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동진 영화평론가는 최근 개인 작업실 ‘파이아키아’를 열었다. 60평 규모의 사무실에는 특별히 맞춤 제작된 책장이 곳곳에 들어서 있고, 2만여권의 책과 DVD 및 블루레이, CD와 시나리오 등을 아우르는 방대한 소장품이 주제별로 꽂혀 있다. 80여명이 영화를 보거나 강의를 듣는 게 가능할 정도의 공간이며 스튜디오로 활용할 수 있는 방도 있다. ‘파이아키아’는 <오디세이아>에서 오디세우스가 고향으로 돌아가던 길에 잠시 머물다 자신의 모험기를 들려주던 섬 이름에서 따왔다. ‘파이’는 원주율, ‘아키’는 건축(architecture)이란 의미도 함께 담는다. 그간 이동진 영화평론가가 해온 다방면의 활동을 가능케 한 질료가 무엇인지 한눈에 확인할 수 있는 이곳은 그에게 ‘파이아키아’인 셈이다. 최근 출간된 이동진 영화평론가의 13번째 책 <영화는 두 번 시작된다> 역시 그의 새 보금자리처럼 지난 20년의 활동을 집대성한다. <조선일보>와 네이버, 다음에 연재한 리뷰와 <씨네21> 등에 기고한 영화평론은 물론 <기생충> <아사코> <버닝> 등에 대해 길게 쓴 글도 함께 수록된지라 페이지 수만 944쪽에 이른다. 총 208편의 글, 214편의 영화를 다루는 압도적인 분량에도 불구하고 <영화는 두 번 시작된다>는 1쇄를 찍자마자 각종 서점 베스트셀러로 등극했고, 인터뷰 당일에는 전자책이 리디북스 판매 1위에 올랐다. 영화평론가의 영향력과 활자 매체가 약화된다고 일컬어지는 시대에 이동진 영화평론가의 신간과 그 인기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희망을 품게 한다.
-<이동진의 부메랑 인터뷰 그 영화의 시간> 출간 당시 “내가 촌철살인의 능력은 없지만, 질보다 양으로 승부하는 재주는 좀 있다”고 하지 않았나. 이번 책은 페이지가 더 늘었다.
=총 3천매 정도니까 책 3권 분량이다. 결산하는 의미에서 이렇게 모아 내고 싶었다. 내가 생각해보면, 스스로가 기특한 면도 아쉬운 면도 비틀린 면도 많다. 그 이상한 사람이 지난 20년간 매일 아침 일어나 어찌어찌 일을 하고 잠자리에 드는 게 365일씩 20번 반복됐다. 글과 말로 먹고살고 있는 사람의 입장에서 지난 20년간 가장 중요했던 일은 평론을 쓰는 것이었고, 20년간 쓴 글을 모아 944페이지에 달하는 책을 썼다. 각각의 글을 썼을 때 어떤 일이 있었는지, 무슨 문제가 있었는지, 개인사까지 전부 떠오른다. 그래서 굉장히 뭉클하기도 하다. 어쨌든, 너 참 애썼다고 말이다. 지금까지 냈던 서적 중 지금 시점에선 나에게 가장 중요한 책이다. 한계도 있고 보람도 자랑스러움도 모두 있지만, 장점과 단점까지도 전부 내 자신이니까.
-<조선일보> 시절 기사부터 <씨네21>에 기고한 영화비평, 네이버 ‘이동진의 영화풍경’과 다음 ‘이동진의 어바웃 시네마’에 연재한 글, 블로그 ‘언제나 영화처럼’에 올린 포스트 등을 모두 모았다. 여기에 <기생충> <아사코> <언브레이커블> <23 아이덴티티> <글래스> <버닝>에 대해 새로 길게 쓴 글이 추가됐다.
=어떻게 보면 통일성이 약한 책이지만, 각 매체에 맞는 글을 썼다. 글은 어디에 쓰느냐에 따라 달라져야 한다. <씨네21>에 영화비평을 쓰면 35매에 맞게 쓰고, 일간지는 길어봤자 8~10매 분량이다. 이번에 새로 쓴 <버닝> 평론은 80매가 넘는다. 이상적으로는 <벨벳 골드마인>도 80매로 쓰고 싶었지만 그렇게 되면 이 책은 브리태니커 백과사전만한 분량이 될 테고 2047년에나 나올 수 있다. (웃음) 인간은 한번밖에 살 수 없으니 내 생에서는 불가능한 일이다. 이 책이 일부 한계를 갖고 있더라도 지금 이 선에서 이렇게 내는 게 나에게는 차선이었다.
