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비평]
<기생충>의 세계에 담긴 회귀 혹은 후퇴한 현재와 유동하는 약자들
2019-06-27
글 : 송형국 (영화평론가)
무정한 레트로토피아의 가족

더이상 계급이란 없다. 신분만이 있을 뿐이다. 계급은 상승할 수 있다. 신분은 세습된다. 시험이라는 계급 사다리에서조차 가로막대가 사라지고 있다. 조건 좋은 월세방이 나오면 가난한 자들끼리 앞을 다퉈야 한다. 열심히 일해온 직장에서 쫓겨나도 해고 사유는 매끄러운 한 문장만 통보받는다. 뭘 잘못했는지는 알려주지 않는다. 알 수 있는 건 해고자 명단에 들 경우 어떤 신세가 되는지다. 연대해 저항하면 도매금으로 묶여 해고될 뿐이다. 힘을 합쳐 싸울 파놉티콘이 눈에 보이던 시절이 있었다. 디지털과 금융자본이 대표하는 현대 권력은 어디에나 있고 어디에도 없다. 글로벌 가치사슬 중 어느 고리가 나에게 영향을 미치는지 파악하기란 불가능하다. 연대할 수 있는 건 가족뿐이다. 개인은 위험을 피하기 위해 시스템 밖으로 스스로를 추방한다…. 이상은 <기생충> 이야기를 쓴 게 아니다. 지그문트 바우만의 유작 <레트로토피아>(Retrotopia)를 한국적으로 해제해본 것이다. 그에 따르면 현대 질서는 타협할 수 없을 정도로 회귀(retro) 혹은 후퇴한 ‘레트로토피아’다. 예술가의 직관과 동시대 석학의 통찰은 이렇게 만나곤 한다. <기생충>의 세계는, 물난리가 난 뒤 쏟아지는 햇살만큼이나 무정한 레트로토피아다.

기택(송강호) 가족과 그들의 처지를 소개하는(사람보다 꼽등이에게 적합한, 방보다 변기가 높은, 그런데도 햇볕보다 와이파이로부터의 소외가 더 중한) 첫 시퀀스가 지나면, 향후 이 가족의 취업 전략을 예고하는 ‘피자시대’ 점주 대목이 나온다. 점주는 피자 박스 접이가 25% 불량하다며 “페널티 10%”를 임의로 정한다. 반말과 존댓말, 외래어의 3개 언어를 리드미컬하게 혼용하는 점주는 한국 사회의 중요한 계층 지표인 나이와 고용관계가 뒤섞인 인물이다(이후 3개 언어를 혼용하는 여성 캐릭터들의 관계 또한 흥미롭다). 이 젊은 소자본가의 즉흥적인 규칙에 기우(최우식)와 기정(박소담) 남매는 적극적으로 순응한다. 기존 아르바이트생에게 “해고 페널티”를 줄 것을 제안해 빈자리를 차지하려는 전략은, 약자끼리 투쟁하는 이 영화의 전제다. 점주를 “누나”라고 부르는 화면 뒤편의 청년 또한 허약한 가족연대의 구성원일 터다. 이때 화면은 점주를 중앙에 두고 기우와 기정, 충숙(장혜진)이 차례로 프레임인하는 정면 숏이다. <살인의 추억>(2003)에서 교체된 서장(송재호)을 중앙에 두고 “서류는 거짓말 안 하거든”이라는 태윤(김상경)과 두만(송강호), 용구(김뢰하)가 잇따라 프레임인하는 장면과 같은 구도다. <살인의 추억>의 해당 장면이 인물 사이의 헤게모니 이동을 구현했다면, <기생충>의 이 도입부는 백수 처지로부터 이동을 꾀하는 주인공 가족의 욕망을 소개한다. 가맹점 사업에 크게 실패한 적 있는 기택은, 젊은 점주가 흘리고 있을 내면의 진땀을 반지하 창문 뒤에서 방관한다. 그들은 “추방당하지 않기 위해 남들을 추방하려고 애쓴다.”(지그문트 바우만, 앞의 책).

