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2]
[조커 찬반 평론-반대] <조커>의 폭력, 엉성한 난장
2019-10-17
글 : 김병규 (영화평론가)
불화하지 않는 웃음

두 가지 이유로 <조커>를 보고 싶었다. 하나는 이 영화가 광대를 전면에 내세우기 때문이다. 트럼프 시대의 악몽을 말하기 위해 누군가는 70년대 신문사의 도덕극을 경유하고(<더 포스트>), 누군가는 변모하는 영화의 풍경을 들여다볼 때(<원스 어폰 어 타임... 인 할리우드> <데드 돈 다이>) <조커>는 어떤 은유나 우회도 없이 아메리칸 뉴시네마의 유산을 탐욕스럽게 핥아먹으며 어릿광대의 얼굴에 칠해진 끈적거리는 얼룩을 직접 마주보도록 요구한다. 이런 시도에 폭력에 관한 비판적 검토나 세심한 거리두기가 필요하다고 말하는 건 (그 언술의 상투성을 제쳐두고서라도) 타당하지만 유효하지 않은 반응이다. 지독한 반영웅의 초상을 그리는 시도는 작가가 의도하는 비판적 관점과 무관하게 금지된 것의 프로파간다에 가까워지고, 대상을 향한 건조한 해석에도 불구하고 필연적인 매혹을 동반하게 된다.

같은 맥락에서 <조커>가 보여주는 극단적인 폭력이 시대착오적이라거나 영화가 그러한 표현에 무책임하다는 비판은 초점을 빗나간 것이다. 할리우드는 매번 동시대적인 혼란을 반영하면서 시대와 불화하는 불순한 표현과 이미지의 파열음으로 파산에 직면한 영화의 시기로부터 출구를 모색하곤 했다(그것이 공동체의 영역 안에서 수용되던 마지막 분기점은 70년대의 뉴시네마였다). <조커>는 영화 속에서 몇번이나 대사로 강조하는 것처럼 “미쳐버린 세상”의 한복판에 서서 의도적으로 그 시대착오적 방법론을 적극 표방한다. 혼란한 심리상태에서 발생하는 행동들, 돌발적인 충동과 병리적 망상의 공포는 미국이라는 정신분열의 세계를 일그러뜨려왔다. 나는 토드 필립스가 보다 대담하게 매혹과 분노의 패러독스를 다루며 아메리카의 도상 위로 광대의 꺼림칙한 얼룩을 덧칠하길 기대했다.

다른 하나의 이유는 그 광대를 호아킨 피닉스가 연기한다는 사실이다. 정확히 말하면 호아킨 피닉스의 무표정과 광대의 웃음이 한 얼굴에서 결합하는 방식에 대해서다. 배우의 전체 필모그래피와는 무관하게 내가 기억하는 호아킨 피닉스는 무표정에 사로잡힌 단독자다. 토드 필립스가 피닉스의 조커를 구상하기 위해 참조했음이 분명한 <마스터>(폴 토머스 앤더슨)의 프레디와 <너는 여기에 없었다>(림 랜지)의 조는 웃지 않거나 웃음을 짓는 방법에 미숙한 인물들이다(직관적으로 말하면 피닉스의 조커는 조의 환경과 프레디의 휘어진 육체를 결합한 결과물처럼 보인다). 동시대 미국인의 고독한 초상과 괴이한 표정을 포착해온 대표적인 작가들(폴 토머스 앤더슨, 제임스 그레이, M. 나이트 샤말란)이 그의 얼굴을 차용해온 것도 이 배우의 특별한 무표정과 연관되어 있다고 느낀다.

호아킨 피닉스는 웃지 않는다. 하지만 조커는 웃는다. 아서가 클럽의 코미디 쇼를 감상하며 유머를 공부하는 장면에서, 다른 사람들과 ‘어긋난’ 타이밍에 웃는 그의 모습은 이런 미세한 불일치를 들려준다. 그(호아킨 피닉스/조커)의 웃음은 외부의 우스꽝스러운 상황에 대한 자연스러운 반응이라기보다 세계의 균일한 볼륨에 노이즈를 일으키는 확성기의 소음이다. 호아킨 피닉스라는 배우-스타의 무표정과 조커라는 분장에 새겨진 웃음이 맺는 불화, 그리고 아서라는 인물의 웃음과 세계의 (비)웃음 사이의 간극은 최종적으로 어떤 파국에 도달할것인가. 말하자면 <조커>는 아메리칸 뉴시네마의 부스러기를 긁어모으면서, 그 자리에 동시대 할리우드가 견지한 남다른 무표정을 투사하는 두 가지 층위에서의 불화의 기획이다. 영화에 관한 주요한 질문은 이성애자 백인 남성이 자행하는 폭력 자체의 정치성이 아니라 의도적으로 선택된 그 과잉이 발산하는 불화를 향해야 할 것이다. 마찬가지로 이 영화가 실패하는 지점은 그 불화의 기획이 실패하는 자리에 있다.​

