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비평]
<언더 더 실버레이크>, 미스터리를 통해 이뤄낸 세계와의 접촉
2019-10-03
글 : 김병규 (영화평론가)
잔혹을 응시하는 두개의 눈

영화의 초반부, 배우지망생 파트너와 지루한 섹스를 치르면서 샘(앤드루 가필드)은 이곳저곳으로 시선을 분산시킨다. 벽에 붙은 커트 코베인 포스터에 관해 이야기하고, TV에 나오는 도시의 대부호 제퍼슨 세븐스의 실종 뉴스에 눈을 돌리는 식이다. 산만한 보기, 또는 성기와 눈이 따로 움직이는 분열적인 신체의 활동이라 말하고 싶다. 이런 증상이 벌어지는 이유는 간단하다. 눈앞의 섹스가 만족스럽지 않기 때문이다. 문제는 그 원인을 유추하는 것도, 그것을 극복하는 것도 분명치 않다. 이미지의 과포화 속에서 성애의 환상은 비루한 감각(너무 쉽게 ‘지리는’)으로 주어지고 있다. 섹스의 실패, 이것이 데이비드 로버트 미첼의 <언더 더 실버레이크>가 제기하는 단순하지만 치명적인 구속의 상태다.

그들의 섹스가 불만족스럽다면 그건 무언가의 결여 또는 과잉으로 인한 결과인 걸까. 영화는 ‘왜’라는 문제를 질문하는 대신 샘이 처한 조건에서 몇 가지 변수를 작동시킨다. 첫 번째는 죽음과의 결합을 상상하는 것이다. 죽은 자와의 섹스는 우리를 흥분시킬 수 있을까. <언더 더 실버레이크>는 섹스와 죽음을 나란히 두고, 그 관계가 성립할 수 있는 가능한 종류의 조건을 모두 추적해보는 여정을 그린다. 샘이 사라진 사라(라일리 코프)가 죽었다고 짐작하면서도 그녀를 찾고, 그의 첫 자위 대상이었다는 <플레이보이> 잡지 속 여인의 이미지가 살해당한 여인의 이미지로 되돌아오는 것은 이런 이유에서다. 이는 꿈과 현실의 경계를 무너뜨리는 상투적인 장치라기보다는 같은 환상이 다른 형태로 반복되는 데자뷔로서의 비전의 세계를 표상한다. 미숙한 환상은 성애적 체험으로 한 번, 죽음을 목격하는 순간으로 다시 한번 되돌아온다. 또 다른 변수는 인간과 동물의 범주를 흩트리는 것이다. 부엉이 가면을 뒤집어쓰고 살인을 저지르는 나체의 킬러, 개소리를 짖어대는 꿈속의 여인, 영화에 출연한 동물을 질투하며 자살한 배우…. 영화 곳곳에 출몰하는 이러한 동물적 몸의 형태를 목격하면서 샘 또한 서서히 동물의 모습으로 변모한다. 그는 벗은 몸으로 밤거리를 활보하는 코요테가 되고, 엉덩이를 씰룩거리며 오줌을 싸지르는 스컹크가 된다. 남성과 여성, 인간과 동물이 공존하는 도착적이고 경계적인 몸이다. <언더 더 실버레이크>는 샘의 미성숙한 욕망으로 발현되는 육체의 기이한 변형과 절단을 전시한다. 이는 인간의 몸을 적극적으로 차용한 초기영화(특히 조르주 멜리에스의 영화들)가 보인 신체에 대한 해부학적 관심과 보디스케이프를 떠올리게 한다. 샘이 만들어내는 미숙한 성적 욕망과 뒤틀리고 도착적인 몸을 포착하려는 카메라의 본연적 욕망이 기묘하게 겹치는 것이다.

오타쿠가 세계의 총체적 인식에 도달하려 할 때

샘은 사라진 사라를 추적하면서 눈에 보이지 않던 수면 아래의 단서들을 채집하는 여정을 구조화한다. 그의 여정이란 눈에 비치는 온갖 개별적인 기호들의 역사적 맥락을 발라내고, 기호간의 피상적인 접점을 추출해 자의적인 서사와 도식으로 세계를 재구성하는 방식이다. 한때 영화가 여성을 바라보며 뒤따라가는 남성의 시선(gaze)만으로 성립되는 것이었다면(프리드리히 빌헬름 무르나우의 <선라이즈>, 또는 앨프리드 히치콕의 <현기증>), 추적의 역량을 잃어버린 오늘날의 영화가 미스터리 또는 의미를 생산해내는 유일한 방법이란 이런 것인지 모른다. 샘은 저급하고 범용한 하위성의 이미지가 산출하는 미스터리를 통해서 세계와의 접촉을 이뤄낸다. 그건 우리의 세계 속에서 가시화되지 않는, 그러나 샘의 세계를 지탱하는 유일한 원리로서의 가상의 미스터리다.