-혹평을 했던 영화도 모두 책에 수록됐다. 이른바 ‘명작’만을 모아서 내지 않았다거나 긴 평론만으로 채우지 않았다는 점을 아쉬워하는 독자도 있다.
=이 책의 목적은 내가 가장 뛰어나다고 생각하는 영화의 평론을 쓰는 데 있지 않다. 한 평론가가 20년간 평론이라는 다양한 바운더리에서 냈던 글을 한자리에 모은 데 있다. 20년간 내가 썼던 다양한 평론 스타일을 보여드리고 싶었고 기왕이면 모든 글이 다 들어갔으면 했다. 신문 지면에 평론가로서 원하는 대로 글을 쓰기 시작한 건 1998~99년부터였기 때문에 1999년부터 2019년까지 총 20년을 잡았고, 그사이 <트랜스포머> <디 워> <신과함께-죄와 벌>에 대해 쓴 글도 함께 들어간 거다. 또한 글량으로만 얘기할 건 아니라고 생각한다. 80매 넘게 쓴 글에 대해 최소한의 자부심을 갖는 것처럼 20년 전 어린 내가 멋모르고 썼던 짧은 글에도 자부심을 갖고 있다. 글의 목적과 실렸던 매체가 달랐을 뿐이다. 그때 쓴 글이 지금보다 더 뛰어난 측면도 있을 거고, 반대로 지금이 더 뛰어난 부분이 있다.
-매체에 쓴 글은 거의 수정하지 않았는데 블로그에 올렸던 글은 평론집 성격에 맞게끔 많이 다듬었더라.
=<조선일보> 시절에 쓴 기사, 네이버나 다음에 연재한 글, <씨네21>에 쓴 영화비평은 기본적으로 많이 안 고쳤다. 그때 못 본 것을 이제 와서 본 척하거나 입장을 바꾸면 정직하지 못하다. 어떤 영화는 지금 관이 달라지기도 했다. 사람은 성장하고 학습하고 10년 전에 몰랐던 것을 지금 알기도 하지 않나. 그런 영화조차 글은 최소한만 고쳤다. 왜냐하면 내가 썼던 글들이 곧 지난 20년간의 나니까. 블로그에 썼던 글은 좀 다르다. 블로그는 검색하다가 아무나 들어와서 볼 수 있는 글이다 보니 아주 쉽게 써야 하고 무엇보다 스포일러를 해서는 안 된다. 그래서 좀 많이 수정했다.
-<기생충> <아사코> <버닝> <언브레이커블> <23 아이덴티티> <글래스> 등의 평론에 할애한 분량과 그 내용을 보면, 최근작 중 확실히 지지하고 싶은 작품이라고 선언하고 싶은 의욕이 느껴진다.
=내가 굉장히 사랑하면서 남들이 안 하고 싶은 얘기를 하고 싶던 작품들이다. <버닝>은 영화가 다루는 사회적 의미가 주로 얘기됐는데, 난 예술에 대해 아주 추상적인 이야기를 잘 풀어낸 작품이라고 봤다. 예술가에게는 소위 말하는 완성도도 중요하지만, 개성이 제일 중요하다. M. 나이트 샤말란처럼 영화를 만들고 한 이야기에 천착해서 20년 넘게 창작하고 돈까지 벌어 그것을 지속 가능한 것으로 만드는 사람은 없다. 그는 전통적 의미에서의 작가다. <언브레이커블> <23 아이덴티티> <글래스>는 슈퍼히어로를 슈퍼히어로영화 장르 안에서 다루면서도 정말 독창적인 결과물이다. 이 3부작에 대해 이렇게 길게 말한 사람은 거의 없었을 것이고, 때문에 내가 글을 쓰는 게 의미가 있을 거라고 봤다. <아사코>는 영화가 갖고 있는 가치에 비해 잘못 보기 쉬운 영화다. 무언가 써야 한다는 의무감이 있었다.
-책이 조금 늦게 출간됐다면 올해 개봉작 중 어떤 작품이 추가로 들어갔을까. 최근에 호평했던 <조커>?