순응의 달인; 유동하는 약자들

<살인의 추억>에서 ‘거짓말 안 하는 서류’는 근대를 상징하는 기차에 의해 산산조각난 바 있다. 근대과학의 힘으로 20세기를 제패한 미국은 <괴물>(2006)에서 철저히 부정됐다. 근대로부터의 탈출을 제안한 <설국열차>(2013)에서 정교한 통제 아래 있던 기차는 폭파됐다. 계획이자 규칙이기도 한 서류(연세대 재학증명서와 회원제 직업알선업체 ‘더 케어’ 명함)는 손쉽게 위조되고 조롱당한다. 이 영화 최다 빈출 어휘인 “계획”이 뜻대로 이뤄졌다면 “기세 좋게 치고나가는” 기차가 될 수 있었겠으나, 원인과 결과는 불현듯 틈입한 다른 힘에 의해 ‘삑사리’ 난다. 바우만이 말한 유동적 현대성(Liquid Modernity)에서, “그러니까 사람은 계획이 없어야” 된다. 송강호 배우가 여러 인터뷰에서 연체동물에 비유한 이번 연기는, 유동적 현대에서 약자가 취하는 불가피한 태도다(압력밥솥처럼 툭 터뜨리는 액션이 주를 이뤘던 <살인의 추억>에서 그의 연기와 대조해보라). 기택은 유튜브 영상을 보고 상자 접기를 순식간에 따라한다. 벤츠 매장에서 차량 기능을 금세 익혀 “코너링이 훌륭”한 운전을 해낸다. 거실 테이블 밑에 숨어 있다 몰래 빠져나갈 때 그의 움직임은, 주변 환경에 맞춰 자신을 보호하는 벌레 같다. 살림의 달인인 충숙은 절체절명의 와중에 채끝살 곁들인 짜파구리를 해내는데, 애초에 먹을 생각이 없던 연교(조여정)가 그릇을 뚝딱 비울 만큼 맛있다. 약자의 애티튜드를 물려받은 기우는 “침팬지를 그린 것”인 줄 알았던 다송이(정현준)의 “자화상” 앞에서 느물느물 태도를 바꾼다. 여러 요소를 절묘하게 조합하는 기정의 타고난 능력은 사문서 위조뿐 아니라 인터넷 지식을 가져다 엮을 때도 빛을 발한다. 이 세계에서 규칙은, 피자시대 점주의 페널티처럼, 문광(이정은)은 가족이 아니니 기정의 수업에 매실청 음료를 들고 들어가도 된다는 식으로 코걸이이기도 하고 귀걸이이기도 하다. 세계가 이처럼 유동적일 때 고통은 누구 몫일까. 힘 있는 자는 자신의 모습을 유지할 수 있지만 없는 자는 끊임없이 변신해야 생존한다. 적응의 달인이 아니면 살 수 없다. 그렇게 정체성을 잃은 자는 타자조차 되지 못한 채 보이지 않는 유령이 되거나 지하세계를 떠돈다.

17세기 바로크로의 회귀

근대를 부정한 뒤 전근대로 회귀한 현대로서 <기생충>의 세계는 적잖이 바로크풍이다. 발터 베냐민이 주목한 17세기 독일 비애극(Trauerspiels)이 그렇듯, 하나의 거대한 비극 안에는 국지적인 희극이 도사린다. “비애극은 유희적 형태로 자신 속에 희극의 특징이 울리게 함으로써 높은 지위에 오르고, 이를 위해 희극적인 음모꾼을 등장시킨다”(발터 베냐민, <독일 비애극의 원천>). 베냐민식으로 말하자면 진리는 인위적인 접착제(상징성)로 결합되지 않는다. 파편으로서 알레고리들이 각각의 힘으로 작용하다 예기치 않은 순간 희비극을 만들어낸다. 베냐민은 이쪽이 진리에 가깝다고 봤다. 바우만이 ‘유동’(liquid)으로 파악한 질서가 이와 같다. 17세기 홉스가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을 말한 이래, “우리는 실제로 홉스가 주장한 세계로 돌아왔고 아니면 적어도 그 세계로 돌아가는 중이다”.(지그문트 바우만, 앞의 책). 만인이 투쟁하는 시대로 회귀한 <기생충>의 세계에서 현악기 스코어가 강렬한 점 또한 우연이 아니다(박찬욱 감독의 작품이 떠오른다는 일부 인상비평이 있는데, 현악기의 뉘앙스 영향이 큰 것 같다). 정재일 음악감독이 17세기 바로크 음악을 본뜬 것이라고 고백한 스코어들은 원초적이면서 회귀적인, 따라서 유동하는 현대에 어울리는 소리를 추구한 것으로 보인다. 음계, 즉 소리를 계단으로 표현하는 건반악기와 달리 현악기는 음계 사이에서 유동적으로 소리낼 수 있다. 많은 현대 음악가들이 현에 골몰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 대표적인 스코어가 ‘서류’가 아닌 ‘믿음의 벨트’의 연쇄작용이 일어나는 장면에서, 그리고 살림의 달인이 ‘짜파구리’를 요리하는 장면에서 당당하게 울려퍼지는 건 그래서 상징적이다.

