이 나왔을 거다. 나는 이 영화를 평범한 주인공의 성장 드라마로 만들고 싶었다.

-시나리오를 쓰면서 매일 여의도에 출근하다시피 했다고. 발로 뛰어 취재한 덕분인지 영화 초반 증권회사에 갓 입사한 사회 초년생 일현의 애환이 꽤 구체적으로 표현된다.

=처음엔 막막했다. 무엇을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일단 주식 계좌를 만드는 일부터 시작했다. 영화에 투자한다 생각하고, 누군가에겐 쌈짓돈에 불과하겠지만 내게는 적지 않은 금액의 돈을 주식에 투자했다. 또 증권회사에서 일하는 사람들을 수소문하기 시작했다. 여러 인맥을 동원해, 주위에 증권회사에 다니는 사람이 있느냐고 물어물어 주식 브로커들을 만났다. 증권회사가 몰려 있는 여의도의 냄새를 맡고 싶어서 여의도로 향한 것도 있지만, 취재하려고 만난 사람들이 너무 바빠서 그들의 일터에서 대기하고 있다가 틈날 때마다 만나려고 여의도에 상주한 것도 있다.

-증권회사 사람들을 만나고 또 그들의 생활을 엿본 후 들었던 생각은 뭔가.

=정말 치열하게 사는구나. 하루를 1초도 남김없이 사용하는구나. 그들은 하루를 정말 빡빡하게 산다. 장이 끝났다고 일이 끝나는 게 아니다. 그때부터 책상 밖 일이 시작된다. 저녁 약속을 3개씩 잡아서 1시간 단위로 사람들을 만나곤 하더라. 게으른 편이 아닌데도 괜히 내가 너무 게으르게 살고 있는 것 아닌가 돌아보게 될 정도였다. (웃음) 실제로 여의도에선 하루에 수조원의 돈이 거래된다고 하는데, 주식을 하면서도 느낀 거지만 눈에 보이지도 않는 돈이 순식간에 여기서 저기로 움직이는 게 이상하리만치 허무하고 또 아이러니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선무당이 사람 잡는다고 주식을 하면서 돈을 벌 때가 있었다. 번 만큼 사람들에게 밥을 샀는데 며칠 뒤에 계좌를 보면 마이너스가 되어 있었다. 실제로 돈이 내 수중에 들어온 것도 아닌데 부자가 된 것 같았다가, 그 돈이 순식간에 빠져나가면 가난해진 것 같았다. 이상한 감정이 들었다. 이런 감정이 일현을 통해 표현되길 바랐다. 해외 계좌에 큰돈이 들어왔을 때 그것이 실감나지 않아 한국에 있는 은행에 1만원을 이체해보는 장면처럼. 일현이 돈을 벌거나 잃었을 때 느끼는 감정을 구체적 상황으로 표현하려 했다.

-증권시장의 풍경이나 작전이 전개되는 상황을 설명하지 않고 보여준다. 주식의 세계를 잘 모르는 관객도 충분히 이야기를 이해하고 따라올 수 있도록 하는 게 중요했을 것 같다.

=장황하게 설명하고 싶지 않았다. 설명이 길면 지루해지기 쉽다. 여러 고민 끝에 내린 결론은 설명의 필요를 못 느끼게끔 영화로 따라가게 하자는 거였다. 처음엔 자막으로 관련 용어를 설명해야 할까, 그래픽으로 보여줘야 할까 하는 고민도 했다. 그런데 자막과 그래픽을 사용하면 관객이 ‘나 이 내용을 알아야 하는 건가?’라는 생각을 하게 될 거고 그러면 실패라고 생각했다. 설명은 생략하고, 일현의 감정을 따라갈 수 있게 하는 데 집중했다. 일현이 주식 거래나 작전을 수행할 때 짓는 표정이나 눈짓, 마우스를 클릭할 때의 망설임 같은 작은 신체 반응을 통해서 관객이 그 장면의 상황과 분위기를 파악할 수 있게끔 했다. 액션영화를 볼 때 어떤 기술을 썼는지 어느 부위가 다쳤는지 몰라도 충분히 액션의 쾌감과 영화적 재미를 느낄 수 있는 것처럼 말이다.

