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2]
영화 바깥에서 아녜스 바르다는 말했다
2019-04-18
글 : 김나희 (클래식음악평론가)
생전 인터뷰 기사를 바탕으로 재구성한 아녜스 바르다의 시네-글쓰기

(3월 29일 아녜스 바르다 작고 후 프랑스 현지에서는 각 언론의 추모 기사와 지난 인터뷰 기사가 계속 쏟아져 나오는 중이다. 그 내용을 파리 현지에서 김나희 평론가가 일인칭 시점으로 재구성했다.-편집자)

<아녜스 바르다의 해변>

“바르다는 갔지만 아녜스는 우리와 함께 여전히 이곳에 있을 겁니다. 지혜롭고 생생한 데다 다정하고 영적이며 크게 소리내어 웃고, 재미있으며 종잡을 수 없는 그녀의 작품처럼요.”

3월 29일, 누벨바그의 대모 아녜스 바르다의 타계 소식이 전해졌다. 전 칸국제영화제 위원장 질 자코브가 트위터에 추모의 메시지를 올렸다. “아녜스 바르다의 영화들은 프랑스의 정신이 담긴 국가적 보물입니다.” 프랑스의 거의 모든 매체가 앞다투어 바르다를 오마주하는 기사를 쏟아냈다. 1928년생인 바르다는 에너지 넘치는 모습으로 전세계 영화제에 참석해왔다. 2019년 1월, 파리 시네마테크에서 열린 전작전과 마스터클래스는 물론 2월 열린 베를린국제영화제에서도 <아녜스가 말하는 바르다의 마지막 영화>를 통해 팬들과 만나왔기에 더욱 안타까운 소식이었다. 2017년 <바르다가 사랑한 얼굴들>에서 바르다와 함께한 포토그래퍼 JR은 바르다의 사진을 실물 크기로 만들어 풍선에 달아 하늘로 띄워보내는 영상을 자신의 SNS에 올려 바르다를 사랑하는 많은 이들의 심금을 울렸다.

4월 2일 화요일 오전 11시, 오후 2시에 열릴 예정이던 장례식을 앞두고 시네마테크 프랑세즈는 대표 코스타 가브라스를 비롯해 아녜스 바르다의 유족을 주축으로 이 거장의 영면을 안타까워하는 모든 이와 함께하는 추모 행사를 열었다. 바르다는 생전 전작전으로 오마주를 표한 마라케시국제영화제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며, 그녀의 영화 속에서 살아 숨쉬는 보통의 사람들에게 영화적 성취의 공로를 돌렸다. “수천명의 사람들이 오로지 생존하기 위해 투쟁하듯 살아내고 있어요. 일자리를 갖기 위해, 적절한 금액의 임금을 받기 위해, 인간으로서 최소한의 존엄과 행복을 보장받기 위해 수백만명의 난민들이 그들의 나라를 떠나고 있습니다.”

사진은 제게 영화를 어떻게 만들어야 하는지 알려주는 걸 멈춘 적이 없습니다. 사진을 찍는 건 순간을 담아내는 것이고, 그건 태생적으로 기록의 속성을 갖죠. 그래서 제가 다큐멘터리라는 장르에 깊은 애정을 가질 수밖에 없었던 거고요. 젊은 시절 열광할 만한 사건이 있었다면 바로 장 빌라르를 만나 함께 일한 거예요. 그가 아비뇽 페스티벌을 막 시작하던 1948년 무렵이에요. 그때는 아무도 그에게 예산을 내주지 않아 그는 친구와 가족, 지인들과 함께 페스티벌을 시작했어요. 저는 단지 그 옆에서 그를 도울 수 있도록 허락받은 데 불과했고요. 배우들의 사진을 몇장 찍고, 곳곳의 먼지를 쓸어내고, 대기실에 놓인 연기자들의 물통을 채우고…. 저는 그곳에서 유랑하며 가난하게 사는, 극단에 속한 배우들의 삶을 보았어요. 저는 그 삶을 무척 좋아했어요. 물질적으로 턱없이 부족한 상황인데도, 빌라르의 재능은 그 풍족하지 못한 환경을 모두 초월했어요. 그의 상상을 초월하는 영민함, 연기라는 행위에 대한 사려 깊은 성찰, 원작 텍스트에 대한 심도 있는 탐구, 예술가 특유의 순수함, 침묵….

