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참 뜨거운 엔딩이었다. <어벤져스: 엔드게임>이 개봉 8일 만에 국내에서는 800만 관객을 돌파해 700억원이 넘는 수익을 거뒀고, 5월 2일 현재까지 전세계 시장 수익까지 더하면 1조원이 훌쩍 넘는다. 과연 이 영화가 어떤 흥행 기록을 더 갈아치울지 기대되는 한편, 영화 흥행 소식이 사회뉴스 면에 실리는 것에 대한 반감을 가지는 이들도 있다. 군대에 간 이등병이 근무지를 이탈해 영화를 보러 가거나, 식사 중에 영화 이야기를 삼가 달라는 안내문을 내거는 식당이 생겨났다는 소식은 씁쓸한 여운을 남긴다. 2800여개에 달하는 멀티플렉스 극장 스크린을 독과점하고 있는 문제 역시 마찬가지다. 다소 호들갑스러운 피날레처럼 보이지만 그럼에도 <어벤져스: 엔드게임>의 엔딩은 짚고 넘어가지 않을 수 없다.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는 지난 11년 동안 우리에게 무엇을 남겼는지 다시 한번 그 여정을 정리해보았다. <어벤져스: 엔드게임>과 함께 보면 좋을 코믹스의 주요 사건도 정리했다.
“내가 아이언맨입니다.” <아이언맨>(2008)에서 토니 스타크(로버트 다우니 주니어)가 이 마지막 대사를 내뱉은 순간,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Marvel Cinematic Universe, MCU)가 시작됐다. <아이언맨>에서 민간 군수업체 스타크 인더스트리의 대표였던 토니 스타크는 자신의 능력에 취해 흥청망청 살다가 테러리스트에게 납치를 당한다. 죽음의 문턱에서 그가 발견한 새로운 인생 출구는 슈퍼히어로의 삶이었다. 어딘가 고장난 사회를 수리하는 데 자신의 능력을 써야겠다고 다짐한 토니는 또한 페퍼 포츠(기네스 팰트로)야말로 자신의 인생에 없어서는 안 될 사람이란 걸 조금씩 깨달아간다. 토니 스타크가 <아이언맨> 1, 2편에서 가장 중요하게 해결해야 했던 사건은 모두 스타크 인더스트리가 저지른 과오에 대한 올바른 수습이었다. <토르: 천둥의 신>(2011)에서 오딘의 아들 토르(크리스 헴스워스)는 아직 아스가르드의 왕이 되기에는 자질이 부족했다. 모든 걸 폭력으로만 해결하려 하는 그가 지구에서 겪는 일은 동생 로키(톰 히들스턴)와 갈등을 빚게 하지만 자신이 앞으로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가를 깨닫게 한다. <퍼스트 어벤져>(2011)에서 연약한 신체를 타고났던 스티브 로저스(크리스 에반스)는 강한 군인이 되길 간절히 소망하다가 결국 ‘슈퍼 솔저 프로젝트’에까지 차출되어 독일의 비밀조직 하이드라와 맞서 싸운다. 슈퍼히어로로서의 삶을 자신의 숙명처럼 여기다가 전투 중에 가장 친한 친구를 잃고 이제 막 사랑을 싹 틔우려던 사람과도 생이별을 해야 하는 슬픔을 겪게 된다. 초기에 마블 스튜디오는 슈퍼히어로 개인의 서사를 다룬 영화를 차례로 공개하면서 엔딩 크레딧의 숨은 영상을 통해 다른 영화와 세계관을 공유하고 있음을 이해시키려 노력했다. 본격적으로 MCU의 재미를 느낄 수 있었던 <어벤져스>(2012)에 이르러서 주인공들은 슈퍼히어로로서의 자신의 삶이 주변 사람들과 나아가 이 지구에 어떤 영향을 끼치게 될지 진지한 고민을 하기 시작하지만, 어쨌거나 이들은 어딘가 좀 문제가 있는 남자들로 이뤄진 집단이었다.
11년간 짊어지고 있던 책임감
<어벤져스> 이후 MCU가 보인 행보 중 흥미로웠던 점은 이 영화가 다루고 있는 치타우리족의 뉴욕 침공 사태를 재난영화라는 장르적 관점에서 바라보게 만들었다는 점이다. 영화를 볼 때는 온갖 빌딩 사이를 휘젓고 다니는 헐크(마크 러팔로)의 터프한 매력에 박수를 보냈지만 저렇게 난장판이 된 도심 한복판에서 얼마나 많은 민간인 사상자가 생겼을지까지 따져가며 보지는 않았기 때문에 관객은 무심해질 수밖에 없었다. 이후의 영화들은 그런 보이지 않는 곳의 피해와 희생을 이야기 안으로 끌어왔다. 뉴욕 사태 이후 쉴드 요원들이 사건을 해결(혹은 수습)해나가는 드라마 <에이전트 오브 쉴드>를 비롯해서 뉴욕 사태의 피해자이기도 했던 안타고니스트 벌처(마이클 키튼)의 탄생기를 보여주는 <스파이더맨: 홈커밍>(2017) 등은 군수산업, 테러, 민족주의와 같은 현실 문제를 충분히 대입해서 생각해볼 여지를 남겼다. <캡틴 마블>(2019)이 난민 문제를 환기시키는 점 역시 같은 맥락에서 해석할 수 있다. MCU 영화들은 DC 코믹스나 이십세기폭스, 소니 스튜디오 등의 슈퍼히어로 영화들이 현실 문제를 다루던 방식과 다른 전략을 취했다. 덕분에 <어벤져스> 이후 만들어진 영화와 거기에서 다루고 있는 이야기가 사실상 비극적인 재난 상황에 처한 인류의 대처법 내지는 트라우마에 관한 이야기로 해석될 수 있었다. 배트맨과 엑스맨의 서사에서 그런 고민이 없었다는 이야기는 결코 아니다. 이를 보다 대중적으로 풀어내는 데 마블 스튜디오가 먼저 성공했을 뿐이다.
