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더>
데뷔작은 아니지만, 사람들은 봉준호 감독의 <마더>에서 천우희를 눈여겨 보기 시작했다. 진태(진구)의 미성년자 여자친구로 출연한 천우희는, 아들의 살인 누명을 벗기기 위해 증거를 찾으러 진태의 집에 잠입한 엄마(김혜자)의 시선으로 관찰된다. 적은 경험에도 부족함없는 연기력을 빛낸 천우희에게 관객들의 관심이 모이기 시작했다. 천우희에 따르면 “배우라면 가리지 않고 다 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던 당시의 포부와는 별개로, 수위 높은 장면에 가족들의 속상한 마음은 어쩔 수 없었다고.
<써니>
천우희의 잠재력이 폭발하기 시작한 건 <써니>에서의 일명 ‘본드걸’ 상미 역할을 통해서다. 강형철 감독의 히트작 <써니>는 어른이 된 친구들의 현재와, 25년전 ‘써니’라는 이름으로 무리지어 다니던 여고생들의 찬란한 시절을 오간다. 천우희의 캐릭터 상미는 전교에서 제일가는 반항아다. 하지만 써니에 속하지 못해 점점 더 비뚤어져가고, 본드 중독 역시 날로 심각해지는 불안한 인물. 본드에 취해 나미(심은경)에게 말을 거는 과격한 연기는 그 놀라운 집중력과 표현력에 입을 떡 벌어지게 만든다. 촬영 도중 천우희의 책상 위에 놓여진 익명의 편지에는 ‘여자 게리 올드만이 되어달라’는 메시지가 적혀 있었다고. <써니>는 천우희에게 진지한 고민을 심어준 영화였고, 대중들에게도 배우 천우희를 기억하도록 만든 작품이었다.
<한공주>
<한공주>는 명실공히 천우희의 대표작이다. 집단 성폭행을 당한 고등학생 공주가 가해자보다 더 많은 도망을 다녀야 했던 이야기. 이미 영화 개봉 시기에 28살이었던 천우희는 앞선 두 작품에 이어서 다시 교복을 입는다. 어려보이는 외모의 그녀라서 가능했던 일이지만, 캐릭터에 담긴 묵직한 전사(前事)를 얼굴에 온전히 담아낼 수 있는 특출난 연기력 덕이기도 했다. <한공주>는 작품과 연기면에서 국내외로 크게 환영받았다. 당시 마라케시국제영화제의 심사위원장이었던 마틴 스콜세지는 이 작품에 극찬을 아끼지 않았고, 천우희는 청룡영화상 여우주연상까지 당당히 꿰차게 된다. 그에게 <한공주>는 성장하는 느낌을 안겨준 가장 큰 터닝포인트였다. 어쩌다 보니 매번 힘든 길을 선택한 천우희의 필모그래피는 이렇게 그려지고 있었다.
<손님>
공포영화 <손님>은 신선한 시도라는 평가를 받았지만, 흥행면에서 여러 악조건 속에 있었다. 많은 쥐가 등장한다는 점도 컸다. 어느 흉흉한 산골 마을이 밤마다 나타나는 쥐 떼에 골머리를 앓고, 피리부는 이방인 우룡(류승룡)이 쥐를 몰아내 주기로 한다. 천우희는 신내림을 기다리는 선무당 미숙을 연기했는데, 이번에도 역시 강렬한 캐릭터를 맡아 화제가 됐다. 배우 류승룡의 제안으로 우룡과의 로맨스 라인도 생겼다. 쥐를 몰아내는 데 성공한 우룡은 미숙에게 같이 마을을 떠나 살자고 하지만, 미숙은 어딘가 두려운 표정으로 선뜻 나서지 못한다. <손님>의 미숙 역할에 앞서 천우희는 학생이 아닌 다른 역할에 도전한다는 생각에 체중도 불리고 욕심을 냈다. 김광태 감독은 그녀를 향해 “기대치를 넘어서는 연기를 보여주는 배우다. 연출이 생각지 못한 미숙 캐릭터를 표현해 줬다”며 극찬했다.
<곡성>
다시 심상치 않은 영화에서 천우희는 영험한 존재가 된다. 어느 하나 평범한 캐릭터는 없었던 나홍진 감독의 <곡성>. 종구(곽도원), 일광(황정민), 외지인(쿠니무라 준), 효진(김환희) 등 각양각색의 에너지로 발산하는 캐릭터들 사이에서 천우희는 사람인지 귀신인지 알 수 없는 무명 역할을 맡았다. 미끼를 던지겠다고 은유적인 공표를 한 낚시 장면을 시작으로 <곡성>은 2시간 36분의 러닝타임 내내 관중의 멱살을 낚아챈다. 영화가 끝난 다음에도 분분한 해석이 이어졌는데, 천우희의 배역인 무명에 대해서는 마을의 수호신이었다는 해석이 가장 지배적이다. 무당 일광과 무명 사이에서 어느 누구도 믿거나, 믿지 않을 수 없는 진퇴양난의 종구. 내로라하는 연기파 배우 셋이 함께 빚어내는 이 장면은 판단을 내리기 힘든 경지에 관객들을 데려갔다. 칸영화제 비경쟁 부문에 공개돼 각국의 찬사를 한 몸에 받았던 <곡성>으로 천우희는 세계 무대에 그 잠재력을 알릴 수 있었다.
<우상>
<한공주>로 잊을 수 없는 터닝포인트를 만들어 준 이수진 감독은 차기작에서 천우희를 재차 소환했다. 그의 두 번째 작품 <우상>에 기꺼이 참여한 천우희는 “나를 이 자리에 있게 해준 감독님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집요한 연출 스타일의 감독님과 감이 굉장히 잘 맞다”고 출연의 변을 밝혔다. 천우희의 거친 연변 사투리가 전달력이 다소 떨어졌고, 영화 자체의 조각을 맞추기 어려운 난해함 때문에 <우상>은 좋은 평가를 얻지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마도 <우상>의 련화는 천우희의 역대 가장 강렬한 캐릭터인지 모른다. 하얼빈에서 밀입국한 그녀는 자신의 정체를 극도로 숨기고, 생존을 위해 무섭도록 치닫는 인물이다. 촬영하는 동안에도 캐릭터에 대한 답을 구하기 어려웠다는 천우희는 “모호함 속에서 자격지심과 분노를 가진 인물이 아닐까하며 연기에 임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