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지보고]
히치콕의 영화를 닮은 스릴러 <굿 라이어> 뉴욕 현지보고
2019-12-03
글 : 양지현 (뉴욕 통신원)
진실 혹은 거짓

2009년 영국, 단아해 보이는 노년의 한 여인이 온라인 데이트 사이트에 프로필을 만들고 있다. ‘술을 마십니까’라는 질문에 ‘아니오’라고 클릭한다. 그녀는 한손에 와인 잔을 들고 있다. 노년의 한 남성이 심각하게 컴퓨터를 바라보며 프로필을 만들고 있다. ‘흡연을 하십니까’라는 질문에 ‘아니오’라고 답한다. 그 역시 한손에 담배를 들고 있다.

몇년 전 남편을 잃은 베티(헬렌 미렌)는 말벗이 되어줄 비슷한 연령대의 남자를 찾고 있었다. 그런 그녀 앞에 나타난 사람은 단정하게 차려입은 로이(이언 매켈런)다. 첫 만남을 가진 베티와 로이는 서로가 프로필에 약간의 거짓말을 했다고 고백하고 대화를 시작한다.

서로 큰 기대를 하지 않았다는 이들은 의외로 케미가 잘 맞아 놀라고, 다음 데이트를 기약하며 헤어진다. 베티는 걱정이 많은 손자 스티븐(러셀 토비)이 운전하는 차를 타고 먼저 떠난다. 기차를 타고 집으로 간다던 로이는 베티가 떠나자 지나가던 택시를 잡아 타고, 어디론가 향한다. 그가 도착한 곳은 스트리퍼가 춤을 추는 성인 클럽. 이곳에서 로이는 비즈니스맨으로 보이는 남자들과 함께 투자에 대해 논의를 시작한다. 과연 베티와 로이의 거짓말은 처음 만나는 상대방에게 좋은 인상을 주기 위한 사소한 것일까? 아니면 거기엔 또 다른 사연이 숨어 있을까?

앨프리드 히치콕 영화를 연상시키는 <굿 라이어>는 빌 콘던 감독이 연출한 스릴러다. 기존 할리우드영화와 크게 다른 점이 있다면 한창 주가를 올리고 있는 스타가 아니라 70~80대 베테랑 배우들이 주연을 맡았다는 것이다. 그리고 더욱 놀라운 사실은 이 작품이 헬렌 미렌과 이언 매켈런이 함께하는 첫 번째 영화라는 것. 누가 진실을 얘기하는지 짐작하기 어려운 <굿 라이어>에서 두 배우는 관객이 가늠하기 힘들 정도의 엄청난 아우라를 발산한다. 미렌과 매켈런의 레이어 있는 연기는 이들이 출연했던 과거 작품을 연상시키기도 한다. 미렌의 연기에서 TV시리즈 <프라임 서스펙트>와 <더 퀸>(2006), <요리사, 도둑, 그의 아내 그리고 그녀의 정부>(1989) 등의 작품이 언뜻 느껴진다. 매켈런의 연기에서는 <죽음보다 무서운 비밀>(1998), <엑스맨> 시리즈에서 보여준 날카로움과 고뇌하는 모습의 캐릭터가 떠오른다. 이외에도 스티븐 역의 러셀 토비와 빈센트 역의 짐 카터, 블라드 역의 요한네스 회이퀴르 요한네손 등 조연으로 출연하는 배우들의 연기도 돋보인다. 로이의 친구로 출연한 짐 카터는 TV시리즈 <다운튼 애비>로 유명한 연기파 배우로 작품 전체에 무게감을 더한다. 또한 <굿 라이어>는 <갓 앤 몬스터>(1998), <미스터 홈즈>(2015), <미녀와 야수>(2017) 등에 이어 매켈런과 콘던이 함께한 네 번째 작품이다. 전반에 걸쳐 이들의 자연스러운 작업방식이 잘 스며들어 있다.

지난 11월 15일 미국에서 개봉한 <굿 라이어>는 맷 데이먼과 크리스천 베일이 주연한 <포드 v 페라리>, 크리스틴 스튜어트 주연의 <찰리스 에인절스> 등과 같은 주에 개봉했다.

●빌 콘던 감독 인터뷰, "지금까지 한 캐스팅 중 가장 쉬웠다"

-<굿 라이어>를 보면서 앨프리드 히치콕 영화가 연상되었다.

