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첫 국민참여재판 이야기를 담은 <배심원들>이 5월 15일 개봉했다. 우리나라에도 배심원 제도가 있었다니 흥미를 끄는 주제가 아닐 수 없다. 법정을 무대로 펼친 영화들의 묘미는 총과 칼 없이, 오로지 말로 벌이는 액션의 쾌감에 있다. 말과 말이 오고 가는 두뇌 싸움을 즐기는 관객들이라면 여기 소개할 다섯 편의 영화도 관람해보길 추천한다.
- 한정된 공간, 숨 막히는 토론 현장 -
12명의 성난 사람들
<배심원들>이 만들어지기 시작할 때부터, 한국에선 생소한 배심원 제도를 다룬다는 점에서 <12명의 성난 사람들>을 떠올린 사람이 한 둘이 아닐 것이다. 그만큼 법정 드라마의 장르에서 시드니 루멧의 <12명의 성난 사람들>이 차지하는 위치는 남다르다. 이 영화는 아버지를 살해한 혐의로 기소된 18세의 빈민가 소년에 대한 일급 살인죄에 대해 토론을 벌이는 12명의 사람들에 관한 이야기다. 각계각층의 보통 사람들이 모여 금세 유죄로 절대적인 지지가 모인다. 하지만 유일하게 합리적인 의문을 제기하는 8번 배심원. 그의 의견에 따라 배심원들의 입장은 다른 흐름으로 나아간다. 한정된 공간에서 펼쳐지는 말의 스릴을 느낄 수 있는 작품.
- 소설 <앵무새 죽이기>의 영화 버전 -
알라바마 이야기
제목이 생소할 수 있지만 동명 소설을 기반으로 한 원제 <앵무새 죽이기>를 떠올리면 한결 익숙하다. <알라바마 이야기>는 성인이 된 딸의 회상을 통해 전해지는 변호사 아버지 애디커스(그레고리 펙)의 일화로 전개된다. 1930년대, 백인우월주의가 만연했던 미국 사회는 많은 범죄 현장에서 흑인에 차별적인 시선을 가해 왔다. 영화는 성추행 혐의로 공소된 흑인 톰(브록 피터스)의 변호를 맡은 애디커스의 열정적인 변론 과정을 그린다. 실은 톰을 유혹하다 아버지에게 들킨 여성의 거짓말이지만 사람들은 진실과는 무관한 결정을 쉽게 내린다. 물론 거의 90년이나 흐른 현재에도 이 차별은 완벽히 해소되지 못했다. 그렇기에 <알라바마 이야기>의 메시지는 여전히 유효하다. 변호인이 아닌 딸의 시점을 택한 이 영화는 탁월한 법정 드라마의 스토리뿐만 아니라 6살 아이가 가졌던 편견과 오해를 함께 보여주며 성장영화로서의 기능도 갖추고 있다.
- 천재 각본가 애런 소킨의 데뷔작 -
어 퓨 굿 맨
TV 시리즈 <웨스트 윙>, <뉴스룸>과 영화 <머니볼>, <소셜 네트워크> 등 애런 소킨의 각본은 감독 그 이상의 존재감을 발휘했다. 빈틈없이 날카로운 대사들이 빼곡한 까닭에 그의 시나리오는 말의 전쟁을 방불케 했다. 애런 소킨의 첫 시나리오는 해군 법무감에 근무한 그의 여동생이 겪은 이야기에서 착안한 <어 퓨 굿 맨>. 해군기지에 사병 한 명이 사망한 사건이 발생하고, 군 법정 공방을 통해 점차 죽음 이면의 진실이 드러나게 되는 이야기다. 군 내에서 자행된 폭행과 은폐를 통해 조직문화의 양면성을 고발하는 한편, 아버지의 그늘이라는 컴플렉스에서 해방되어가는 주인공의 성장 서사까지 촘촘한 짜임새를 자랑한다. 잭 니콜슨이 분한 제셉 대령의 "넌 진실을 감당할 수 없어!"라는 대사가 유명하다.
- 에드워드 노튼의 다중인격 연기 -
프라이멀 피어
반전에 매혹을 느끼는 관객들의 구미를 당기는 <프라이멀 피어>. 뒤통수를 때리는 영화의 스토리도 재미를 주지만 이 영화의 관전 포인트는 에드워드 노튼의 실감 나는 연기에 있다. 존경받는 가톨릭 대주교가 피살된 사건이 벌어졌다. 치명적인 스포일러를 겉돌아 말하지만, 19살 애런(에드워드 노튼)은 사건의 범인이다. 하지만 그가 주장하는 결백을 무보수로 변호하던 변호사 베일(리처드 기어)이 그에게 또 다른 자아가 잠식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채고 이야기는 다른 국면을 맞이한다. <프라이멀 피어>는 정신 질환을 가진 범죄자를 쉽게 단죄하지 못하는 현실의 맹점을 파고들어 질문을 제기한다. 소심한 말더듬이의 애런이 되었다가, 거칠고 교활한 로이가 수시로 튀어나오는 에드워드 노튼의 다중인격 연기는 놀랍게도 그의 첫 스크린 데뷔였다. 애초에 이 배역은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가 맡을 뻔했으나, 에드워드 노튼은 <프라이멀 피어>로 골든글로브 남우조연상을 수상하며 주목을 한 몸에 받았다.
- 언론 자유 수호의 충격적인 비화 -
래리 플린트
래리 플린트는 실제 미국 내 언론의 '표현의 자유'를 몇 단계 격상시킨 기념비적인 사건의 주인공이다. 하지만 재미있는 것은 그가 정의(正義)의 반대편에서 온 인물이라는 점이다. 성인 잡지 <플레이보이>의 아성을 위협할 신생 성인 잡지 <허슬러>를 창간한 그는 도덕 따위 안중에도 없는 무법천지의 사업가였다. 때문에 이슈를 위한 온갖 파격을 동원했고, <허슬러>의 선정성과 비방성은 날로 상상을 초월했다. 온 사회가 그를 향한 혐오로 들끓고 있을 때, 그는 자신의 명운을 뒤바꿀 변호인을 만난다. 실존 인물인 래리 플린트를 우디 해럴슨이, 변호인 알란 아이삭맨을 에드워드 노튼이 연기했다. 이 두 인물이 남긴 공로는 오늘날 언론이 공인을 향해 강도 높은 풍자를 하더라도 명예훼손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게 된 밑바탕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