이런 대목에서라면 아즈마 히로키의 지적을 빌려 동물화하는 오타쿠의 습성(“광범위한 대중문화 데이터베이스를 활용해 작은 서사들을 끝없이 만들어가는 창작자”)을 거론할 수도 있을 테지만 그런 설명적 분석의 틀이 중요한 것은 아니다. 문제는 이 오타쿠가 세계를 둘러싼 총체적인 인식에 도달하려 들수록, 그의 추리를 이루는 단서들이 결코 정합적인 논리로 구성되지 않음이 폭로된다는 점이다. 제임스 딘의 머리를 만지는 일과 뉴턴의 마스크 아래에서 기다리는 행위는 어떤 연결고리를 가지고 있는가. 실버레이크의 모든 비밀을 알고 있다는 애니메이션과 최종적으로 밝혀지는 늙은 갑부들의 종교적 기획은 무슨 연관이 있는가. 살인이 발생한 저수지에서 할리우드산으로 가는 경로의 이동에는 일관된 의미의 맥락이 보이는가. 그것들은 단지 샘의 시야에서 나타났다 사라져버린다. 그 괴리와 공백을 채우기 위해 우리의 서사가 동원되는 것이다. 당연히 이 괴리는 모든 노래를 만들었다는 작곡가를 살해하는 순간처럼 과잉된 파국으로 수렴할 수밖에 없다.

샘은 너무 많은 것을 보는 작가이며, 그의 눈에 비친 것들은 모두 조각난 표상으로 파편화되어 있다. 이런 통합성 없는 시각의 조건이 누군가를 미행하면서 누군가에게 미행을 당하는 기분, 다시 말해 응시가 촉발하는 치명적인 감각을 가져온다. 또한 그 표상의 단편들은 공동묘지에 설치된 대형 스크린, 드론으로 훔쳐본 낯선 타인의 영상, 사라와의 대면의 매개가 되는 모니터 등 비전의 장치로 편재되어 있다. 누군가에게 시선을 던지고, 누군가의 시선에 노출되는 응시의 구도가 사방으로 찢긴 것이다. 이러한 시각성의 조건은 그가 목격하는 광고판에 그려진 둘로 잘린 얼굴이 지시하는 시각적 신호와 닮았다. 그건 하나의 육체가 몽타주를 체화하면서 발생하는 부작용을 새긴 얼굴이다. 샘은 두눈에 현실의 세계와 이미지의 세계라는 서로 다른 비전을 비추며 구토와 어지럼증을 호소한다(그가 광고판에서 본 여성과 재회하고 무기력하게 물러나는 것은 이런 이유 때문이다). 그는 현대적 응시의 실패자, 또는 스크린의 추방자다.

이제 선명히 볼 수 있나요?

결말에 도착한 샘이 옆집으로 넘어가 (마치 한번도 등장하지 않는 그의 어머니를 연상시키는) 중년 여성과 의례적인 섹스를 하는 건 그저 알리바이다. 근친상간에의 암시, 또는 커튼 너머 그림자로 보이는 새의 목소리(‘궁금하지만 알 수 없는’ 대상)를 스크린과 관객에 대한 투박한 은유로 보는 건 상투적인 독해다. 중요한 건 응시의 조건을 뒤집는 그의 위치다. 망원경으로 바라보던 시선의 건너편에서 샘은 마지막으로 시도할 수 있는 환상의 형태를 구상한다. 그건 내가 나와 결합하는 체험이다. 물론 자기 자신과의 섹스, 즉 자위로는 충족되지 않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남은 건 자신의 파괴, 곧 나의 자살을 지켜보려는 욕망이다. 카메라는 자신의 사라짐이라는 사태를 지켜보는 샘의 시선을 찢겨진 숏/리버스숏의 짜임으로 관측한다. 한 인물의 몸에 달라붙은 혼종적 정체성과 시각성이 무너지는 순간이다. 그 자리에서 되돌아오는 것은 샘이 바라보던 광고판에 적힌 문구다. “이제 선명히 볼 수 있나요?” 응시의 실패가 선고된 자리에서 우리는 무엇을 선명하게 보는 걸까. 영화에서 벌어진 모든 실종을 응시하던 주체가 비로소 스스로의 사라짐을 쳐다본다. 여기서 주체의 사라짐은 파악할 수 없는 미스터리와 숨겨진 진실을 간직한 미지의 사태가 아니라 단지 사라짐일 뿐으로 우리 눈에 직시되고 있다. 결말에 이르러 데이비드 로버트 미첼은 “우리는 아무런 진실도 얻지 못할 것이다. 우리가 조사하면 할수록 사태는 더 모호해지고 진실은 사라진다”고 말한 브라이언 드 팔마의 저항적 회의론에 근접한다. 언젠가 할리우드의 언더그라운드가 꿈꿨던 이미지를 향한 도발과 성찰의 양가적 제스처를 모색하는 보기 드문 동시대의 영화다.

관련 영화

관련 인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