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굳이 메이크업 해야 하나? 영화도 맨얼굴로 찍는데.” 성동일 배우가 있는 현장은 언제나 분위기를 풀어주는 그의 가벼운 농담으로 문을 연다. 편하고 자연스럽게 촬영하자는 농담 섞인 격려겠지만 가만히 곱씹어보면 그 안에 연기에 대한 철학과 무게가 느껴진다. <변신>에서 생애 처음 공포연기를 선보이는 그는 이번 영화에서 “연기를 안 하는 게 가장 잘하는 것”이라 말했다. “사람이 무서운 게 아니고 상황이 무서운 거다. 거기다 대고 과장된 연기를 할 필요가 없다.” 진짜 같은 공포, 자연스럽게 스며드는 두려움은 그렇게 완성됐다. “연기를 즐긴다기보다는 배우라는 직업과 현장을 즐긴다”는 성동일 배우에게 이번 ‘연기 변신’에 대해 물었다.
-공포영화는 처음이다.
=처음 시나리오를 전달받았을 때는 고사했다. 당시 윤제균 감독의 <귀환>을 준비 중이었는데 제작이 뒤로 밀리면서 공백이 생겼다. 김홍선 감독이 그걸 기다리고 있었던 것 같다. (웃음) 직접 집에 찾아와서 배성우 배우와 함께 낮술을 먹으며 긴 이야기를 나누다 의기투합했다. 흔히 접해온 오컬트와 달리 이야기 자체가 인간적이었다. 목적없이 놀라게 하는 귀신들과의 대결이 아니라 가족 이야기다. 무서운 걸 일부러 찾는 게 아니라 익숙한 것에서 무서운 지점을 발견해나가는 거다. 이 정도면 해볼 만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익숙하지 않은 장르인데 현장에서 다른 점은 없었나.
=재미있었다. 어쨌든 남 괴롭히는 역할은 재미있다. (웃음) 어려웠던건 기다리는 시간이었다. 기본적으로 CG보다는 특수분장을 많이 했다. 3~4시간 기다리는 건 기본이라 다들 고생을 많이 했다. 우리끼리 농담으로 ‘3시간 세팅하고 3분 연출하는 영화’라고 불렀다. 드라마 현장에서 김홍선 감독의 별명이 ‘복사시미’였다. 회 뜨듯이 화면을 얇게 여러 번 딴다고. (웃음) 그런데 이번에는 나중에 편집할 때 현장 촬영본에서 걷어낸 게 별로 없을 정도로 핵심만 촬영했다. 그만큼 꽉 짜여진 구성의 이야기였고 김홍선 감독이 프리 프로덕션 과정을 꼼꼼하게 준비했다.
-처음에는 고사했는데 다시 출연을 결심한 이유가 있나.
=일단 시나리오에 끌렸고, 김홍선 감독과의 인연도 있다. 기이한 현상과 초자연적인 표현들이 등장하는 기존의 호러와는 다르다. 처음부터 끝까지 숨구멍이 없는 영화다. 집이라는 한정된 공간에서 진행되는 이야기지만 속도가 엄청나게 빠르고 긴장을 늦출 수 없어 읽다보면 시간이 금방 지나간다. 처음에 거절한 이유도 사실 작업이 너무 힘들 것 같아서였다. 막상 해보니 예감이 틀리지 않았다. (웃음) 억지로 놀라게 하는 장면은 거의 없는 대신 감정 신이 많았다. 시나리오의 밀도가 높다고 느꼈지만 찍으면서 강도가 몇배는 올라간 기분이었다.
-잘 알고 있다고 믿었던 가족의 다른 얼굴이 주는 공포가 신선하다.
=대사가 작위적인 게 없다는 게 제일 좋았다. 실제 딸로서, 아버지로서, 가족으로서 얼마든지 내뱉을 수 있는 대사들이다. 악마가 몸에 들어왔든 아니든 일상에서 쓰는 말인데, 그게 상황에 따라 분노, 두려움 등으로 표현이 되는 거다. 그렇게 무엇이 진짜인지 구분하기 어려운 상황과 감정들이 수시로 교차된다. 배우는 전체 시나리오를 아니까 답을 알고 시험장에 들어가는 것과 같다. 역설적으로 그래서 더 긴장하고 현장에 임할 수밖에 없는 부분이 있다. 너무 감추려고하면 표시가 나고 너무 힘을 빼면 역할의 당위성이 옅어진다. 그래서 배우는 거짓말을 잘해야 한다. 나는 프로 거짓말쟁이다. (웃음)
-색다른 얼굴을 보여준 연기 변신이라는 평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
=배우는 끊임없이 자신의 상품성과 필요를 어필해야 한다. 드라마에서는 진지했다가 웃음도 넣으면서 다양한 얼굴을 선보여왔는데, 이젠 슬슬 하나를 집요하게 파고들어 깊이를 보여줄 시기라고 판단했다. 그런 의미에서 올해는 영화만 하는 걸로 방향을 잡았다. 내가 생각하는 깊이의 정수는 일상연기다. 진짜 같은 자연스러움. 알 수 없는 존재로 변했을 때의 연기는 그렇게 어렵지 않았다. 그건 정해진 룰이 있는 거니까. 진짜 어려운 건 평범한 아빠의 모습을 보여주는 장면들이다. 이번에도 딱히 연기를 한다는 의식 없이 몸에 힘을 빼고 연기했다. 그러면서도 토씨 하나 안 틀리고 정확한 연기를 해야했기 때문에 쉽진 않았다. 그만큼 즐겁기도 했고.
-“나는 그렇게까지 열심히 하는 배우가 아니다”라는 말을 인터뷰에서 자주 하는데.
=역할 속으로 완전히 들어가는 메소드 배우가 있는가 하면 어떤 역할을 맡아도 자신이 드러나는 캐릭터 배우가 있다. 전자는 연기를 잘한다는 느낌이고 후자는 리얼하다는 느낌이다. 나는 후자라고 생각한다. 역할에 몰입해서 빠져나오는 데 힘들었던 적이 없다. (웃음) 내가 역할에 맞게 옷을 갈아입으면 되니까. 비유하자면 능숙하게 거짓말을 해야 한다. 기왕이면 연출자와 관객이 믿을 수 있는 거짓말쟁이가 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