소르본대학교에서 공부하기 위해 프랑스 남부에서 파리에 온 저는 마치 도시의 기세에 눌린 시골 쥐 같았어요. 당시 저는 파리를 좋아하지 않았죠. 그래서 몇 시간이고 걸어다녔어요. 파리의 모든 동네를 샅샅이, 두발로 돌았어요. 팡탕, 뷔트쇼몽까지(파리19구에 위치한 지역으로 현재는 필하모니 등이 조성되었으나 1940년대 후반 당시에는 파리에서 가장 외지고 낙후한 지역) 모두 다요!. 파리의 모든 경계들, 외곽으로 이어지는 관문들, 행정구역이 바뀌는 지점들…. 저는 중고 카메라를 사서 사진을 찍기 시작했어요. 아비뇽 페스티벌에서만 사진을 찍은 건 아니었어요. TNP(국립민중극장, 장 빌라르가 이끈 극단이 자리 잡은 극장)에서도 사진을 찍었죠. 빌라르는 엄청난 재능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때까지만 해도 언론에 잘 알려진 사람은 아니었어요. 당시 스타 배우인 제라르 필립이 아비뇽 페스티벌에 와서 <함부르크의 왕자>를 연기한 1951년까지는요. 바로 그때, 무대에 등장한 스타의 존재 덕분에 제가 찍은 아비뇽 페스티벌 사진이 모든 신문과 잡지를 도배하기 시작했어요. 사진들이 홍수처럼 넘쳐흘렀죠. 그 사진들은 심지어 지금까지도 이곳저곳에서 보여요. 막 데뷔한 잔 모로부터 제라르 필립, 장 빌라르까지 모두 흑백이었어요. 아비뇽 페스티벌을 기념하는 해가 돌아올 때마다 모든 언론이 약속이라도 한 듯 제가 겨우 열아홉, 스물이던 그 시절에 찍은 사진들을 다시 싣더군요. 당시 빌라르는 제게 크게 고마워하지도 않았고, 제대로 보수를 챙겨 받지도 못했는데… . 1954년, 저는 25살이었고, 첫 시나리오 <라 푸앵트 쿠르트로의 여행>을 써둔 상태였어요. TNP에서 사진을 찍으며 얼굴을 익힌 두 배우(실비아 몽포르, 필립 누아레)를 캐스팅해 겨우 2만달러의 예산으로 첫 영화를 찍었어요. 알랭 레네가 편집을 맡았죠. 그들은 아직 유명한 영화배우가 아니었지만, 존경할 만한 관대함을 갖췄고, 영화적 경험을 함께할 준비가 되어 있었어요. 꽤 까다롭고 어려운 시나리오였는데도 최선을 다해주었죠. 하지만 제 첫 영화는 지금에 와서야 누벨바그의 첫 영화로 평가받지만 당시엔 흥행에 실패한 건 물론 평단의 반응도 좋지 않았어요. 평론가들에게 겨우 25살짜리 젊은 여자가 만든 저예산영화는 진지하게 고려할 작품이 아니었으니까요.

여성 창작자가 해야만 했던 이야기

저는 타고난 페미니스트예요. 여성으로서의 저를 자각하지 않고 영화를 만든 적이 없었어요. 68혁명을 지나 1970년대 들어 많은 여성이 각성하기 시작했고, 영화계에도 여성감독들이 등장했어요. 처음엔 반갑고 놀라웠죠. 대체 다들 어디에 숨어 있었던 거야 싶었으니까요. 그 감독들의 첫 작품은 영화적 성취라기보다는 오히려 비명에 가까웠어요. 가부장제 사회에서 여성을 향한 폭력이 어떻게 행해졌는지 증언하듯 쏟아내는 목소리였죠. 아버지와 남편으로 대표되는 남성들이 저지른 폭력, 억압과 그로 인한 상처를 인식하고 들여다볼 때 터져나오는 자연스러운 비명이었어요. 물론 예술적으로나 미학적으로 수준 미달인 작품도 상당히 나왔어요. 여성감독들의 수준 떨어지는 영화들이 당혹스럽지 않았다면 거짓말이지만 저는 그런 비명이 쏟아져 나오는 과정이 필수적이었다는 걸 잘 알아요. 그녀들보다 15년, 20년 먼저 영화계에서 유일한 여성 창작자로서 커리어를 시작한 사람이니까요. 그 비명의 단계를 지나면 우리는 여성 창작자로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이야기, 여성이 가진 고유의 힘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어요. 여성은 서로 연대하고, 상대를 챙기고 버려진 것을 거두며, 가진 것을 나누는 생명의 힘을 가졌으니까요. 몇몇 커플을 만나보면 특히 여성이 지닌 에너지가 눈에 보여요. 삶과 일상을 사랑하고, 아이들을 보살피고 기르며, 요리를 해서 즐겁게 먹고 또 누군가를 먹이고…. 사람들은 흔히 일하는 여자와 가정을 꾸리는 여자 사이에서 선택하라고 말해요. 저 역시 일하는 여자인데 그중 특히 예술을 업으로 삼은 여자들을 두고 ‘자기만 아는 괴물, 자의식 과잉의 이기주의자’ 이런 식으로 부르며 가족에게 헌신하지 않는다고 프레임을 씌우죠. 그럴 때마다 저는 반문해요. 나는 다 원하는데? 가정을 이루어 아이를 낳아 기르는 한편 나의 예술 작업을 하며 커리어를 쌓고…, 왜 타인의 삶을 그렇게는 절대로 살 수 없는 것처럼 미리 규정하죠?

