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봄밤>의 유지호가 드라마 <밥 잘 사주는 예쁜 누나>의 준희와 같은 남자면 어쩌지. 이제는 ‘멜로’의 대명사가 된 정해인의 내공을 몰라도 너무 모르고 한 기우였다. 둘은 너무도 다른 ‘남자’였고, 이번 봄은 지난해처럼 또다시 정해인표 멜로에 심각하게 빠졌었다. 이번에 정해인이 택한 캐릭터는 정지우 감독이 연출하는 <유열의 음악앨범>의 남자 현우다. 라디오의 호흡, 그 시대의 속도를 담은 인물. “현우는 지금까지 내가 한 캐릭터 중 누구와도 닮았다는 생각이 안 들 거다.” 정해인이 또 한명의, 우리가 사랑해 마지않을 남자로 다가온다.
-올해 1/4분기는 <봄밤>과 함께 보낸 것 같다. <밥 잘 사주는 예쁜 누나> 이후 <봄밤>까지 연달아 멜로계를 석권했다.
=그 정도까지는 아닌데. (웃음) <봄밤> 찍기 전에 지난해 9월부터 12월까지 <유열의 음악앨범> 촬영을 했다. <밥 잘 사주는 예쁜 누나> 끝나고 감사하게도 좋은 제안을 많이 해주셨다. 이번엔 영화를, 또 현실적인 부분이 있는 작품을 하고 싶더라. 이 작품은 지금의 청춘들뿐만 아니라 40~50대까지, 70년대에 20대를 보낸 관객층도 공감할 리얼한 이야기라는 점에서 끌렸다.
-1994년부터 이후 10년 동안의 현우의 궤적을 그리는데, 정해인이 기억하는 그 시기는 어떤 풍경인가.
=1994년이면 내가 6살 때다. 동네 놀이터에서 뛰어놀고, 친구네 가서 문 두드리던 기억이 선명하다. (웃음) 그 시절이나 지금이나 청춘남녀의 사랑은 변함없지 않을까. 속도는 달라도 감정은 다르지 않을 것이다.
-작품 활동에 바빠서, 정지우 감독이 작품 들어가기 전에 팬미팅까지 쫓아다녔다고. (웃음)
=팬미팅 자리에 앉아 계시고 끝나고 뒤풀이에도 참석하셨다. 전작 촬영 일정 때문에 만날 시간이 많지 않으니 감독님이 그런 방법을 쓰신 것 같은데 기분이 묘하더라. (웃음) 감독님과 친해지려고 노력했다.
-현우에게는 고등학생 시절 좋지 않은 기억이 있고, 그게 좋아하는 여자 미수(김고은)와의 만남을 자꾸 방해한다. ‘먹구름이 낀 멜로’ 속 인물을 표현해야 했다.
=누구나 각자의 어둠을 가지고 있는 것 같고, 그런 아픔을 이겨내려고 노력하며 산다. 현우도 힘들지만 주변 환경에 맞서 열심히 살아가려는 청년이다. 분위기가 가라앉을 것 같기도 한데, 이들의 인생을 보면 그 어둠이 교차된다. 현우가 어두울 땐 미수가 밝고, 또 그 반대기도 하고. 그렇게 서로 엇갈리며 인연을 이어나가는 게 흥미롭더라.
-드라마 <슬기로운 감빵생활>에서 유 대위가 보여준 어둡고 날카로운 면모, <봄밤>의 유지호에게서 본 아픔 같은 것이 연상되기도 하는 캐릭터다. 정해인이 가진 해맑은 미소 사이로 어둠이 그려진다는 점에서는 역할마다 공통지점이 있는 것 같다.
=감독님들이 그렇게 면밀히 찾아주시니 감사하다. (웃음) 어찌 보면 다 내 모습과 연결되는 것 같다. 잠깐잠깐 보이는 모습과 달리 나는 그렇게밝은 성격은 아니다. 평상시 말이 별로 없고, 그래서 재미없고 따분한 편이다. 묻어가는 스타일, 있는 듯 없는 듯. (웃음)
-현우를 연기하기 위해 어떤 시도들을 했나.
=레퍼런스는 없었다. 차기작 <시동>도 원작 웹툰을 안 보고 촬영했다. 작품 할 때 그런 걸 참고하면 오히려 시야가 좁아지는 것 같아서, 시나리오에 집중하는 편이다. 90년대부터 2000년대 초반, 작품의 배경이 되는 시기의 음악을 많이 들었다. 이문세, 김광석의 노래 같은 것들. 관객이 우리 영화를 보고 영화관을 나오면서, 그 노래들을 검색해서 들어보면 좋겠다는 바람이 있다.
-얼마 전엔 데뷔 6주년을 맞아 팬모임인 ‘정해인의 핸더랜드’ 회원들이 미혼부인 <봄밤>의 유지호 캐릭터와 연장선상에서, 미혼 한부모 가정에 기부를 하기도 했다. 맡은 캐릭터나 정해인이라는 배우가 가진 영향력을 새삼 느끼기도 할 텐데.
=그러니 악역은 하면 안 되겠다. (웃음) 뒤를 돌아보지 않고 달려왔는데, 팬들 덕분에 돌아보게 된다. 현재는 다른 욕심보다 연기하는 지금의 배우 정해인에게 충실하고, 그 시간을 즐기고 싶다.
-길거리 캐스팅으로 데뷔한 뒤, 독보적으로 빠르게 입지를 굳혔다. 플랫폼의 다변화로 여러 시도가 요구되는 때이기도 한데, 다짐이 있다면.
=독보적이라니, 그렇지 않다. (웃음) 내가 가진 것에 비해 과분한 기회가 찾아왔고, 그런 면에서 운이 좋았다. 그런 채로 대학에 가니 한마디로 그게 산산조각이 났다. 실력이 뛰어난 친구들이 너무 많더라. 나는 한참 부족하고 갈 길이 멀구나, 그걸 깨달았기에 나한테 온 행운을 유지하려고 그동안 더 많이 노력한 것 같다. ‘나태해지지 말자, 나 스스로에게 책임을 지자’ 하며 항상 다짐한다. 그게 가장 중요한 게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