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1992년 3월,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들을 수소문하던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이하 정대협) 윤미향 간사는 우연히 지역 신문에서 부산 다대포 근처에 살고 있다는 한 할머니의 소식을 접했다. 이름도, 나이도 알려지지 않은 할머니의 존재는 그의 마음을 끌었다. 연락처를 수소문해 어렵게 연결된 할머니는 무서운 목소리로 ‘내 전화번호를 어떻게 알았냐’고 다그쳤다. 하지만 할머니는 전화를 끊지 않았고, 통화 말미에 자신을 찾아오라고 말했다. 다음날 찾아간 다대포 근처 할머니의 거처에는 담배 연기가 자욱했다. “(위안부 피해를)신고한 할매들은 주로 어디 사는 할매들이고?” 할머니의 첫 질문이었다. 그날, 할머니는 군복 제조 공장에 취업시켜주겠다는 말을 믿었다가 중국 광둥으로 끌려가 일본군의 성노예가 된 자신의 한 많은 과거를 들려주었다. 처음 찾아갔을 때 잔뜩 상대방을 경계하던 할머니가 증언을 마친 뒤 한결 후련해하는 느낌을 받았다고 윤미향 정의연 대표는 말했다.
당시 정대협에서는 1992년 8월에 열릴 제1차 아시아연대회의를 준비하고 있었다.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 대한 진상규명과 배상 등을 논의하기 위해 한국·대만·필리핀·북한·중국·인도네시아·동티모르 등 피해국의 지원 단체와 피해자 등이 연대하는 자리였다. 부산 다대포 출신, 익명의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로 존재했던 할머니는 이곳에서 자신의 본명인 ‘김복동’ 대신 ‘김복자’라는 이름으로 일본군의 만행을 고발했다. “형제들은 자식을 다 잘 낳는데, 나는 왜 못 낳는지 검사하려는데…. 나는 안단 말입니다.”암전된 화면 속에서 흐느끼는 김복동 할머니의 목소리는 피해 사실을 증언하는 여성들이 과거의 기억을 떠올릴 때마다 짊어져야 했을 고통을 짐작게 한다.
아시아에 울려퍼진 김복동의 목소리는 생각보다 훨씬 더 강력했다(윤미향 대표는 김복동 할머니가 회의에 참석한 다른 피해자들 가운데서도 가장 또렷하고, 구체적이며, 논리정연하게 피해 사실을 증언했다고 소회했다). 제1차 아시아연대회의 이후 대만·필리핀·인도네시아·동티모르 등 세계 각지의 피해 여성들이 마음속에만 담아왔던 이야기들을 고백했다. 이들의 목소리는 그동안 은폐돼왔던 일본군 ‘위안부’ 피해 문제를 전세계적인 인권 문제로 주목받게 했다. 또 오랜 시간 스스로를 드러내기 꺼려했던 한국의 피해자들도 주한 일본대사관 앞에 모여 행동하기 시작했다. “아시아 피해국 여성들이 일본의 만행을 세상에 알리는 운동을 시작할 때, 한국 여성들에게 동기를 부여한 건 아시아연대회의에서의 김복동 할머니의 증언이 계기가 됐다고 생각한다”고 윤미향 대표는 말했다.
하지만 인권운동가로서의 김복동이 탄생하기까지는 시간이 필요했다. 1995년 민간 모금 형식의 아시아평화국민기금을 설립해 ‘위안부’ 문제의 법적 책임 주체를 모호하게 만들려는 일본 정부의 꼼수에 실망과 분노, 무기력감을 느꼈기 때문일 것으로 김복동의 주변인들은 짐작한다. 1998년, 모든 활동을 접고 다시 부산 다대포로 돌아간 김복동은 그러나 2010년 신변을 정리하고 완전히 서울로 올라온다. “도대체 무슨 마음을 먹고 서울행을 택하셨는지 내내 궁금했다. 그러다 이런 생각을 해봤다. 2010년은 재일조선인에 대한 차별이 극심해지던 시기다. 2012년에는 아베 정권이 등장해 ‘고노 담화’를 부정하며 역사를 바꾸려 했다. 이런 시기에 할머니가 극적인 등장을 한 거다. ‘나 아직 살아 있다. 내가 증거다’라고 온몸으로 일본의 말이 틀렸다는 걸 역설하려 했던 게 아니었을까. 그렇게 영화를 통해 할머니의 다양한 행보에 의미를 부여하고 싶었다.”(송원근 감독)
평화·인권운동가
“일본 정부에 고한다. 이 늙은이들이 다 죽기 전에 하루빨리 사죄하라고. 알겠느냐, 일본 대사!” 영화 <김복동>에는 카리스마 넘치는 목소리로 연단의 마이크를 잡고 일본 정부의 사죄를 촉구하는 인권운동가 김복동의 모습이 담겨 있다. “운동가로서 김복동 할머니의 주기가 있다면, 김복자, 김복희라는 가명으로 일본군 ‘위안부’ 피해에 대한 목소리를 내기 시작한 시기가 1기, 유엔에서 증언자로 활동하던 시기가 2기, 2009년부터 인권운동가, 평화운동가로 위안부 문제뿐만 아니라 한국 사회에 대해 이야기하기 시작한 시기가 3기라고 할 수 있겠다”고 윤미향 대표는 말한다. 특히 신변을 정리하고 부산에서 서울로 올라온 시기인 2009년부터 2012년까지는 김복동이 운동가로서 가장 왕성한 활동을 펼치던 시기다. 매주 수요일 정오 주한 일본대사관 앞에서 열리는 수요시위, 국내외 평화의 소녀상 건립 행사, 일본 주요 도시 순회 강연 등 운동가 김복동은 인권과 평화에 대한 자신의 목소리를 거침없이 쏟아냈다.