=그런 면도 있다. 이언 매켈런이 연기하는 캐릭터의 경우 <열차 안의 낯선 자들>(1951) 같은 느낌이 든다. 악역과 공범 같은 생각이 들게 하니까. 캐릭터의 행동에 충격을 받으면서도 동시에 무사히 도망칠 수 있기를 바란다. 그렇게 복잡한 도덕성에 대해 다룬다는 점에서 비슷할 수 있다. 일부 장면은 히치콕의 <찢어진 커튼>(1966)에서 영감받았다.

-이언 매켈런은 같은 편에 서고 싶은 악역을 잘 연기하는 것 같다.

=바로 그거다. 그가 연기하는 역은 평생 반사회적 인격장애를 가진 80살 캐릭터다. 그럼에도 다음 희생양으로 선택한 한 여인을 만남으로써 악행을 멈추고 다른 인생을 살고 싶어 하는 갈망을 보여준다. 이언은 이같은 내면의 갈등을 겪으면서도 결국 자신의 본성을 극복하기 힘들어하는 모습을 잘 묘사했다. 이런 내면연기는 극소수의 배우만이 가능하다고 본다.

-헬렌 미렌과 이언 매켈런을 함께 캐스팅하는 과정은 힘들지 않았나.

=정말 쉬웠다. (웃음) 이언과는 세 작품을 함께했고, 늘 다시 일할 수 있는 기회를 찾는 사이다. 원작 소설을 읽다가 그에게 적합한 작품이라 생각돼 연락했더니 단번에 ‘예스’라고 하더라. 헬렌과는 LA 호텔에서 미팅을 가졌다. 배역을 처음으로 제안했는데 각본에 대해 몇 가지 좋은 아이디어까지 말해줬다. 지금까지 한 캐스팅 중에서 가장 쉬웠던 것 같다.

-두 배우가 보여주는 액션 장면도 있는데, 데임(dame) 헬렌 미렌과 서(sir) 이언 매켈런에게 어떻게 그런 요청을 했는지.

=재미있었다. (웃음) 대역은 전혀 없었다. 기억하기론 촬영이 마지막주에 이뤄졌는데, 스턴트 담당자들과 오랫동안 안무에 대해 얘기했다. 담당자가 두 배우에게 일단 보여줬고, 둘 다 아이처럼 신나했다. 스턴트를 실제로 할 수 있다는 아이디어 자체가 즐거웠나보다. 두 배우는 준비가 돼 있었는데 다른 사람들이 겁나했다. 헬렌이 이언에게 심하게 발길질하는 장면이 있는데, 이언이 “헬렌, 더 세게 차도 괜찮아”라고 계속 말하더라. 헬렌이 유일하게 걱정한 부분이 발길질 장면이다. 이언이 다칠까봐.

-<미녀와 야수> <위대한 쇼맨> 등 대작에 연달아 참여한 후 비교적 규모가 작은 <굿 라이어>를 선택한 이유가 있다면.

=왜 그러나? <굿 라이어>가 2019년에 가장 큰 작품이 될지 어떻게 아나? (웃음) 규모에 대해 거의 신경 쓰지 않는다. 마음이 끌리는 작품을 선택하는 편이다. 작업하기에 흥미로운 점이 있는 것들을 찾는다. 일부에서는 내가 <트와일라잇>을 선택한 것에 의구심을 갖는데, 정말 흥미로워서 선택한 작품이었다. 관객이 그토록 애정을 갖는 멜로드라마에 관심이 갔다. 일부러 큰 작품을 찾거나 그다음에 작은 작품을 찾거나 하지는 않는다.

-그렇다면 규모에 따라 작품에 접근하는 방법이 다른가.

=그렇지 않다. 규모와 상관없이 비슷한 준비 과정을 거친다. 아무리 규모가 큰 작품을 만들어도 제작비는 늘 모자라기 마련이니까. (웃음) 물론 제작비 면에서는 대작의 1/10 정도가 소요됐지만 창작적인 면에서는 완벽한 자유가 주어졌다. 디즈니 영화를 만들 때에는 장난감 담당자들과도 만나야 하는 것이 큰 차이점이라고나 할까?(웃음)

●배우 헬렌 미렌, 이언 매켈런 인터뷰, "우린 평생을 연기하면서 산다"

헬렌 미렌, 이언 매켈런(왼쪽부터).

-처음으로 영화에서 함께 작업했다.

=헬렌 미렌_음… 뭐라고 할까.

=이언 매켈런_꿈이 이뤄진 거지.

헬렌 미렌_어떤 면에서 진짜 그렇다. 이언을 창피하게 만들 생각은 없지만 이언은 생존하는 영국 최고의 연극배우이지 않나. 그런 그와 함께 연기한다는 건 나에겐 큰 의미다. 연기에 부담이 될 수도 있었지만 실제로는 전혀 그렇지 않았다. 진짜 꿈이 이뤄졌다.