흥행은 물론 작품성 면에서도 인정받는 <캡틴 아메리카: 윈터 솔져>(2014)도 그런 맥락에서 등장했다. 시드니 폴락 감독의 정치 스릴러 <코드 네임 콘돌>(1975)에서 내부 비리를 폭로하는 CIA 요원 조셉 터너를 연기했던 로버트 레드퍼드에게 쉴드의 알렉산더 피어스 국장을 맡기면서부터 영화의 장르적 방향은 결정됐다. <어벤져스: 에이지 오브 울트론>(2014)이 다루고 있는 소코비아 협정은 비록 가상의 이슈지만 큰 힘에 따르는 큰 책임감에 대한 정치적 이슈로 해석될 수 있었다. 이후 이 문제로 첨예하게 대립하는 <캡틴 아메리카: 시빌 워>(2015)에서의 아이언맨과 캡틴 아메리카의 갈등은 결국 <어벤져스: 엔드게임>의 엔딩, 그러니까 MCU의 지난 11년의 마지막을 정리하는 가장 중요한 이슈다. 이 흐름을 잊고 보면 <어벤져스: 엔드게임>에서 힘겹게 지구로 귀환한 아이언맨이 대뜸 캡틴 아메리카에게 불쾌감을 표현하는 이유가 전혀 납득되지 않을 것이고, 소중한 것을 지키고자 마지막 반격에 주저하던 토니 스타크의 고민이 마음에 와닿지 못했을 것이다. 우리의 안전을 위해 누군가는 나서야 할 텐데 그들은 무엇을 해야 하며 과연 어디까지 선을 지켜야 할까. 사실 이번 영화는 양자 영역을 통한 시간여행의 개념은 대체 무엇인지, 시간을 거슬러 인피니티 스톤을 되찾아오려는 노력은 왜 미래에 아무런 영향을 끼치지 않는 것인지, 하다 못해 건틀렛을 스냅하는 순간에 딴생각을 하게 되면 어떤 참사가 벌어질지와 같은 영화와 아무 상관없는 상상으로 에너지를 쏟게 만드는 마력이 분명히 있다. 그럼에도 이런 매력적인 이스터에 그를 뛰어넘는 이 영화의 주제는 문제 많은 남자들이 자신의 실수를 뉘우치고 어벤져스를 결성한 다음에도 점점 더 커져가는 또 다른 문제를 계속해서 수습해나가는 과정에 담겨 있었던 것 같다. 슈퍼히어로를 필요로 할 수밖에 없었던 사회 시스템의 복구를 지적하는 문제의식과 슈퍼히어로로서 살아갈 자격이 있는지 스스로 되묻는 과정을 다룬 성장담. <어벤져스: 엔드게임>의 마지막 순간에 캡틴 아메리카가 스스로 선택한 <백 투 더 퓨처>적 스타일의 은퇴의 감동은 어벤져스 멤버들이 11년간 짊어지고 있었던 책임감에서 비롯된다는 것을 새삼스레 되짚어볼 수 있었다.
‘부다페스트 사건’의 전말은 언제?
하지만 그 고민의 주체가 지난 11년 동안 대부분 백인 남성 위주로 이뤄졌다는 사실도 잊지 말아야겠다. MCU가 보여준 명백한 한계는 어벤져스 원년 멤버 중 유일한 여성 히어로였던 블랙 위도우(스칼렛 요한슨)를 백인 남성 히어로들의 회한의 도구로 삼아버렸다는 점이다. 너무 늦게 혹은 시의적절하게 도착한 <캡틴 마블>의 캐럴 댄버스(브리 라슨) 덕분에 타노스의 만행을 바로잡을 수 있었듯, 그렇기에 앞으로의 마블 스튜디오가 지니고 있을 전략 내지는 주제가 무엇일지 예의 주시하며 기다릴 필요가 있다.
마블 스튜디오는 현재, <블랙팬서>(2018), <닥터 스트레인지>(2015),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2014)의 새로운 속편을 예고했고 블랙 위도우의 단독 주연작 제작도 발표한 상태. 아마도 모두가 궁금해하는 ‘부다페스트 사건’의 전말이 공개되지 않을까 예상해본다. 클로이 자오 감독이 연출할 <이터널>, 데스틴 대니얼 크레턴 감독이 연출할 MCU의 첫 번째 아시안 슈퍼히어로 상치에 관한 단독 영화도 준비 중이고, 케빈 파이기는 마블의 첫 10대 모슬렘 슈퍼히어로인 카말라 칸을 중심으로 한 영화가 제작될 거라고 공식적으로 언급한 바 있다. 디즈니의 폭스 인수로 인해 향후 <엑스맨> 시리즈나 <판타스틱4> 시리즈의 부활 내지는 크로스오버 이벤트도 조심스럽게 예견할 수 있다. 지금까지의 발표만 보더라도 마블 스튜디오가 어떤 변화를 꾀하고 있는지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어딘가 모르게 부족하기만 했던 사람들이 우주의 기원과도 같은 힘을 지닌 인피니티 스톤의 힘을 빌려 세상을 지키는 데 소중한 힘을 쓰는 과정을 지켜보면서 용기를 얻을 수 있었다면, 이제는 지금까지 그 감동의 주체에서 배제되어 있었던 사람들 모두를 살펴볼 차례다. 아이언맨과 캡틴 아메리카가 대표로 나서서 경험했던 그 소중함은 특정한 누구의 것도 아닌 우리 모두의 것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