윤 기사와 문광은 해고의 실체를 모른 채 쫓겨난다. 박 사장(이선균) 부부는 인터넷에 소문이라도 나지 않을지 우려해 ‘품위 있는’ 해고 사유를 둘러댔다. 기택 가족의 작전은 그 덕에 해고자들에게 들통나지 않는다. 윤 기사가 해고되기까지 어떤 힘이 작용했을까. 새로 온 미술 선생에게 추근댔기 때문일까? 운전 중 차창 밖에서 벌어진 다툼에 한눈판 탓인가? 하필이면 그날 퇴근이 기정의 귀가 시간과 맞아떨어진 탓일까? 어쩌면 대만 카스테라 사업을 망하게 만든 소비자 고발 프로그램과, 여기에 과잉 반응한 소비자들의 합심으로 인해 기택이 백수가 된 이유일까? 스펙보다 ‘알음알음’에 의지하는 연교의 ‘믿음’은? 차 안에 떨어진 팬티 때문이라는 사유를 듣기라도 했다면 해명할 기회라도 있었겠지만 윤 기사에게 그럴 틈은 원천 봉쇄됐다. 젊은 윤 기사는 이제 다른 젊은이와 한정된 일자리를 놓고 투쟁할 것이다. 이게 다 인터넷 때문일까?(박 사장은 글로벌 IT 기업을 경영하며 가상현실 기기를 개발하고 있다). 이 세계가 과잉연결된 나머지 소통의 기회는 사라지고 자신에게 닥친 결과가 어디서부터 비롯된 것인지 알 도리란 없다고 말한 영화는 여럿이다. <기생충>에 황금종려상을 호명한 알레한드로 곤살레스 이냐리투 감독의 <바벨>(2006) 역시 그렇다. 어디선가 날아온 총탄은 양치기 소년들의 장난이었고, 문제의 총기는 현지 여행 가이드를 거쳐 일본인 관광객으로부터 전해진 것이지만 인물들은 혼돈의 사슬 속에서 억울할 뿐 원인과 결과를 알 수 없다.

위험가족의 가혹한 연대

문광이 당혹스럽게 해고당한 뒤 대문 밖으로 쫓겨났을 때 클로즈업된 그의 얼굴엔 억울함보다 근심이 더 많았다. 그 이유를 우리는 한참 뒤에 알게 된다. 여기서 등장하는 문광 남편(박명훈)의 이름이 ‘근세’라는 점은 당황스러울 만큼 직설적이다. 그는 자발적 위험회피 수단으로 시스템 밖의 삶을 선택했다. “(근대국가에 있었던) 계급제도 밖의 계급으로, 계급으로 나뉜 사회 밖에 존재하는 ‘밑바닥계급’의 형태로 환생한 모양새다.”(지그문트 바우만, 앞의 책). 근세(近世)적인 근세의 시공간은 계급 상승을 욕망하는 사법시험 교재와 아날로그 통신 수단인 모스부호로 이뤄져 있다. 그것들이 통용되는 시대는 이미 지나버렸고, 머리를 짓찧는 방법 외에 그가 커뮤니케이션할 도리는 없다. 소통할 길 없는 그는 박 사장 집안의 승계자임이 분명한 아들 다송이에게 자신을 ‘보인다’. 초등학교 1학년 생일 밤 다송이는 근세를 봤다기보다, 근세에 의해 ‘보임’을 당했다고 하는 편이 정확할 것이다. 김영진 평론가가 ‘보이지 않는 존재’에 대해 명료히 짚었듯(<씨네21> 1210호), 보이면 안 되는 존재가 자신을 보임으로써 “돈이 다리미”인 부잣집 아이의 뇌에 지우지 못할 구김살을 새겨넣었다. 종반부 난장판의 와중에 근세는 다송이에게 자신의 모습을 재차 보인다. 극영화의 금기라 할 수 있는, 봉준호 감독이 간혹 사용하는 ‘렌즈 보기’, 즉 ‘관객 노려보기’를 근세는 두 차례에 걸쳐 감행하는데, 이는 영화적 행위 자체로서 보(이)는 행위를 위한 캐릭터임을 방증하기도 한다. 임상수 감독의 <하녀>(2010)에서 하녀(전도연)가 주인집 딸에게 최대한 끔찍한 모습을 ‘보이고’ 산화한 결말은 더욱 극단적인 사례로 더불어 논할 장면이다. 유령 같던 존재가 행한 잔혹한 형태의 현현(顯現)이, 주인집 식구 가운데 가장 약한 고리이자 미래의 상속자를 향한 행위였다는 점은 21세기 신분 사회에서 더 의미심장해진다. 물론 보여서는 안 될 존재가 모습을 드러낸 이후 공통적으로 맞이하는 최후는 죽음뿐이다. CCTV 전선은 끊겨야 한다.