이언 매켈런_오래전부터 헬렌을 알았고, 그녀의 연기를 지켜봐왔다. 헬렌과 함께 작업한 사람들과도 잘 알고 있고, 친구들을 통해 처음 알게 됐다. 서로 이방인은 아니었다. 같은 극단 출신이고, 영국 방송에도 출연했으니까. 인터뷰 때문에 사진 촬영도 함께했다. 전혀 모르는 사람과 갑자기 연기를 한 것은 아니다. 런던에서 서로 가까운 거리에 산다.

헬렌 미렌_그래도 한번도 마주친 적은 없다.

-매켈런의 캐릭터는 과거로부터 배우지 못하는 역할이다. 개인적으로는 시간이 흘러감에 따라 이해심이 많아지는 편인가 아니면 남의 잘못을 고쳐주고 싶어 하는 편인가.

이언 매켈런_확신에 가득 찬 사람이 많다. 특히 정치가들. 그런 사람들에겐 관심이 없다. 배려심 있는 사람이 좋다. 다른 사람에게 관심이 많은 사람들. 그런 사람을 친구 삼아야 한다. 또 그런 사람이 되고 싶고. 연기할 때도 한 가지 색을 가진 역보다는 다양성을 가진 캐릭터가 더 흥미롭다.

헬렌 미렌_배우라는 직업은 끊임없이 인간의 다양한 삶을 연구하고 공감한다. 그게 우리의 임무다. 우리를 둘러싼 세계를 다른 눈으로 분석하고, 이를 진실성 있게 작품에 담는 게 우리가 하는 일이다. 이해심이 많아졌나 하는 질문에는 글쎄….

이언 매켈런_사실 나 자신에게 엄격한 만큼 다른 이들에게도 엄격한 편이다. 내 인생에서 자랑스러운 점이 있는데 그건 늘 더 나은 연기를 하기 위해 노력한다는 거다. 그래서 노력하지 않는 배우를 보면 괴팍해진다. 물론 돈을 벌기 위해서 억지로 하는 연기라면 할 수 없지만. 프로페셔널리즘은 상당히 큰 의미를 갖는다. 모든 역할에 최선을 다하는 것은 당연한 거다. 그래서 노력하지 않는 배우를 보면 화가 난다.

-영화에는 인간의 감정적인 변화와 본성에 대한 이야기도 나온다.

헬렌 미렌_우리는 본인에게는 참 관대하다. 아무리 큰 잘못을 해도 용서하고, 이유도 많고, 변명도 많다. 이 작품은 당신의 과거는 언젠가 돌아와 당신을 찾아간다고 말해준다. 어떤 방식으로든. 나도 그렇게 믿는다. 아무도 모르는 잘못이었다 해도. 인생을 살면서 자기 자신과 갈등을 겪게 될 거다. 본인은 자신의 잘못을 아니까.

-사람들은 왜 사기꾼에게 매력을 느낄까? 영화에서도 그렇고, 실생활에서도 그렇지 않나.

헬렌 미렌_당연하다. 매력이 없으면 어떻게 사기를 칠 수 있겠나? 매력은 그들이 사용해야 하는 도구다. 실제로 사기꾼을 만날 기회가 있었다. 그런데 실제로 보면 얼마나 매력적인지. 사기꾼일 거라고 절대로 상상할 수 없는 사람이었다.

이언 매켈런_여자들이 더 통찰력 있다고 생각하나?

헬렌 미렌_관찰력이 있다는 표현이 더 맞다고 생각한다.

이언 매켈런_나는 세상이 무대고 모든 사람들이 연기를 한다고 생각한다. 마치 셰익스피어의 작품처럼. 우린 평생을 연기하면서 산다. 이벤트에 어울리는 의상을 입는다. 우리의 다른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서. 무의식적으로 하는 행위다. 아이들을 봐도 함께 있는 사람에 따라 행동이나 말투가 달라진다. 할머니와 있을 때, 친구와 뛰어놀 때. 생각조차 하지 않고 하는 행동이다. 우리 모두 적응을 하는 거다. 그걸 거짓이라고 할 수 있나? 이 영화는 인간의 본성에 대한 것이다. 이게 거짓말일까? 글쎄. 매번 머리를 빗을 때마다 우린 작은 퍼포먼스를 한다. 연기만큼 자연적인 것은 없다. 그래서 관객이 배우에게 관심을 갖는다. 자신의 일부를 더 구체적으로 집어 보여주니까.

사진 워너브러더스코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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