“사적인 자리에서는 유머러스한 분이었으나, 공적인 자리에서는 자로 잰 듯 철저한 모습을 보이시던 분.” 운동가 김복동의 지인들이 입을 모아 전하는 말이다. 그를 27년간 곁에서 지켜본 윤미향 대표는 “할머니는 시위 도중과 시위가 끝나고 난 뒤의 모습이 완전히 달랐던 분”이라고 소회한다. “발언하는 날이면 할머니가 짊어진 긴장과 무게감이 얼굴에 드러났다. ‘난 오늘 싸우러온 사람이야, 함부로 대하지 마’라는 표정이 읽혔다. 할머니는 무대에 오르기 전 끊임없이 발언의 기승전결을 머릿속에서 연습하셨고, 보태야 할 이야기가 있는지 묻곤 하셨다. 그리고 발언이 끝나고 나면 늘 스스로 반성하셨다. 그만큼 철저한 분이셨다. 수요시위를 마치고 집에 돌아가면 방에 들어가 옷을 갈아입으신 다음, 침상에 누워 끼니도 거르고 주무셨다. 그리고 다음주 수요일이 되면 다시 시위에 나가 마이크를 잡으셨다.”(윤미향 대표)
영화 <김복동>에 따르면, 인권운동가 김복동이 각종 공식 행사에서 즐겨 입었던 옷이 있었다고 한다. 하얀 저고리와 검정 치마다. 주변에서는 “더 예쁘고 고상한 한복을 입으시면 어떻겠냐”는 의견도 있었다지만, 김복동은 늘 무릎 아래까지 살짝 내려오는 검정 치마와 하얀 저고리 복장을 고수했다. “2013년 미국 글렌데일시에서 평화의 소녀상(일본군 ‘위안부’ 문제의 피해를 상징하는 청동조각상이다.-편집자)을 해외 최초로 건립했을 때 참석했던 할머니의 모습을 보았다. 소녀상을 툭툭 건드리며 말을 건네시더라. 나중에 여쭤보니 ‘아유, 얘를 여기 두고 가서 어쩌누’라 하셨다더라. 그 말씀을 듣고 할머니가 소녀상에 마음을 주셨구나 싶었다. 그분이 빼앗긴 찬란했던 순간을 대변하고, 미래 세대의 젊은 여성들이 다시는 그런 일을 겪지 않게끔, 비극은 내 세대에서 마무리짓겠다는 생각을, 할머니는 소녀상을 보면서 하셨던 게 아닌가 싶다.”(송원근 감독)
이야기의 흐름상 영화에서 자세히 다뤄지지 않은 부분도 있다. 평화운동가로서 김복동의 모습이다. 2016년 구마모토 대지진이 발생했을 때, 국내 여론은 싸늘했지만 김복동은 지진 피해자들에게 성금을 기부했다. 그렇게 운동가 김복동은 국가의 경계를 초월해 아픔을 겪는 이들에게 따뜻한 메시지와 위로를 전하는 사람이었다. 거리로 내몰린 노동자들에게 위로를, 베트남전에서 한국군에 성폭력을 당한 피해 여성들에게는 “우리와 같은 아픔을 겪은 베트남 여성들에게 사죄드립니다”라는 말을 전했다. 콩고, 우간다와 같은 무력분쟁 지역의 성폭력 피해자들에게는 “나도 끝까지 싸울 테니 당신들도 끝까지 싸워달라”는 응원을 보냈다. “할머니의 응원을 받은 콩고, 우간다의 여성들이 지금은 자국에서 저명한 인권운동가가 됐다. 김복동 할머니의 삶은 영화를 뛰어넘었다”고 윤미향 대표는 말한다.