여기 정당한 카오스는 없다

이 가소로운 영화가 선택하는 건 어둠에의 매혹, 또는 어둠의 수사학이라 부를만한 시각적 형식이다. 아서는 고용주에게 부당한 비난을 듣고 나와 쓰레기통을 걷어차다 그 옆으로 쓰러지듯 눕는다. 그의 형상은 실루엣으로 보이며 주변에 놓인 쓰레기 더미와 같은 어둠에 물들어 있다. 도심의 쓰레기, 혹은 그로 인해 창궐한 바이러스가 곧 조커다. 어둠 자체의 매혹을 거리낌 없이 드러내는 그 시각적 수사법은 놀라울 만큼 진부하다. 어둠의 육체성이 본격적으로 도시를 물들이는 지하철에서의 총격 장면을 떠올려보자. 만취한 금융회사직원 셋과 일자리에서 해고당해 절망한 아서는 그 공간 속에서 함께 웃는다. 그들이 부르는 노래의 한 대목처럼(“우리는 하나인가요?”) 어둠에 진입한 지하철 내부에서 그들은 하나의 그림자와 같은 형상으로 폭력에 투신한다. 아서가 살육을 저지르고, 본격적으로 망상을 확대하기 시작하는 것도 이 어둠의 윤곽에 몸을 담그고 난 뒤다.

이는 정당한 카오스라기보다는 엉성한 난장이다. 아서는 충동적으로 사람 셋을 죽이고도 태연하게 춤을 추는 미치광이인가, 유년기의 학대와 사회의 방치가 빚어낸 도시의 이물질인가. 가장 쉬운 해석은 후자가 전자를 만들어냈다고 말하는 것이다. 그런데 영화는 그 둘을 헷갈리고 있거나 의도적으로 정교한 인과관계를 설정해두지 않는다. 이를 감추는 영화의 질료가 그들의 환경으로 주어진 어둠이다. 바이러스는 이제 병균을 퍼트리고 전염병을 옮길 것이다. 어둠은 이 과정에서 세계와 인물이 불화하는 방식에 관한 분석적 판단과 이질적 차이를 무시하고, 이를 모호함과 시각적 매혹이라는 하나의 사태로 위장시킨다.

어둠의 팽창이 전제된 자리에서, 빛은 무엇도 명확하게 드러낼 수 없다. 그러나 <조커>가 구현하는 빛과 어둠의 동등성은 믿기힘들 정도로 안이하게 짜여 있다. 석양빛을 등진 채 춤을 추며 계단을 내려오는 남자의 걸음 위로 경쾌한 음악과 장엄한 음악을 번갈아 들려주는 것만으로 희비극적 아이러니가 발생하리라 믿는 절망적인 상상력은 차라리 농담처럼 보인다. 어머니를 살해하는 아들의 얼굴에 나른한 백색의 빛을 비추고 희미한 미소를 짓게 하는 한심한 연출을 영화적 초상화의 사례로 받아들이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이런 장면들에서 어둠과 빛의 시각적 도식은 영화의 표면에 강렬한 노이즈를 일으키는 대신, 익숙하기 짝이 없는 상징적 체계로 환원되고 만다.

<조커>는 두명의 아버지에게 추방당하는 아들의 이야기다. 아서는 토머스 웨인이라는 상상적 아버지와 머레이 프랭클린이라는 사회적/상징적 아버지로부터 모두 퇴장을 명령받는다. 그런데 아들은 한번도 아버지의 공간에 나란히 발을 디딘 적이 없다. 아서는 자신이 입회한 적 없는 공간으로부터 추방당한다. 추방의 기억은 없는데, 추방당한 결과는 반복되고 있다. 문제는 영화가 이 불균형과 그것이 촉발하는 한쪽의 파국이라는 관계의 역학을 탐구하는 대신 그 불균형의 결과로 발생한 아서의 피해의식과 자기연민에 침잠한다는 것이다.

마지막 순간을 앞두고 <머레이 쇼>에 출연해 자살을 계획하던 아서는 정작 생방송 현장에서 충동적으로 머레이를 살해한다. 특별히 충격적인 사태는 아니다. 제 머리로 향하던 총구를 상대방에게 겨누는 것만큼 그에게 자연스러운 열망은 없다(미리 생각해둔 ‘리허설’대로 진행되지 않는 생방송의 흐름이 그를 더욱 조급하게 만들었을 것이다). 대신 이 순간은 삶의 마지막을 미디어의 비극으로 상연하려는 미학적 실행력마저 부재한 아서의 철저한 무능력을 환기한다. 토드 필립스는 클라이맥스로 향하면서 이 실패를 파괴의 카타르시스로 전환한다. 이 선택은 동의하기 어렵다. 영화는 마지막 순간까지 아서를 지배한 그의 무능력을 주시하는 대신 즉각적인 충격과 반응으로 꾸려진 폭발적인 대단원으로 카메라의 시선을 돌린다. 악에 관한 탐구를 보여주고 싶었다면 그의 마지막 실패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관측했어야 할 것이다. 하지만 그 순간에 영화는 조커의 탄생을 미적으로 수용하는 수축적인 결론에 도달한다. 나는 이 영화가 악의 근원과 탄생을 충실히 보여주었다고도, 그에 대한 시적 통찰을 제공한다고도 생각하지 않는다.

