터미네이터가 또 돌아왔다. 그런데 이전의 컴백과는 뭔가 다르다. 이번엔 사라 코너 역의 배우 린다 해밀턴이 T-800과 함께 돌아왔고, 이야기의 창조주인 제임스 카메론 감독이 드디어 제작자로 복귀했다. <터미네이터2>(1991) 이후 28년 만의 일이다. 문제는 5편의 시리즈영화가 만들어지는 동안 오리지널 스토리를 가지고 덧붙이거나 변주할 수 있는 것은 사실상 모두 해봤다는 것. 사라 코너의 유년시절부터 심판의 날 이후 폐허가 된 미래 사회 전쟁까지. 과거, 현재, 미래는 물론 시간여행의 패러독스까지 모두 훑어본 이 시점에서, 심지어 <터미네이터 제니시스>(2015)의 트릴로지 발표 계획에 반기를 든 것이나 마찬가지인 새로운 3편 <터미네이터: 다크 페이트>의 컴백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이번 영화의 부제처럼 터미네이터의 부활을 꿈꿨던 모든 팬들의 다크 페이트인 걸까. 지난 10월 21일, 대대적인 아시아 홍보를 위해 서울을 거점 삼아 내한한 팀 밀러 감독과 배우들이 들려준 이야기와 제작진의 프로덕션 코멘트를 토대로 <터미네이터: 다크 페이트>가 보여주는 컴백의 이유를 짚어봤다. 바쁜 내한 일정 속에서 단 10분간 나눴던 팀 밀러 감독과의 인터뷰도 덧붙인다.
터미네이터와 존 코너의 여정에서
사라 코너가 미래를 바꿔놓은 후 20여년이 흘렀다. 총 5편의 지난 <터미네이터> 시리즈는 간단하게 요약하면 미래의 인공지능 시스템(스카이넷)이 과거로 살인병기(T-800, T-1000, T-X, T-3000)를 보내 시스템을 망쳐버릴 인류(존 코너와 그의 엄마 사라 코너)의 싹을 잘라버리려 시도한다는 이야기였다. 제임스 카메론 감독이 어느 날 꿈에서 봤던, 식칼을 들고 포화 속으로 들어가던 금속 조각상의 이미지에서부터 출발해 만들어진 ‘터미네이터’는 시리즈를 거듭하면서 살인병기도 됐다가 든든한 조력자도 됐다가 급기야 로봇의 외피인 신체조직이 인간처럼 늙어버려 할아버지 터미네이터가 되어서 등장했다. 웬만해선 전원이 꺼지지 않는 터미네이터이다 보니, 배우가 실제 나이 들어가는 모습 그대로 속편에 출연해도 무방한 공무원급 캐릭터 설정인 셈이다. 종종 변화를 주기도 했다. 시리즈 4편인 <터미네이터: 미래전쟁의 시작>(2009)에서는 CG를 동원해 젊은 시절의 아놀드 슈워제네거가 연기한 T-800을 깜짝 등장시키기도 했다. 심지어 5편 <터미네이터 제니시스>에서는 젊은 T-800과 늙은 T-800이 과거 <터미네이터>(1984)의 공터 장면을 똑같이 재현한 장면에서 만나 맞붙기까지 했다. 시리즈가 거듭될수록 터미네이터만 끝없이 변주된 것은 아니다. 1편인 <터미네이터>에서 살인병기 터미네이터의 공격을 피해 우여곡절 끝에 살아남았던 사라 코너(린다 해밀턴)는 미래에서 온 저항군 병사 카일(마이클 빈)과의 사이에서 아들 존 코너(에드워드 펄롱)를 낳는다. 그리고 <터미네이터2>에서 10대로 성장한 존 코너는 엄마와 함께 업그레이드된 살인병기 터미네이터 T-1000에 맞서 살아남는데 이후 그는 시리즈가 가장 주목하는 캐릭터가 되었다. <터미네이터3: 라이즈 오브 더 머신>(2003)에서는 청년 존 코너(닉 스탈)를, <터미네이터: 미래전쟁의 시작>에서는 심판의 날 이후 저항군 리더로 성장한 존 코너(크리스천 베일)를, 그리고 5편 <터미네이터 제니시스>에서는 인공지능과 싸워 이긴 인류의 지도자 존 코너(제이슨 클라크)를 전면에 앞세웠다. 물론 3편에서 크리스티나 로켄이 연기한 T-X, 5편에서 사라 코너의 젊은 시절을 연기한 에밀리아 클라크의 활약이 있었지만 새로운 시리즈를 기획하는 데 있어서 여성 캐릭터들은 어쩔 수 없이 중심에서 약간 비껴나 있었던 게 사실이다.