유머러스하고 사려 깊은 아흔살 어르신
<김복동>은 여성들의 기억으로 재구성한 한 여성의 역사에 대한 영화이기도 하다. 송원근 감독은 이 자리에 없는 여성 김복동을 재구성하기 위해 그의 곁을 지켰던 다양한 여성들을 영화로 소환한다. 안선미 전 정의연 국제팀장이 김복동의 대외적 활동을, 김동희 전쟁과여성인권박물관 관장이 김복동의 과거를,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이 거주하는 ‘평화의 우리집’ 손영미 소장이 김복동의 일상을, 김복동의 정무적 동반자였던 윤미향 대표가 평화·인권운동가로서의 김복동에 대해 들려준다. 하지만 처음부터 김복동이 이들에게 곁을 내어줬던 것은 아니다. “개인적인 상처가 크셨다. 23살 무렵 천신만고 끝에 고향에 돌아온 뒤 억척같이 사셨다고 했다. 부산 다대포에서 장사를 하며 막내동생, 조카까지 공부시키며 당신은 끊임없이 베푸는 삶을 사셨는데, 베푼만큼 가족으로부터 사랑을 받지 못한 것에 대한 상처가 있으셨던 듯하다. 위안부 피해 신고를 반대했던 큰언니와는 의절했다고 하고. 그래서인지 나에게 종종 이렇게 물으셨다. ‘대표도 가버리려고?’ 그때마다 ‘아니요, 저희는 떠나지 않아요’라고 답했다. <김복동>을 촬영하는 동안 할머니가 전폭적으로 자신의 모습을 드러냈던 건 정말이지 어마어마한 변화다. 오랜 시간을 함께하며 ‘이 사람들은 나를 버리지 않겠다’라는 확신이 할머니의 마음속에 자리잡았던 듯하다.”(윤미향 대표)
지인들과의 관계에서 김복동은 “상대방에게 늘 통 크게 베풀고, 누군가에게 신세지는 것을 참지 못했던 분”이었다고 <김복동>의 촬영을 맡은 미디어몽구는 소회한다. 겨울이면 ‘따뜻하게 입고 촬영하고 다니라’며 패딩을 사주었고, 해외에 다녀올 때면 어김없이 향수와 면도기를 선물로 건넸다. 그런 김복동의 취미는 ‘공상’이었다. “3, 4층짜리 집을 지어 직원들, 저기 위에는 전부 다 한칸씩 주고, 밑에는 사무실 만들어 가지고 거기서 일 보고, 안성에 집 안 있나? 거기에 이제 니하고 내하고 니 부모들하고 그렇게 살고, 논도 막 사갖고는 청년들 줘서, 그거 가지고 벌어먹고….” 그렇게 김복동의 공상 속에서는 늘 지인들이 함께했다. 외부 활동을 하지 않고 평화의 우리집에 머물 때면 동료 할머니들에게 곧잘 농담도 건넸다. “길원옥 할머니가 방귀를 잘 뀌는데, 그럴 때마다 김복동 할머니가 ‘대포가 지나가네~’라고 말하면 모두들 깔깔 웃곤 했다. 희망 승합차를 타고 수요시위에 나갈 때면 버스에서 걸쭉한 욕을 하시기도 했다. 그리고 24시간 뉴스를 보며 모니터링을 하셨다. 아침 드라마 보는 시간을 제외하면 하루종일 뉴스를 보며 그날의 이슈에 대해 질문하셨다. ‘그 뉴스 어떻게 생각하노, 정대협은 뭐 할거노’ 하시며. ‘이렇게 하고 싶어요, 할머니. 그래서 여기에 가려고 해요’라고 대답하면‘그럼 나도 갈게’라고 말씀하시곤 했다. 건강을 걱정하면 ‘내 몸은 내가 안다’고 하시며. 그렇게 할머니는 누구보다도 강한 결단력을 가지고 계셨다.”(윤미향 대표)
무한한 가능성을 남기고
2015년 12월 28일, 속전속결로 이뤄진 한일 정부의 위안부 합의는 김복동의 얼굴에서 미소를 지웠다. 같은 해 8월 14일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기림의 날, 무대에 올라 수많은 관중을 바라보며 “세계에 (평화의) 나비가 날고 있어요. 이 늙은 나비도 날아다녀요”라고 희망의 메시지를 외치던 김복동은 위안부 합의 이후 육체적으로, 심적으로 고통의 나날을 보냈다고 한다. 