이 과정에서 비웃음의 대상이 되는 건 아서의 무능력이 아니라 그의 외부를 맴도는 대중 집단의 비가시적인 얼굴과 목소리이다. 그들은 아서의 충동적 행위에 과도하게 반응하는 가면 쓴 시위대 무리로 소환되거나, 그의 망상적 무대에 환호와 야유를 보내는 화면 바깥 청중의 목소리로만 전제되고 있다. 후반부의 한 장면에서 익명의 시위 참가자가 가면을 빼앗기자마자 선뜻 이해하기 힘든 과도한 분노를 드러내며 순식간에 지하철을 폭력과 충돌의 공간으로 만드는 것은 그들이 진정 ‘얼굴 없는’ 존재들이기 때문일까. 이 대목에서 자본가/정치인을 향한 투쟁에의 공감은 조커를 추앙하는 우스운 집단적 무의식으로 전환되고, 이것이 내재하는 계급적 인식은 삶의 ‘코미디’를 자처하는 광대놀음의 유희에 증발하고 만다. 계급의 압력과 공동체의 소멸이라는 물리적 사태는 조커의 반체제적 형상을 위해 동원될 뿐이다. 단지 어둠 속에서 그들이 함께 분노와 충동을 충전했다는 이유만으로 말이다. 영화의 마지막에 배트맨이라는 또 다른 가면, 초법적인 권능으로 조커를 상대할 ‘얼굴 없는’ 영웅의 도래를 은밀히 예고하는 교차편집의 제스처가 헛되게 다가오는 이유다.

<조커>는 정치적으로 조금도 급진적이지 않다. 오히려 이 영화는 파렴치하게 반동적이다. 모두가 날뛰는 혼란스러운 도시의 전경은 역설적으로 이 영화의 시각적 맹점(blind spot)이다. 우울한 표정으로 창문을 바라보던 아서는 엉망으로 변한 세계를 다시 창문 너머로 지켜본다. 조커가 짓는 웃음은 세계와 불화하기는커녕 예측 가능한 파국의 형태와 접합하며 너무 쉽게 소화되고 있다. 아서는 오작동과 방향상실로 목적지를 잃고 광장을 떠도는 광대가 아니다. 반대로 그는 평온하게 주어진 목적지에 도착한다. 이곳에 파열의 흔적은 보이지 않는다.

파렴치하게 반동적인

이 영화가 선택한 과잉의 수사화에 매혹되는 것도, 과잉의 활력 자체만으로 영화를 옹호하기도 쉬운 일이다. 하지만 도발적인 영화란 공동체의 의미망에 무사히 안착하는 진부한 아이러니가 아니라 우리의 자리를 근본적으로 흔드는 패러독스를 다룬다는 사실을 잊어선 안 된다. <조커>는 전자에 해당하는 평면적인 초상의 영화이자, 상투적인 어둠에 붙들린 영화이며, 반동적인 흥분으로 도취된 영화다. 무엇보다 토드 필립스는 70년대의 환대가 지나간 뒤, 폭력을 테제로 삼은 미국영화들이 왜 인물의 육체를 훼손하는 자기파괴적 행위를 출구로 삼았는지 모르는 것처럼 보인다. 자신을 때리는 손과 통증을 느끼는 몸을 나란히 전시한 데이비드 핀처의 <파이트 클럽>, 또는 “흡혈귀들은 남의 피를 빨아먹지만, 우린 우리의 살점을 뜯어먹어야 한다”고 말하는 아벨 페라라의 <악질 경찰>이 보여주는 것은 신뢰할 만한 공동체가 사라진 이후 그곳에 방치된 자들의 부서진 정체성을 되묻는 파괴적 행동이다. 그건 위반을 위반하고, 불화 자체와 불화하려는 도착적인 몸부림이다. 내 몸이 이 자리에 존재한다는 걸 자학적으로 증명하는 폭력이다. 이에 비하면 <조커>가 발산하는 폭력과 카오스는 안전하기 짝이 없다. 모든 것이 남들은 “이해 못할” 아서의 망상일지도 모른다는 알리바이를 덧씌우는 소심한 에필로그에 이르면 사태를 모호함으로 이끄는 빛과 어둠의 수사는 반복적인 술래잡기로 형태를 바꾼다. 아서는 지독한 공상을 꿈꾸면서 아직도 어둠 속에 있다. 병동에 갇힌 카메라는 개인의 분노와 공동체의 충동이 세계와 충돌하면서 벌어진 결과를 외면한다. 하스미 시게히코의 표현을 빌리자면, <조커>는 광기에 물든 세계의 폭력이라는 기획의 실패를 찍는 것조차 실패한 사례다.

사진 위너브러더스코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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