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제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신의 한수: 귀수편>은 전편 <신의 한 수>(2014)에서 아주 짧게 등장한 바둑 고수 귀수의 스핀오프다. 귀수는 전편에서 태석(정우성)이 노트를 통해 벽을 두고 바둑을 두던 상대로, 나중에 관철동 주님(안성기)으로부터 그가 바둑 고수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이 영화는 바둑밖에 모르는 어린 시절의 귀수(권상우)가 아픔을 겪고 집을 나가 스승(김성균)을 만나고, 그로부터 혹독한 수련을 거친 뒤 냉혹한 내기 바둑판에 뛰어들어 강호의 고수를 차례로 상대하는 무협영화의 서사를 따른다. 이 영화는 10편 남짓한 단편영화를 연출하고, 곽경택 감독의 <태풍>(2005), 장률 감독의 <경계>(2007) 등 여러 영화의 조감독으로 활동한 리건 감독의 장편 데뷔작이다. 개봉(11월7일)을 하루 앞두고 만난 리건 감독은 “쉼 없이 달려왔다. 후련하면서도 긴장된다”고 소감을 밝혔다.
-연출을 제안받았을 때 이야기의 어떤 점에서 가능성을 보았나.
=전편을 그대로 이어가는 이야기였다면 선택하지 않았을 거다. 시나리오를 처음 읽었을 때 속편이라는 생각이 전혀 들지 않았다. 그만큼 귀수라는 캐릭터가 마음에 들었다. 귀수가 어릴 때부터 혼자서 고생하고 냉혹한 내기 바둑판에 뛰어들었듯이 나 또한 장률 감독의 <경계>에서 조감독을 맡은 뒤 오랫동안 아팠던 적이 있다. 충무로로 돌아와 좋은 모습을 보이기 위해 노력한 것도 귀수와 닮았다. 귀수의 인생을 고민하면서 다양한 장치를 활용해 돌아가는 이야기보다 도장깨기 방식으로 정면승부하는 이야기가 적절하다고 생각했다.
-귀수가 스승을 만나 혹독한 수련을 받은 뒤 바둑 고수를 차례로 상대하는 서사는 무협영화와 흡사하다.
=서사 전개 방식은 정통 무협영화를 따랐다. 태석이 형의 죽음에 대한 복수를 하면서 사건이 시작되는 전편과 달리 귀수편은 시리즈의 스핀오프다보니 서사를 시간 순서대로 전개시키고 싶었다. 그렇다고 어린 시절의 귀수 시퀀스를 너무 드라마처럼 보여주면 신파가 될 것 같아 임팩트 있게 풀어가려고 했다. 시나리오를 쓴 유성협 작가와 1년 동안 수시로 만나 영화 얘기는 하지 않고 서로 살아온 얘기를 주고받았다. 그게 영화에자연스럽게 반영된 것 같다.
-감독의 자전적인 경험이 상당 부분 반영된 이야기라고도 볼 수 있겠다.
=귀수가 바둑을 정말 두고 싶어 했고, 그 과정에서 마음의 상처를 받았으며, 고난을 극복하고 다시 바둑판으로 돌아왔듯이 나 또한 영화를 정말 만들고 싶었고, 작업을 하다가 크게 아팠으며, 영화판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묵묵히 자신의 삶에 정면승부하는 귀수에게 동질감을 많이 느꼈다.
-원래 바둑을 잘 알고 있었나. 영화에 등장하는 여러 대국들은 귀수가 처한 상황을 대변하는데.
=중학생 때까지 주말마다 아버지와 바둑을 두었다. 이 영화를 준비하면서 프로바둑기사로부터 2, 3개월 동안 혹독한 수련을 받았고, 그 덕분에 현재는 인터넷 바둑 6, 7급 정도의 실력을 갖췄다. 겉으로 보면 바둑은 정적인 스포츠지만 속을 들여다보면 바둑만큼 냉혹한 스포츠가 없다. 오죽하면 바둑 돌을 사석(死石, 잡힌 돌)이라고 하겠나. 기보(한판의 바둑을 두어 나간 기록)를 귀수의 여정에 맞췄다. 귀수의 인생은 과거에 머물러 있다. 어린 기수가 혼자서 떠나 자신의 모든 것을 바둑에 쏟아붓는 과정을 한판의 바둑으로 그려나갔다. ‘세사기일국’(世事棋一局)이라고, 인생은 한판의 바둑과 같다고 한다. 그게 이 영화의 주제를 드러내는 대사다.
-권상우의 어떤 점이 귀수에 적합하다고 보았나.
