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스토피아로부터]
착함이란 무엇인가
2019-06-19
글 : 권김현영 (여성학자)
일러스트레이션 : 다나 (일러스트레이션)

“사모님이 참 착해”라고 기택이 말하자, 충숙은 “부자니까 착한 거야”라고 답했다. 영화 <기생충>의 한 대사다. 이 대사가 나올 때 방금 본 영화의 기억을 더듬었어야 했다. 사모님은 순진하지도 착하지도 않았는데 이상하다? 사모님 연교는 오랜 시간 함께 일했던 박 집사를 내보낼 때도 운전하는 윤 기사를 해고할 때도 다음과 똑같이 말했다. “적당하고 조용한 이유를 대서 내보낼게요. 그게 경험상 좋아요.” 이미 몇번이나 ‘아랫사람’을 제대로 된 해고 사유 없이 내보낸 경험이 있지 않고서는 나올 수 없는 말이다. 진짜 해고 사유를 알려주었다가 골치깨나 썩어봤다는 얘기다. 아마 박 집사와 윤 기사가 해고당한 진짜 이유를 알았다면 그들은 물러나지 않았을 것이다. 자신이 한 일이 아니라고 항변하기 위해서라도 부당한 해고를 받아들일 수 없었을 테니까.

“떨어진 이유를 알려주실 수 있나요?” 대기업 인사과에서 일하다가 퇴직한 P는 이런 전화를 받는 게 너무 지겨웠다고 했다. 인사 담당자에게 탈락 사유를 정중하게 물어보면 좋은 인상을 줄 수 있다는 내용의 글이 사회생활 꿀팁!이라는 제목으로 올라온 다음, 탈락자들의 문의가 말 그대로 쇄도했다. 마침내 그는 폭발했다. “떨어진 이유를 모르니까 떨어지는 거 아닙니까!” 그 찰나의 성질을 참지 못한 대가는 혹독했다. 민원, 진정, 감사 등 회사 다니면서 결코 관여되지 말아야 할 단어들이 그를 옥죄었다. 그 소동을 겪고 난 이후 그는 흠잡을 데 없는 최적화된 답변을 만드는 데 골몰했고 그 답변을 손에 쥐고 최대한 기계적으로 응대했다. 가끔 절박한 구직자가 욕설을 퍼부을 때도 있었지만 무시하면 그만이었다. 비슷한 업무를 하는 다른 인사 담당자들은 오직 학교 직속 후배나 이용 가치가 있는 인맥을 가진 지인일 경우에만 떨어진 이유에 대한 제대로 된 조언과 응답을 해준다고 했다. “나만 괜히 인맥을 중심으로 정보가 유통되는 건 페어플레이가 아니라고 순진하게 생각했지. 진짜 나쁜 놈들은 결코 잡히지 않아. 어떤 게 문제가 될지 너무나 귀신같이 알거든.” 그는 손톱을 물어뜯고 다리를 떨면서 이렇게 말했다. 아는 사람끼리 알음알음 소개받아서만 들어갈 수 있는 세계에 질려서 다른 방법을 모색하던 그였지만, 모르는 사람들에게 받는 무책임한 기대에 부응하는 일이 얼마나 피곤한지도 모르는 바가 아니었다. 그걸 말해주려다 실패한 P는 새롭게 ‘무시하기’라는 기술을 익혔다. 그러다보니 왜 떨어졌는지 이유를 알 수 없는 구직 실패자와 왜 잘렸는지 정확한 설명을 들은 적 없는 해고 노동자들에게 해줄 말이 없어졌고 급기야는 계속 화가 난다고 했다. 그런데 왜 그만뒀어? “사람 무시하는 게 몸에 배더라고.” 그가 밝힌 퇴직 이유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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