많은 영화감독들이 여성 캐릭터를 통해 그들 스스로 품은 불안감을 스크린에 묘사했어요. 잉마르 베리만의 영화가 좋은 예죠. 베리만 영화의 여자주인공들은 극도의 불안과 고통에 시달리는 신경증적 증세를 지닌 인물들인데, 저는 그녀들을 실제로 만났을 때 무척 놀랐어요. 영화 바깥에서 살아 숨쉬는 자연인으로서 그녀들은 많은 에너지를 발산하며 삶의 기쁨을 아는 생동감을 가진 사람들이었거든요. 우리는 영화 속 인물을 보며 많은 것을 발견하죠. <노래하는 여자, 노래하지 않는 여자>에 상반되는 두 여자주인공이 나오는 것도 그 때문이에요. 젊고 에너지 넘치며 자유롭게 새로운 세상을 꿈꾸는 여성이 이미 페미니스트로서 활약하면서 존재하지만, 가정을 꾸려 아이들의 어머니로 조용하게 일상을 살아가는 또 다른 주인공도 나와요. 그녀들은 서로 교류하고 소통하고 연대하면서 페미니스트로서 각성하고 변화를 경험해요. 시몬 드 보부아르의 말대로 우리는 여자로 태어나는 게 아니라 만들어지는 거예요. 우리가 후자의 사람들에게 ‘남편을 갖다 버리세요. 아이들을 버리고 집을 뛰쳐나오세요’ 이렇게 말할 수는 없어요. 다만 좀더 ‘스스로 주체가 되는 삶’에 대해 이야기할 수는 있죠. 피임에 대해 알려주고, 남편이나 아버지가 말하고 결정하는 대로 살 것이 아니라 주체적으로 자기 결정권을 갖고 살도록 조언하고, 다음 세대 아이들에게 왜곡되지 않은 여성성을 가르치는 것 등등이요. 기존의 틀을 과격하게 부수는 혁명을 일으키지는 못하더라도 일상에서 작게 노래하듯 여성주의자로 사는 법을 알려줄 수는 있으니까요. 이 영화는 많은 논란을 불러일으켰고, 이 영화의 메시지에 불편한 기색을 드러내는 사람도 많았어요. 말하려는 것이 분명한 영화였으니까요. 저는 이 영화가 정교한 만듦새의 시나리오를 바탕으로 하지는 못했을지언정 자신만의 운명을 가졌고, 여성들을 도와주었다고 생각해요. 이 영화는 우리가 참여해온 여성운동이 그랬듯, 드디어 현실과 맞닿았으니까요.

1974년 11월, 국회에서 낙태 합법화를 주장한 시몬 베이유 법이 통과되기 전, 그 기폭제가 된 보비니(파리 외곽의 가난한 동네) 사건이 있었죠. 싱글맘의 딸인 16살 소녀가 강간당해 임신한 뒤 불법 낙태를 했다는 이유로 재판을 받았고, 그 시기 저를 비롯해 잔 모로, 시몬 드 보부아르, 카트린 드뇌브 등 343명의 여자들이 실명으로 <르 누벨 옵저바퇴르>에 성명을 내고 연대했어요. 우리 모두 임신중절을 경험했다고 공개적으로 고백하며 목소리를 냈어요. 그 행동과 현실적인 법 제정 및 실행 사이에는 괴리가 있어요. 우리가 그렇게 한다고 해서 당장 마법처럼 현실의 문제가 뚝딱 해결된 것도, 직접적이고 가시적인 성과가 있었던 것도 아니에요. 다만 현실에 맞는 법이 제정되도록 한발 더 나아가는 데 기여했죠. 세상은 가난한 동네에 살고 있는, 노동자계급 싱글맘의 딸이 강간당해 원치 않는 임신을 하고, 산부인과 수술 비용이 엄마가 벌어오는 세달치 월급에 맞먹어 결국 불법 낙태를 할 수밖에 없었다는 세세한 부분에 신경 쓰지 않아요. 그저 피해자를 가혹한 시선으로 바라보며 가난해서, 아빠도 없이 어렵게 자라서 낙태까지 했다며 손가락질하기 바쁘죠.