배타적인 가족연대의 장(場)으로서 <기생충>의 세계는 우리 현실을 한층 건조하게 제시한다. 기우가 과외수업 제자인 다혜(정지소)와의 관계를 털어놓자 부모는 흔쾌하다. 순간적으로 시어머니 위치가 된 충숙은 “나는 걔 괜찮더라”며 선뜻 받아들인다. 문광은 충숙에게 “불우이웃끼리 이러지 말자”며 손 내밀지만, 다른 가족과의 연대 혹은 결합이 가당치도 않다는 현실은 오래지 않아 드러난다. 해고의 진실을 뒤늦게 안 문광에게 “언니”였던 충숙은 “쌍년”으로 급변한다. 애초에 연대란 없었다. 문광은 기택 가족을 무릎 꿇려놓고 “일가족 사기단” 4명 모두를 일일이 호명하며 레트로토피아 속 가족연대를 강조한다. 물난리 속 도움을 구하는 반지하 이웃의 외침을 돌아볼 겨를은 기택에게 존재하지 않는다. 이 시대에 연대가 가능한 건 식구들뿐이라는 점을 통찰한 서울대 사회학과 장경섭 교수는 <내일의 종언?>에서 이렇게 쓰고 있다. “한국인들의 가족은 ‘위험가족’으로서의 성격이 지속적으로 강화되고 있다고 하겠다. 가족주의적 개인화는 일종의 ‘위험회피적 개인화’라고도 규정할 수 있다. 한국인들의 위험회피적 개인화는 달리 말하면 사회재생산으로부터의 집단적 이탈이 전개되어왔음을 의미한다.” 치열한 투쟁에서 튕겨나온 가족은 지난해 칸국제영화제 황금종려상 수상작 <어느 가족>에도 등장한 적 있다. 기택 가족은 일시적으로 “전원 취업”해 “매달 그(박 사장) 집에서 우리 집으로 넘어오는 돈이 장난 아니”지만, 사회재생산으로부터 이탈해 박 사장 수입의 일부를 세금 없는 현금으로 받아 연명할 뿐이다(충숙의 월급이 ‘더 케어’로 이체된다면 수수료는 기정이 챙길 터다). 기택이 이 대사를 하기 무섭게 창밖으로 노상방뇨 사내가 등장한다. 이를 응징하려던 ‘물벼락 삑사리’를 기우가 뒤집어쓰면서 곧 이을 ‘가족연대의 삑사리’를 예고한다. 이 장면 직후에 다송이가 올려다보는 따사로운 햇볕이 따라오는 건 필연에 가깝다. 시스템 밖으로 떨궈진 이들을 떠올리며 다시 바우만으로 돌아와보자. 현대 문명의 일각에 여전한 공격성에 관해 그는 “견딜 수 없는 창피함과 굴욕감, 또는 사회에서 배제된다는 공포에 의해 공격성이 생겨난다”며 “공포는 일반적인 ‘감정’이 아니라 유동하는 현대의 생활경험에 근거를 둔 우리 시대의 엄연한 ‘사실’”이라고 썼다. 문제는 내가 해고당한 이유가 미국 대통령 때문인지, 베트남 노동자 탓인지, 아니면 스마트 공장의 센서 때문인지 우리는 알 수 없다는 점이다. 공격성은 발현되지만 공격의 대상을 특정하지 못한다. 바우만은 그래서 “불가지(不可知)의 부작용”으로 공격이 일어나며, “(공격자는) 실질적 책임이 있는 구체적 목표에 도달할 수 없다”고 했다. 누차 언급했듯 현대의 진리란 파편적이며 유동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기생충>의 결말에 혹 의아함을 느끼는 관객이 있다면 <레트로토피아>의 4장 ‘자궁으로의 회귀’ 편을 권하고 싶다. 위험회피의 종착지로서 눈에 띄지 않는 근세-기택의 지하세계는 “아예 여기서 태어난 것 같기도 하고 결혼도 여기서 한 것 같고, 그래서 말인데 나 여기서 계속 살게 해주쇼”라 애원하게 만드는 자궁이다.

자궁으로의 회귀

<기생충>은 그러니까 희망이 없다고 말하는 게 아니라 희망을 말하지 않는 영화다. 희망이란 없다고 느끼는 감정이 아니라, 없는 희망은 말하지 않겠다는 결연한 자세다. <기생충>의 세계는 감정 또는 당위를 찾으려는 숱한 욕망 속에서 엄연한 사실만을 제시하는, 그래서 철저하게 통제된 세상이다. 당위가 아닌 사실을 보자는 태도는 레트로토피아의 신분사회에서 우리가 타인에게 취할 예의의 한 자락이기도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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