=되돌아보면 내가 연출한 단편영화 대부분 가족에 관한 이야기였다. 콤플렉스가 있나 싶을 만큼 가족을 소재로 한 영화를 많이 만들었다. 귀수는 가족에 대한 소중함을 아는 배우가 맡았으면 했다. 특히 어린시절의 귀수가 겪는 아픔과 그로 인한 복합적인 감정이 눈빛에 담겨야 했는데 그걸 담을 수 있는 배우가 권상우였다.
-촬영 전에 그에게 주문한 건 뭔가.
=‘누구를 만나든지 간에 감정을 드러내지 말고 꼭꼭 눌러라. 감정적인 폭발이나 물리적인 폭력은 이 영화가 추구하는 방향과 거리가 머니 울화가 터지더라도 참아라. 악당과 맞붙는 영화의 마지막에 눌렀던 감정이 폭발했으면 좋겠다.’ (권)상우씨가 선을 절묘하게 잘 타며 이 주문을 따라주었다. 이 영화가 다시 만들어져도 권상우 말고 귀수 역할을 맡을 수 있는 배우는 없다고 생각한다.
-영화에는 액션 신이 크게 세번 등장한다. 김철준 무술감독에게 주문한 건 뭔가.
=귀수는 특정 무술을 배운 사람이 아니다. 바둑에서 수십수 혹은 수백수를 내다보듯이 그가 다음 수를 동물적으로 내다보는 액션을 구사하길 원했다. 좁은 골목길 액션 시퀀스는 귀수의 감정을 꾹꾹 누른 채 맨몸 액션을 구사한다. 귀수와 갈고리 일행이 맞붙는 화장실 액션은 플래시를 활용해 화려함을 극대화하고, 좁은 공간에서 숨 쉴 틈 없이 밀어붙인다. 주물공장 액션 신은 귀수와 그와 맞붙는 외톨이(우도환)를 거울처럼 대비시키려고 했다.
-부산잡초(허성태)를 단순한 악역으로만 묘사하지 않아 인상적이었다.
=스핀오프다보니 전편과의 연결고리를 만드는 게 중요했다. 전편에서 귀수가 교도소에서 태석과 바둑을 두지 않나. 그러다보니 귀수가 감옥에 가는 이유도 직접 설정해줘야 했다. 스포일러 때문에 자세하게 설명하긴 어렵지만, 그 점에서 부산잡초 또한 전편에서 이어지는 이야기와 관련 있다. 악역이던 그가 변화하게 되는 과정을 관객이 납득할 수 있도록 섬세하게 표현하려고 했다.
-리건이라는 이름은 본명인가. 본명이 아니라면 어디서 유래했나.
=몽골에서 <경계>를 찍을 때 몽골 스탭 중 하나가 나를 ‘한’이라고 불렀다. 몽골의 황제를 뜻하는 칸(Khan)인데, K는 묵음이라고 하더라. 마침 아이들 이름이 ‘건’자 돌림이라 칸에서 따온 ‘건’이라 지었다.
-<태풍> <경계>에서 조감독으로 활동했지만 데뷔하기까지 꽤 오래 걸렸다.
=30대 때 정신없이 단편영화를 만들고, 상업영화 연출부로 활동했다. 가까운 지인 중 한명이 어느 날 내게 “꿈이 뭐냐”고 묻더라. 30살에 꿈에 대한 질문을 받으니 당황스러웠다. 하지만 몸이 오랫동안 아프면서 그 말이 버틸 수 있는 힘이 되었고, 덕분에 여기까지 올 수 있었다.
-포기하고 싶은 순간은 없었나.
=단 한번도 없었다. 몇년을 버티면서 영화에 대한 의지를 불태우니 이것 말고는 할 줄 아는 게 없더라. 장사할 수 있는 말주변이 있는 것도 아니고. 밥 먹을 때마다 영화 생각밖에 안 했다.
-세사기일국이라고 데뷔하기까지의 과정을 바둑에 비유하자면.
=순수하게 정면 승부를 하려고 했다. 바둑에서 가까운 곳에 두는 걸 하변, 멀리 보고 두는 걸 상변이라고 한다. 그동안 정면 승부를 하기위한 하변을 해왔다고 생각한다.
-개봉을 앞두고 있는데 부담감은 없나.
=부담을 느낄 만한 처지가 아니다. 그럴 여유가 있으면 작품에 더 몰입해야 한다. 바둑을 잘 몰라도 재미있게 볼 수 있도록 연출했다. 동시에 프로 경력 30년 이상의 바둑기사님에게 철저한 검증을 받아 기보 하나하나를 상황에 맞춰 설정했으니 영화 속 대국을 자세히 보면 숨은 뜻이 눈에 들어올 것이다. 어쨌거나 긴장된 마음조차 소중하게 즐기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