사라 코너의 여정으로
<터미네이터: 다크 페이트>는 제임스 카메론 감독이 직접 제작에 참여하는 시리즈 사상 28년 만의 복귀작이라며 그 어느 때보다도 강력하게 정통성을 강조하고 있다. 감독은 “맥시멈 에포트!”를 외치는 19금 히어로의 탄생을 알렸던 영화 <데드풀>(2016)의 팀 밀러. 정통과 파격이란 두 마리 토끼를 다 잡겠다는 의지가 읽히는 라인업으로 새 옷을 갈아입은 시리즈는 지난 5편의 영화들이 35년 동안 주목했던 남성 캐릭터가 아니라 여성 캐릭터들에 더욱 주목한다. 특히 린다 해밀턴의 시리즈 복귀는 정통과 시대정신에 입각한 파격적인 전개를 대표하는 영리한 전략이다. 이미 예고편에서부터 바주카포를 날리던 사라 코너의 모습에 열광했던 관객이라면 기대를 한껏 품어도 좋다. 1956년생인 린다 해밀턴은 액션을 하는 척 폼만 잡는 것이 아니라 젊은 배우들 못지않게 액션의 전체 동작을 보여준다. 편집 뒤에 숨지 않았다는 말이다. 그녀가 적에게 폭탄 세례를 안긴 다음 시리즈의 인장이라고 할 수 있는 명대사, “I’ll be back!”을 외치는 순간은 어린 시절 감탄해 마지않던 여전사 사라 코너의 완벽한 부활을 선언하는 올해의 명장면이다.
아마도 제임스 카메론 감독이 제작자 복귀를 선언했던 이유가 바로 이런 사라 코너의 압도적인 등장 때문이었을지 모르겠다. 그가 보고 싶었던 장면은 자신의 영화를 똑같이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엔딩 이후 사라 코너가 지금껏 어떤 삶을 이어나가고 있었는지, 어떻게 성장했는지 그 완벽한 후일담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 넘겨짚어본다. <터미네이터: 다크 페이트>는 <터미네이터2>의 엔딩 이후 사라 코너가 어떻게 심판의 날을 기다리고 있었는지를 보여주는 멋진 뒷이야기로 영화를 시작한다. 영화 시작과 동시에 이미 지난 시리즈 최고의 클라이맥스를 보여줬는데 이제 시작이라니.
절망적인 공포는 그대로
때는 1998년, 사라 코너는 예정되어 있던 심판의 날, 1997년 8월 29일의 비극을 막았으나 끝내 아들 존 코너를 지키지 못한다. 그로부터 22년 후, 어느 날 갑자기 지구에 나타난 괴상한 살인병기가 멕시코를 들쑤시며 대니 라모스(나탈리아 레예스)라는 여자를 찾아내려 혈안이다. 그리고 지난 22년간 어딘가에 숨어 이날만을 기다려왔던 사라 코너가 드디어 움직이기 시작한다. 사라 코너의 등장과 함께 영화는 기본적으로 1편과 2편이 가졌던 이야기의 골격을 어느 정도 유지하면서 변주를 한다. 1편과 2편이 어두운 미래에 맞서는 젊은 여성의 생존에 관한 이야기로 공포를 선사했다면, 이제는 다소 진부하다고 느껴질 정도의 고풍스러운 인간과 초인공지능간의 대립을 다룬다. 새로운 터미네이터 Rev-9(가브리엘 루나)이 멕시코시티에 사는 평범한 여자 대니 라모스를 죽이기 위해 미래에서 현재로 시간을 건너오고 의문의 여자 그레이스(매켄지 데이비스)가 자신을 강화된 인간, 즉 슈퍼솔저라고 소개하면서 그녀를 위기에서 구해준다. 하지만 Rev-9의 무지막지한 공격에 전세가 밀릴 위기에 처하고 그 순간 사라 코너가 등장해 상황을 잠시 종료시킨다. 새롭지만 전혀 관계를 추측할 수 없는 대니와 그레이스와 사라, 세 사람은 자신들을 둘러싼 이상한 운명의 소용돌이를 정면돌파하는데 이들의 관계가 정확히 어떻게 정리되는지를 여기서 자세하게 설명할 수는 없다. 하지만 알 수 없는 미래와 속절없이 다가오는 운명의 굴레 앞에서 절망적인 싸움인 것만은 틀림없다. 제임스 카메론 감독은 이에 대해서 “1, 2편의 강렬함과 절대로 봐주지 않는 절망적인 공포 분위기가 이번 영하에서도 그대로 이어진다”라고 말한다.