저는 암스테르담에 임신중절을 받으러 가는 친구를 여럿 보았고, 가능한 한 그 여정에 함께했어요. 세상이 많이 바뀌어 요즘의 젊은 세대에게 70년대 분위기가 어땠는지, 원치 않는 임신을 한 여성이 겪어야한 드라마가 얼마나 감정적으로 농도 짙은 것이었는지 이야기해준다면 아마 쉽게 믿지 못할 거예요. 만약 2명이 수술을 받으러 가야 한다면 그 여정을 함께하는 데 두 사람이 더 필요하니까 4명이 함께 가요. 한 사람은 손을 잡아주면서 위로하는 역할을 하고, 또 다른 사람은 계속 실없는 농담이나 우스갯소리를 하면서 분위기가 무거워지고 눈물을 쏟아내면서 죄책감에 시달리는 걸 막으려고 노력하죠. <방랑자>에는 한명의 여성이 등장해요. 고독을 이야기하기 위해 만든 영화예요. 혼자라 외롭고, 모든 것에 분노해 있으며 광기 어린 젊은 여자가 나와요. 여자는 철저히 홀로 존재하고, 끝없이 걸어요. 걷는 여자, 제가 제 영화 인생을 걸고 가장 담아내고 싶어 한 주인공의 모습이에요. 저는 이 영화가 제 작품 중 제가 말하려고 한 것을 담아내는 데 그나마 가장 성공한 유일한 작품이라고 생각해요.

영화 속 인물들에게 문을 열어두는 것

물리적으로 나는 내 영화에 존재하고, 내 영화 역시 나의 일부로 존재해요. 자크(자크 드미)가 아팠을 때, 그가 쓰고 있던 건 시나리오가 아니라 어린 시절에 대한 추억담이었어요. 매일 저녁 그는 내게 자신이 쓴 원고를 보여주었어요. 정말 재미있었죠. 마음속으로 드디어 이 원고를 통해 그의 부모님이 어떤 사람이고 그가 성장한 낭트의 차고가 어떤 곳이었는지 더 잘 알게 되었다고 생각했어요. 어느 날 제가 원고를 읽다가 “이거 정말 좋은 시나리오가 되겠는데?” 하자 그가 “시나리오로 써줘”라고 하더군요. 그리고 자크는 제게 자신의 기억의 문을 완전히 열어주었어요. 누군가의 어린 시절로 들어간다는건 일종의 도박과 같아요. 왜냐하면 서로 사랑하는 사람들은 많은 기억을 나누는데, 어린 시절은 여전히 가장 비밀스러운 무엇으로 남아있거든요. 만약 그가 아프지 않았거나 원고를 쓰지 않았더라면, 저는 영영 그의 어린 시절 기억을 몰랐을 거예요. 자크와 제가 완전히 다른 영화적 세계를 가졌던 건 맞아요. 영화라는 장르를 제외하면, 우리가 매혹되는 지점이나 지향하는 곳 모두 달랐거든요. 그런데 몇몇 사람이 말하기를 우리가 비슷한 방식으로 색을 사용하고, 어떤 주제에 대해 취하는 태도가 닮은 구석이 있다고 하더군요. 그건 맞는 말이에요. 1990년 자크가 죽은 뒤 저는 <낭트의 자코>를 만들어 1년 후 개봉했어요. 그건 저만이 할 수 있는, 남편이자 영화감독인 자크 드미에게 바치는 오마주였어요.

저는 영화와 영화가 욕망하는 지점 사이의 거리가 매우 좁혀지는 걸 좋아해요. 그 거리가 아이디어의 영감과 촬영현장의 영감 사이에서 점점 좁혀지는 것이 좋아요.

인생은 최소한의 대화와 나눔으로 이뤄져 있고, 영화도 그 점에서 인생과 닮아 있어요. 영화에서 중요한 것이 있다면 그건 성취하지 않는 거예요. 끝내지 않는 것, 언제나 생략하는 것, 인물들에게 문을 닫아버리지 않는 것, 틀에 가두지 않는 것, 영화 바깥에서도 무언가가 계속 존재하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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