=<조커>는 안 들어갔을 것 같고 <경계선>이나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할리우드>에 대해 쓰지 않았을까. 특히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할리우드>는 사람들에게 오해받는 부분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럴 때 사명감 같은 게 발동한다.
-박찬욱 감독과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이 추천사를 썼다.
=상대에게 부담을 주는 행위 같아서 20년 넘게 책을 내면서 한번도 추천사를 받은 적이 없다. 이 책은 추천사가 필요해서 받은 게 아니라, 내가 너무 좋아하는 두분에게 글을 받는 게 중요했다.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이 쓴 책을 보면 그가 얼마나 좋은 사람인지 알 수 있다. 그의 좋은 언어로 쓴 내 책에 대한 추천사를 받을 수 있다면 정말 행복할 것 같았다. 박찬욱 감독님은 영화감독이면서 지성인이다. 박찬욱 감독님의 경우, <공동경비구역 JSA>가 나오기 전 쓰신 글을 읽으면서 글로 먼저 좋아하게 됐다. 흔쾌히 부탁을 받아주시고 멋진 추천사를 써주셔서 너무 감사하다. 두분의 글은 일반적인 추천사와 좀 다르다고 생각한다. 추측건대 앞으로 난 추천사를 더 안 받지 않을까. 두 감독님에게 받았으니 더이상 받을 필요가 없을 것 같다. (웃음)
-1999~2019년 영화를 다룬 책은 이번에 나왔으니, 고전영화를 다룬 책이 언젠가 나와도 좋을 것 같다.
=난 능력에 비해 하고 싶은 게 많은 사람이다. 인생에 위기는 있었을지언정 매너리즘은 느끼지 못했다. 지금도 쓰고 싶은 책이 20권 정도 있다. 10권은 영화책, 10권은 영화 외적인 책이다. 어떤 책은 목차도 정해놨다. 깊이도 중요하지만 넓이도 중요하다. 깊이 없는 넓이는 가능하지만 넓이 없는 깊이는 불가능하다. 넓다고 해서 깊지 않은 것도 아니다. 영화가 인생에서 가장 중요하고 소중한 업이지만 영화에 관해서만 말을 해야 하나라는 생각을 기본적으로 갖고 있다. 평생 좋아했던 록 밴드 핑크 플로이드나 인문학, 에세이와 사전 중간 지점에 있는 동사활용사전 같은 책도 쓰고 싶다. ‘21세기의 걸작들’, 루이스 브뉘엘이나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 폴 토머스 앤더슨에 대한 책도 쓰고 싶다. 그런데 언제 시간을 내서 쓸 수 있을지는 잘 모르겠다. 인생에서 어떤 일을 반드시 해야한다고는 생각하지 않는 쪽이지만, 아예 안 한다는 것은 아니다. 이렇게 하고 싶은 일이 많은데, 난 매일 허덕이며 능력이 없어 쪼들리고 하루하루 간신히 살아가는 한 가련한 남자다. (웃음) ‘선한 사마리아인 실험’은 바쁜 사람일수록 선하기 어렵다는 걸 보여준다. 너무 바쁠 때마다 이 심리학 실험을 떠올린다. 내가 바쁘기 때문에 악해지는 부분이 있는 게 아닐까 하고. 한정된 시간 속에 인간은 한번밖에 못 살고 쥐꼬리만 한 재능과 시간을 투여해 만든 결과물은 항상 본인 기준보다 모자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언가를 계속하는 건 중요하다.
-예전에 쓴 평론과 최근에 쓴 평론 스타일을 자연스럽게 비교하게 된다. 과거에는 인문·사회과학 분야에 대한 다양한 인용을 섞어 글을 구성했다면 지금은 직접 인용이 상당히 줄어들었다.
=첫 번째 이유는 글의 길이다. 글이 짧으면 짧을수록 내용적으로 구사할 수 있는 데 한계가 있고 형식이 중요해진다. 요리 비법처럼 쓴다거나 <순애보> 평론처럼 주인공 이름으로 글을 전개한다든가 형식을 좀 다르게 시도하게 된다. 또한 상대적으로 문장력이 요구된다. 그런데 긴 글의 경우 문장력보다는 다른 부분에 초첨을 맞출 수 있다. 두 번째 이유는, 예전에는 그런 인용을 상대적으로 내가 재미있어했지만 이젠 세상에 대해 하고 싶은 말이 더 많은 것 같다. 과거에는 관객과의 대화(GV)를 하면 1시간 중 30분은 영화에 관한 일반적인 이야기와 감독 인터뷰, 다른 사람의 관점들에 대해 말하다 뒤에 30분만 내 생각을 밝혔는데, 요즘엔 100분 동안 ‘이동진의 라이브톡’을 하면 내 생각을 95% 정도 이야기한다.