제임스 카메론의 비전과 팀 밀러의 혁신
제임스 카메론 감독이 직접 이번 영화의 스토리 개발에 참여한 가운데 팀 밀러 감독은 <터미네이터> 시리즈가 지닌 캐릭터 특징 가운데 “헌터와 가디언, 사냥감으로 이뤄진 기존의 삼각관계를 유지하는 것이 중요했다”고 강조해서 말했다. 다시 말해 헌터 역의 T-1000과 가디언 역의 T-800, 그리고 사라 코너와 존 코너로 대표되는 구조를 2019년 버전으로 새롭게 각색했다는 말인데 앞선 스토리를 대입해보면 관계가 조금 복잡해진다. 새롭게 등장하는 병기 Rev-9을 헌터 역에 두면 슈퍼솔저 그레이스와 사라 코너가 동등한 가디언의 입장에 놓이게 되는데 왜 Rev-9은 사라 코너가 아니라 새로운 인물 대니를 쫓는 것일까. <터미네이터: 다크 페이트>가 3, 4, 5편과는 다른 비전, 그러니까 제임스 카메론 특유의 입김이 작용한 새로운 비전을 제시하는 부분이 바로 이 질문에 숨겨져 있다.
또한 <데드풀>의 팀 밀러 감독 연출작이기에 많은 관객이 기대를 갖고 있을 액션 연출을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다. 3편에서 이미 다뤄졌던 성역할의 반전인 T-X의 등장, 그리고 4, 5편이 보여준 심판의 날 이후 폐허가 된 지구의 모습 등을 거치면서 어쩌면 시리즈의 본색에 너무 많은 군살을 덧입힌 것이 아닌가라는 불만을 제기할 수도 있겠다. 이번 영화는 애초 제임스 카메론 감독이 <할로윈>(1978)과 유사한 분위기의 공포스러운 추격전을 SF 버전으로 만들고 싶어 했던 그 의도에 좀더 부합된 결과라고 말할 수 있다. 거대한 스펙터클의 향연보다는 벗어날 수 없는 끈질긴 추격전의 서스펜스를 추구한 액션이다. 시리즈 전체에 오마주를 바치듯 완성된 무지막지한 자동차 추격 장면과 비행기 추락 장면, 거대한 댐 장면의 액션 등은 시리즈 본연의 재미를 추억하게 만드는 미덕이 있다.
“미지의 미래가 우릴 향해 다가온다. 내 인생 처음으로 희망을 맛본 지금, 우리는 터미네이터라는 기계조차 깨달은 생명의 가치를 다시 한번 배울 수 있다.” <터미네이터2>의 엔딩에서 사라 코너가 했던 말 이후, 결코 사그라들지 않은 멸망의 공포를 이제는 정말 종식시킬 시기다. 그만큼 결연한 의지의 캐릭터들이, 특히 여성 캐릭터들이 전면에 나서서 또 한번 운명을 뒤바꿀 전쟁을 치르고 있다. 이 시리즈, 죽지 않고 계속해서 다시 돌아와도 괜찮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