-“나는 부자가 되고 싶었다”라는 일현의 내레이션으로 영화가 시작된다. 영화에서 중요한 건 부자가 된 이후 일현의 이야기라고 생각했는데 일현의 성공과 실패의 등락이 생각만큼 크지 않았다.

=일현이 돈을 벌면 무엇을 어디까지 할 수 있을까에 대한 고민을 많이 했다. 예상치 못한 다양한 방식으로 자신의 부를 만끽하는 걸 보여줄 수도 있었을 거다. 하지만 자극적인 방식으로 재미를 주는 것보다 현실적인 접근을 택했다. 일현이 소화할 수 있는 능력 안에서 돈을 써야지 관객도 현실감 있게 상황을 받아들일 것 같았다. 게다가 일현이 번 돈은 분명 큰돈이지만 그렇다고 또 어마어마한 거액은 아니다. 요즘의 집값을 생각해보라. (웃음) 일현이 돈을 벌고 욕망을 표출하는 방식이 조금은 소박하게 느껴질 수 있지만, 부모님에게 안마의자 사드리고 스카이박스에서 축구를 보는 데서 행복을 느끼는 모습이 어쩌면 순진하고 착한 일현스러운 모습이라 생각했다. (류)준열씨와도 그런 이야기를 많이 나눴다. 일현이라면 이렇게까지 할 수 있을 것 같아? 어떻게 돈을 쓸 것 같아? 그러면서 일현의 행동이 어디까지 나아갈 수 있을지 설정했다.

-바하마 해변의 바에서 토트넘과 맨체스터 시티의 축구 경기를 보며 일현과 로이 리(대니얼 헤니)가 만나는 장면이 있다. 최고의 기량을 뽐내고 있는 손흥민의 최근 활약을 예상이라도 한 듯해 시기적으로 절묘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의외로 이 장면을 물어보는 사람들이 있던데, 내 아이디어다. (웃음) 시나리오를 쓰는 과정에서 일현이 어떤 취미를 가지고 있을까 생각했다. 일현 또래의 남자라면 스포츠 하나쯤은 좋아할 것 같았고, 그러면 퇴근하고 집에 와서 맥주 마시며 축구 경기를 보다 잠이 드는 아이일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그런 아이가 바하마라는 이상향에 가까운 공간에 가서 자신의 계좌에 돈이 잘 있는지 확인하고, 그곳에서 마침 로이 리라는 모두의 이상형에 가까운 멋진 한국계 외국인 펀드매니저를 만나게 된다. 두 사람이 단기간에 친해지는 방법을 고민하다가, 해외에서 활약하는 한국 선수의 축구 경기를 보면 자연스레 함께 응원하게 되고 말을 섞게 되지 않을까 했던 거다. 시나리오 쓸 때가 2015년쯤이었고, 해외에서 활약하는 축구 선수로 손흥민 선수가 떠올랐다. 그때만 해도 준열씨가 축구를 좋아하고 손흥민 선수의 팬이라는 사실을 몰랐다. 준열씨도 첫 미팅 때 그러더라. “감독님, 제가 손흥민 선수 좋아하는 거 어떻게 아셨어요?” (웃음) 이런 게 운명인 건지, 그 후 실제로 준열씨와 손흥민 선수가 친해졌다. 손흥민 선수가 해외에서 꾸준히 활약해준 덕에 시나리오를 수정할 필요가 없었다. 4년 전이나 지금이나 여전히 활약하고 있는 손흥민 선수에게도 감사드린다. (웃음)

-지금까지 류준열이 연기한 거의 모든 캐릭터가 조일현의 모습에 조금씩 다 담겨 있는 것 같다. 조일현 역에 류준열을 캐스팅한 감독님만의 이유가 궁금하다.