-영화 상영 후 행사를 2시간 가까이, 심지어 그 이상할 때도 있지 않나. 영화에 대해 말로 얘기할 때와 글로 쓸 때는 어떻게 다른가.
=영화를 보는 시각은 비슷할 수 있지만 ‘이동진의 라이브톡’과 평론은 그 내용이 같을 수 없다. 글은 글다워야 하고 말은 말다워야 한다. 글처럼 말을 하면 그것은 말에 대한 예의가 아니고 글처럼 말을 하면 그것 역시 마찬가지다. 기본적으로 말은 뜨거운 거다. 뜨거움이 사람을 사로잡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강의는 몰입감이 중요하게 되고 연희성에 매혹되는 부분이 있다. 기본적으로 퍼포먼스의 성격을 갖고 있고 순발력이 중요하다. 반면 글은 차갑다. 그것을 누가 쓰느냐와 무관하며 사고력과 글을 구성하는 구조가 중요하다. 받아들이는 사람 입장에서도 개인의 생각이 많이 작용하게 된다.
-말이 각광받는 시대다. 모든 것을 유튜브에서 해결하고 영화 유튜버들의 영향력이 갈수록 커지고 있다. 최근 팟캐스트 <이동진의 빨간 책방>이 유튜브 방송을 시도하기도 했으나 지금은 업로드가 중단됐다. 새 플랫폼에 대해 살짝 숨 고르기를 하고 있는 듯하다.
=개인 작업실을 만든 후 좋은 의미로 움츠러들게 된다. 밖에 나가기 싫다. (웃음) 그동안 일을 너무 많이 하면서 능력은 없을지 몰라도 열심히는 산 거같은데, 앞으로는 그냥 여기서 유유자적하며 지낼까 싶기도 하다. 한편으로는 내가 일중독인 건 사실이라 해보고 싶은 게 여전히 많다. 음악방송도 하고 싶고, 이 공간을 활용해 역사 강의도 하고 싶다. 숨 고르기 단계라고 표현한 건 정확하게 짚으신 거다. 내가 유튜브 같은 새로운 매체로 갈 수도, 아닐 수도 있다. 스스로가 유튜브에 맞는 사람인지 생각해보고 있는데, 솔직히 말하면 잘 안 맞는 것 같다. 새로운 매체에 대한 환상은 없다. 무엇을 하게 되든 그건 돈 때문에 하는 건 아닐 거다.
-그런 시점에 20년을 집대성한 ‘책’을 냈다는 게 의미심장하다.
=영화평론가로서 정확하고 깊게 보고 싶은 욕망도, 그것을 좋은 언어로 표현하고 싶은 욕망도 있다. 짧은 글은 오히려 후자에 적합할 수 있다. 평론가로서 아무리 뛰어나다고 해도 한줄평을 쓸 때 언어가 도구라는 것을 몰각한다면 그 사람은 한줄평을 못 쓰는 거다. 한줄평은 영화에서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을 살려 언어의 말맛을 살려 쓰는, ‘편집’이 중요한 글 아닌가. 반대로 이번 책을 위해 80매 분량의 글을 여러 편 쓰면서 아예 이런 식으로 계속 써볼까 하는 생각도 했다. 이 책이 이렇게 많이 팔릴지 몰랐다. 출간 초기 반응은 최근 내가 냈던 책 중 굉장히 좋은 편이다. ‘이렇게 책을 써도 초반에 읽어주는 독자가 만명은 되는구나, 그렇다면 1년에 3~5편의 영화를 골라 장문의 평론을 쓰고 2~3년에 한번씩 평론집을 낼까?’ 이런 생각도 했다. 그러면 <영화는 두 번 시작된다>와 달리 왜 다양한 영화를 다루지 않았냐며 아쉬워하는 사람도 있을 수 있겠다. 모두를 충족시키는 것은 불가능하고 양자 사이에서 이쪽도 하고 저쪽도 하고 싶은 상황이다.
-긴 글을 점점 회피하고 문해력이 떨어진다고들 하는 시대에 따라 글쓰는 방식이 달라져야 한다는 고민은 없었나.
