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집 <가만한 나날>에 수록된 해설집(신샛별 문학평론가가 썼다) 제목은 ‘우리의 모든 처음들’이다. 처음은 설렘만 동반하는 게 아님을, 모든 낯섦과 불편함에 우리가 얼마나 떨었고 무방비했는지 당시의 감정들이 고스란히 기록되어 있다. 별일 없어 보이는 일상의 감정은 내내 파문을 일으키고, 그것들이 우리와 사회를 연결하고 있음을 써내려가는 김세희 작가를 만났다.
-2015년에 등단하고, 4년 만에 첫 소설집이 나왔다. ‘책이 나오고 비로소 작가가 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했는데, 이유가 궁금하다.
=신인 작가는 등단 후에 청탁을 받아야 문예지에 작품을 발표할 수 있는데, 그 기회가 적고 문예지는 대중의 접근성도 떨어져 독자들의 감상을 접하기 어렵다. 책을 내고 확실히 느낀 게 한권의 책으로 묶여야 소설이 더 많은 독자를 만날 수 있다는 거였다. 인터넷에서 독자들의 감상평 같은 걸 읽고 혼자 감동도 하면서 ‘책이 나오니까 드디어 작가가 되었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가만한 나날>은 세대론과 사회 초년생의 이야기라는 점으로 더 화제가 됐다. 작가 자신은 쓰면서 ‘내가 청년세대의 이야기를 소설로 쓴다’는 자각은 없었을 것 같다.
=<가만한 나날>은 감사하게도 N포세대의 이야기라는 이유로 신문기사에 많이 소개되었다. 그런데 N포세대라는 게 프레임으로 작용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했다. 한 기자분과 전화 인터뷰를 했는데, “N포세대의 소설을 쓴 작가의 다음 작품이 궁금해졌다”고 하셔서 “저는 요즘 육아가 일상에서 크게 자리하니까 그런 소재도 나올 것 같다”고 했더니 기자님이 놀라셨다. “N포세대 이야기를 쓰셨지만 결혼하고 출산도 하셨네요”라고 하시더라. 나쁜 의도가 아니라 순수하게 놀라서 하신 말이었다. 젊은 사람들도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기도 하는데 이게 다른 세대에는 모순으로 다가오는구나. 세대론이 사고를 가두고 그 사이에서 삶의 많은 것들이 삭제돼버리는 것 같았다.
-세대론으로도 읽히지만 직장 생활을 막 시작한 ‘처음’의 이야기로 읽혔다.
=직장 생활을 지금 막 시작한 ‘사회 초년생들이 등장하는 작품’으로 해석이 많이 되었는데 쓸 때에는 내가 ‘일’에 대해 쓴다는 자각이 전혀 없었다. 일터에서 사람들이 갖는 생각이나 감정들을 문학에서 많이 다루지 않았던 것 같다. 우리가 흔히 사람에게 영향을 크게 미친다고 하는 환경이 가정, 부모, 연인이나 친구인데 첫 직장에서 어떤 사람들과 일하느냐도 그 사람의 마음에 큰 영향을 미친다. 생애 처음으로 듣는 자기에 대한 냉혹한 평가를 첫 직장에서 듣기도 한다. 직장을 다니면서 느낀 그런 감정들이 나에게 인상 깊게 남았던 것 같다.
-읽으면서, 감정이든 상황이든 간결하게 설명하고 문장에 군더더기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름다운 문장을 만들려는 억지스러움이 없더라. 문장을 다듬는 과정이 길었을 것 같다.
=아름다운 표현을 믿지 않는 편인 것 같다. (웃음) 소설을 쓸 때 최대한 진실에 가깝게 쓰고 싶다고 생각한다. 세상에 아름다움이나 추함만 있는 것도 아니고 그 사이에 나쁜 것도 있고 좋은 것도 있지 않나. 삶의 실상에서 거리가 멀어지는 문장은 거부감이 든다. 소설을 쓰는 게 문장을 다듬는 과정 그 자체인 것 같다. 인물을 간결하게 묘사해야 읽는 입장에서 상상을 더 할 수 있고, 내가 독자에게 정확하게 떠올려주기 위해 자세히 묘사하는 것도 쓰는 사람의 욕심이구나 싶다. 그런 설명을 자제하려고 노력한다.