=적어도 일현과 비슷한 나이대의 배우들 중에선 준열씨가 가장 평범하면서도 특별한 배우라고 생각한다. 이 친구는 어디에 갖다놓아도 감쪽같이 원래 거기 있던 사람처럼 보인다. 편의점 아르바이트생으로 나오는 작품을 보면 늘 그렇게 편의점 조끼를 입고 아르바이트를 했을 것 같고, 학생으로 나올 땐 진짜 학생 같다. 작위적인 느낌이 없다. 일현은 변화무쌍한 모습으로 극을 이끌어가는 인물인데, 준열씨가 그런 역할을 잘 소화할 거란 믿음이 있었다.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영화의 결, 영화가 가야 할 길을 잘 이해하고 있는 배우라서 작업하는 동안 즐거웠다. 촬영하면서 재밌었던 일화 하나는, 작전을 통해 돈을 번 뒤 변해가는 일현의 모습을 찍을 때였다. 화를 내고 짜증을 내는 연기를 해야 하는데 준열씨가 화를 못 내더라. “더 화를 내야 돼요. 짜증을 내야 돼요”라고 했더니 준열씨가 나를 불러 이렇게 말하더라. “감독님, 사실 제가 살아오면서 남에게 화를 내거나 짜증을 낸 일이 없어서 어느 정도로 화를 내야 할지 모르겠어요.” 기본적으로 선한 성정의 배우고, 그런 모습이 또한 일현과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부당거래> <베를린>의 조감독을 거쳐 감독으로 데뷔했는데, 류승완 감독의 현장에서 일하며 배운 게 있다면 무엇인가.

=영화적인 것보다는 부지런함을 많이 배운 것 같다. 류승완 감독님은 정말 1초도 쉬지 않고 일하는 분이다. 감독님의 그런 열정과 부지런함을 가까이서 지켜보면서 자연스레 그 부지런함을 몸에 익히게 된 것 같다.

-영화는 어떻게 시작하게 됐나.

=고등학생 때 막연하게 영화감독, 뮤직비디오 감독, CF 감독이 되고 싶다는 생각을 했고, 대학은 광고홍보학과로 진학했다. 막상 학과에선 영화에 관한 것들을 배울 수 없어서 영화 동아리에 들어갔다. 졸업하고선 상업영화 현장의 연출부 막내로 일을 시작해서 차근차근 여기까지 왔다. 2004년부터 현장에서 일하기 시작했으니 감독으로 데뷔하기까지 15년이 걸린 셈인데, 영화를 만드는 게 너무 재밌어서 그 희열이 여러 고충들을 이겨내게 한 것 같다.

-상업영화로 입봉하는 여성감독이 많지 않은 상황에서, 15년 동안 감독으로 데뷔할 수 있을지 고민도 많았을 것 같은데.

=영화 일을 처음 시작했을 땐 30살에 감독으로 데뷔할 수 있을 줄 알았다. (웃음) 그런데 어느덧 30살이 돼 있더라. 자기 영화를 만드는게 이렇게 어렵구나 하는 걸 차츰 깨달았고, 30살이 넘어서는 나이가 중요한 게 아니라 내가 얼마나 준비되어 있는지가 중요하다는 걸 알게 됐다. 그러면서 차분히 때가 오길 기다렸다.

-앞으로 어떤 영화를 만들고 싶나.

=특정 소재나 장르보다는 인물에 집중하는 영화를 좋아한다. 좋아하는 감독은 마틴 스코시즈와 데이비드 핀처다. 인간을 탐구하고 인간의 어두운 내면을 보여주는 그들의 영화를 좋아한다. 인생 영화는 <첨밀밀>과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아메리카>지만. (웃음) 어쨌든 앞으로도 사람이 중심이 되는 영화를 만들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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