=글쓰기를 아주 좁게 한정하지는 않는다. 평론가라면 최소 30매 이상의 글을 써야 하고 문장은 어때야 하고 말이 아닌 글로 전달해야 한다는 식의 생각은 없다. 한줄평이 평론가가 해서는 안 되는 쓰레기 같은 일이라고도, 80매 이상의 글을 쓰는 게 평론가의 본령이라고도 생각하지 않는다. 가장 좋은 건 글로 쓰는 것이지만, 직업인으로서 쉽지 않은 상황이 있고 지금 말로 평을 하는 경우가 많다. ‘이동진의 라이브톡’이 다음주면 92회차가 된다. 한번에 적게 오면 1200~1300명, 많이 오면 3천명 가까이 오는 행사가 평론가에게 굉장히 소중한 기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대의 흐름에만 맞춰가면 안 된다. 긴 글을 읽지 않는 시대라고 해서 짧은 글만 쓰고 말만 하려 한다면, 그것은 글을 쓰는 직업인으로서 한계가 있는 태도라고 생각한다. 말을 좋아하는 시대라 해도 당연히 글을 써야 하고, 짧은 글이 인기 있는 시대라도 긴 글 역시 써야 한다.
-이동진은 영화를 ‘종교학적’으로 분석하기를 좋아하고 종교영화를 유독 더 좋아한다는 식의 편견 섞인 반응이 있다.
=세상에는 너무 많은 정보가 있고, 뇌가 이것을 모두 수용하면 터져버릴 테니 뇌는 뇌 나름대로 정보를 거르고 저장하는 방식이 있다. 가장 많이 적용되는 게 편견이고 그중 가장 쉬운 게 ‘귀인의 오류’다. 원래 사람이 그렇다고 보는 거다. 이동진은 종교학과를 졸업했으니 종교 전문가일 거 같고 종교 얘기만 나오면 좋아할 거 같다고 한다. 내가 종교영화가 아닌 작품을 호평한 게 더 많은데도 말이다. 어떤 사람의 글을 평가하려면 글이 나올 때마다 매번 제대로 읽어야 하는데 그게 어려우니까 사람을 판단하는 거다. 감독도 마찬가지다. 많은 평론가들이 좋은 감독이 좋은 영화를 만든다고 생각한다. 나는 그 반대라고 본다. 좋은 영화를 만드는 사람이 좋은 감독이고, 좋은 영화를 만드는 동안에만 그 사람은 좋은 감독이다. 때문에 너무 좋은 데뷔작을 만들었지만 그 이후 작품은 형편없는 경우도 있다. 첸카이거는 <패왕별희>(1993) 당시 훌륭한 감독이었지만 지금은 한심한 수준이 됐다. 마티외 카소비츠의 데뷔작 <증오>(1995)는 굉장한 영화였지만 이후에는 엉망진창이다. 왜 그럴까, 그냥 두 사람은 특정 작품을 잘 만든 거고 지금은 좋은 감독이 아닌 거다. 근데 그걸 사람으로 놓고 보면 좋은 감독이 좋은 데뷔작을 만들었으니 그다음에도 좋은 영화를 만들 거라 생각하게 되고 거기에서 논리적 문제가 생긴다.
-이번 책을 통해 지난 20년을 결산했다. 앞으로의 20년은 어떻게 내다보나.
=블로그 머리글이 ‘하루하루는 성실하게, 인생 전체는 되는 대로’다. 사실 일주일이 어떻게 될지도 잘 모른다. 예전에는 인생 계획을 짜서 사는 사람이었는데 내가 노력했음에도 인생이 뒤틀려서 뜻대로 되지 않은 적이 있다. 사람이 그나마 자기 의도대로 꾸려갈 수 있는 건 짧은 시간 단위지 긴 세월이 아니다. 10년 뒤 내가 어떻게 될지는 예상할 수 없다. 큰일은 내가 할 수 있을 만한 능력이 없다는 걸 잘 알고, 나중 일은 너무 먼 미래라서 전혀 모른다. 그런 상황에서 나는 지금 이 인터뷰를 어떻게 잘해내고, 오늘 저녁에 무엇을 먹고, 몸 상태가 어떠하니까 몇시쯤 잠자리에 들어야 한다는 정도만 생각할 뿐이다. 난 이런 걸 잘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