-수록된 단편 <드림팀>의 임은정 팀장은 자신이 사회에서 당한 불합리한 것들을 선화에게도 전달하며 자존감을 빼앗는데, 피해자이면서도 곧 가해자이다. 소설집에 직장 생활을 막 시작한 여성들이 사회에서 들을 법한 잔혹한 발언들이 자주 등장한다. 또 다른 단편 <감정연습>의 상미가 첫 출근해서 대표에게 들은 말도 ‘당신은 B급이라 뽑았다’는 식의 은유적 표현이었다.
=상대는 나쁜 의도로 하는 말이 아니고 ‘너를 위해서’라며 보호 차원에서 하는 말임에도 그게 각인되어 여성들의 발목을 묶는다. 아이가 이제 겨우 14개월인데 어린이집 선생님이 선의로 “금순이(아명)는 예쁜 원피스 없나요? 오늘 사진 찍는데 다른 친구들은 예쁜 원피스 입었는데 금순이만 고시생처럼 입고 와서 안타깝다”고 하시는 거다. 근데 그날 입힌 게 정말 귀여운 브랜드 추리닝이었다. (웃음) 아이가 안타까웠는지 선생님이 옆자리 아이 머리띠를 빌려서 사진을 찍어주셨더라. 어린아이도 그럴 정도인데 자라면서, 사회에 나가서 그런 말을 더 많이 듣게 된다. 그럴 때마다 어떻게 하면 좋을지 고민이 된다.
-여성 창작자가 포기하지 않고 계속 자기 작업을 해나가기 위해 중요한 게 무엇이라고 생각하나.
=뻔뻔함인 것 같다. 창작자가 데뷔를 하면 많은 피드백을 받게 된다. 평가에 상처받지 말아야 하는 것 같다. <7년의 밤> 추천사 중 “여성 작가들이 흔히 빠지기 쉬운 여러 문학적 함정들을 너끈히 뛰어넘고 있었”다는 대목이 기억난다. 여성 작가를 따로 분리하고 여성이 서사에 큰 줄기가 없는 소설을 쓰면 그게 약점이자 특성처럼 얘기된 적도 있었다. 나도 예전에는 ‘이게 소설이 될까’ 하고 생각했던 이야기들이 있었는데, 지금은 무엇이든 내 글쓰기의 과정에 있다는 생각을 한다.
-‘첫 출근의 감정’이 소설 속에 등장한 게 오히려 신선했다. <그건 정말로 슬픈 일일 거야>의 연승에 대한 묘사도 그렇다. “왜 끊임없이 분위기를 띄우려 하고, 다른 사람들이 웃는 모습을 보며 안심하는 걸까.” 이 문장에 공감하는 독자가 많더라.
=예전엔 첫 출근 전날의 기분이나 상사와의 갈등에서 느낀 감정, 이런 것들이 단편소설의 소재로 적절치 않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왜 이런 일상적인 게 소설이 되면 안 되는 걸까 싶다. 직장에서 겪는 미묘한 감정들이 사회문제와도 결부되어 있고 그런 것들도 소설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게 된 지 얼마 안 됐다. 지금은 그런 것들을 적극적으로 쓰고 싶다. 나에게 너무 중요한 문제였는데 막상 소설에서 잘 만나지 못했던 경험들. <창작과비평>에서 새로 시작한 연재소설도 그런 내용을 담는다. 제목이 <좋아하는 일을 하고 있습니까>이다. 자기가 원하던 일을 직업으로 갖는 것에 성공했는데 회사 생활을 하면서 괴리감을 느끼는 초년생의 이야기다. 낙담하고 직장을 그만두는 방식이 아니라 계속 현장에 남아 그 일을 하는 사람도 훨씬 많은데 그런 사람들의 이야기를 쓰고 싶다.
● 내 인생의 영화_ 사실 ‘영알못’이다. (웃음) 내 인생의 ‘미드’는 있다. <그레이 아나토미>다. 너무 많은 인물과 이야기가 있는데 나에게 경이로운 시청 경험이었다. 특히 두 여자, 메레디스(엘렌 폼페오)와 크리스티나(샌드라 오)의 관계가 나에게는 여성 서사의 모델이다. 두 여자가 서로 영향을 받으며 성장하고 서로 다른 길을 가기 때문에 이해를 못하기도 하지만 궁극적으로 응원하면서 함께 커리어를 쌓아가는 과정이 인상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