송원근 감독은 “평화·인권운동가로서, 인간으로서 김복동의 기점은 ‘한일 위안부 합의’ 이전과 이후로 나뉜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1992년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들이 수요시위를 시작하면서 단 한번도 이루지 못했던 일본의 범죄 인정과 법적 배상, 역사 교육 등의 쟁점을 졸속으로 합의한 한국 정부가 일본 정부와 함께 웃으며 악수하는 모습을 비추는 <김복동> 속 뉴스 영상, 피해자들이 거부한 10억엔과 맞바꾼 재단법인 화해·치유재단의 출범식 영상과 재단 이사장의 기자간담회에서 끌려나가는 대학생들의 절규는 영화가 내내 좇던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들의 투쟁의 역사와 대비되며 관객에게도 정서적 타격을 안긴다. 한일 위안부 합의는 김복동을 거리로 내몰았다. 28년 가까운 시간 동안 이어왔던, 일본 정부를 상대로 한 모든 운동이 수포로 돌아갈지 모른다는 생각에, 또 90대에 접어든 자신에게는 이제 시간이 거의 남아 있지 않다는 생각에, 2016년 김복동은 미국·유럽·일본 등 전세계를 종횡무진하며 한일 위안부 합의의 부당함을 알렸다. 자신의 몸속에 암세포가 자라고 있다는 사실도 알지 못한 채.
운동가로서의 수많은 활동 가운데서도 김복동이 특히 애틋하게 생각했던 건 젊은 학생들을 만나는 일이었다. 누군가에게 곁을 쉽게 내어주는 사람이 아니었던 그도 ‘할머니’를 부르며 쾌활하게 웃는 젊은 학생들 앞에서는 자주 미소를 지었다. <김복동>의 말미, 병상에서 투병 중이던 김복동이 아픈 몸을 추스려 일본 오사카에 위치한 교토조선중고급학교에 장학금을 전달하러 가는 모습은 보는 이의 마음을 내려앉게 한다. 2018년 11월 28일, 김복동은 전 재산인 5천만원을 재일 조선학교 장학금으로 기부한다. 흰 적삼에 검은치마, 김복동이 좋아하는 민족의 옷을 교복으로 입은 소녀들과 손을 마주잡고 눈물 짓는 김복동의 모습으로부터 그가 잃어버린 시간을 떠올리게 된다. “이 하잘것없는 나를 돌봐준 활동가들에게 고맙다는 말을 전하고 싶습니다. 나는 지금까지 희망을 잡고 살아왔는데, 여러분도 다같이 희망을 잡고 삽시다.” 전 재산을 기부한 뒤 김복동이 송원근 감독에게 남긴 소회라고 한다. “어떤 고뇌의 순간에도 ‘나는 조그마한 희망의 조각을 놓치지 않고 살아왔다’는 말씀을 남기셨던 것 같아서, 그때의 감회가 오랫동안 남아있다”고 감독은 말했다.
2019년 1월 28일, 김복동은 고통 속에서 세상을 떠났다. 폐에 남아 있던 암세포 찌꺼기를 게워내며, 마지막 힘을 다해 김복동이 전했던 말은 “위안부 문제를 끝까지 포기하지 말라”는 이야기와 “재일 조선학교에 대한 지원을 계속해달라”는 전언, 그리고 일본 아베 총리에 대한 걸쭉한 욕이었다. “마지막 순간까지 김복동은 철저하게 운동가였다”고 윤미향 대표는 말했다. 하지만 김복동의 존재감은 여전히 세상에 굳건하게 남아있다. 2019년 1월, 김복동이 세상을 떠난 뒤, 영화 <김복동>의 제작진은 일본 오사카에 있는 재일 조선학교를 다시금 찾았다. “저희가 김복동이 돼서, 할머니께서 못다 이룬 꿈을 꼭 이루게 하겠습니다. 제가 김복동입니다.” 한 학생이 전한 말이 모두의 마음에 큰 파장을 남겼다고 미디어몽구는 말했다. 이렇게 한 여성이 뿌려놓은 희망의 씨앗은 누군가의 인생에서 또 다른 열매를 맺는 중이다. 자신의 인생을 통해 미래의 여성들에게 김복동이 열어 보인 괄호는, 무한대의 가능성으로 확장되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