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대적으로 잘 아는 분야이기도 하고 다뤄보면 재미있겠다고 생각했어요.” 신아가·이상철 감독의 신작 <속물들>은 불법 비자금과 횡령 등 부패한 미술계 일각의 부조리를 배경으로 인간 군상의 속물근성을 그린다. 사회고발적인 일면은 물론이고 인간의 어두운 면을 다루고 있는 만큼 자칫 무겁고 심각한 방향으로 흐를 수도 있는 소재였다. 하지만 정작 <속물들>을 보고 있자면 시종일관 웃음이 멈추지 않는다. 일반적인 상황에선 마주하기 힘든 인간의 비겁하고 지질한 일면이 일종의 희극처럼 우리의 삶을 풍자하기 때문이다. 쉽지 않은 소재를 고른 이유를 묻자 본인들에겐 그게 “친숙하고 재미있는 이야기”였다는 현답이 돌아왔다. 실체가 없는 불특정 다수의 취향을 맞춰 계산하는 대신 자신들이 재미있다고 느끼는 것들을 재미있게 만드는 사람들, 우리는 그들을 감독이라고 부른다. 2011년 <밍크코트> 이후 8년 만에 돌아온 신아가·이상철 감독은 두 번째 작품에서 좀더 선명하게 자신들의 취향과 방향을 드러냈다.
-기자간담회부터 신아가 감독님이 언론과 홍보를 담당하고 있던데 오늘은 다행히 두분이 함께 나왔다.
=이상철_스피커를 하나로 통일하자는 의견이 있어 신아가 감독이 주로 담당했다. 여성주인공의 이야기이고 다소 민감하게 받아들여질 전개도 있어서 신아가 감독이 제대로 설명하는 편이 낫겠다고 생각했다. 다만 <씨네21>은 꼭 나와서 기록으로 남기고 싶어서 함께 나왔다. (웃음)
-사실 약간은 어렵고 부담스러운 영화이지 않을까 생각했는데, 예상과 달리 전반적으로 유쾌하다. 경쾌한 가운데 짧은 호흡으로 웃음을 전한다.
=신아가_애매하다는 이야기를 시나리오 때부터 들어 걱정이 많았다. 상업영화쪽에서는 예술영화스럽다고 하는데 예술영화쪽에서 보자면 상업영화의 느낌이 난다는 거다. 우리가 재밌다고 생각하는 영화를 해보자는 게 유일한 목표였다.
이상철_웃기려고 일부러 계산하고 배치한 건 아니다. <속물들>이 전하는 웃음은 결과적인 쪽에 가깝다. 지나고 보면 상황이 우습고 황당해지는 경우랄까. 장르를 의식하고 만든 적은 없지만 이해를 돕기 위해 굳이 장르적으로 방향을 잡자면 재미있는 블랙코미디로 봐주면 좋겠다.
-미술계의 부조리를 배경으로 성공을 위해 표절을 서슴지 않는 미술작가의 성공에 대한 집착과 몰락을 그린다. 이야기는 어떻게 시작되었나.
신아가_중간에 시나리오 단계에서 엎어진 것들이 몇 차례 있었고 그러다보니 시간이 훌쩍 지나버렸다. 이러다가 두 번째 작품을 못 찍는 건 아닌지 초조한 마음이 들었다. 내가 빨리 쓸 수 있는 아이템을 고민하다가 전공을 했던 미술쪽 이야기를 끌고 들어오면 좋겠다는 생각으로 시작했다. 시나리오 쓸 때 많은 공부가 필요한데 이 분야는 이미 공부가 되어 있는 것들이 많으니까. 극중 캐릭터의 모델이 되는 사람들도 몇몇 있다. 특히 주인공 우정(유다인)의 고교 동창이자 자유분방한 인물 소영(옥자연)의 영감이 되어준 친구가 있는데 이상철 감독에게 이야기했더니 재미있다고 한번 시나리오로 만들어보자고 용기를 북돋아줬다.
-<밍크코트> 이후 8년 만이다. 두 번째 영화를 만든다는 게 쉬운 일이 아닌 것 같다.
이상철_데뷔작 때는 이제 드디어 영화를 연출한다는 흥분이 있었다. 차기작에선 감독으로서, 아니 직업 영화인으로서의 무게와 책임감이 느껴지는 가운데 또 다른 면모를 보여주고 싶은 욕심도 있었다. 물론 영화 한두편으로 모든 걸 보여줄 순 없겠지만 필모그래피가 쌓여가는 만큼 내가 누구인지 드러내는 기분이다.
신아가_시나리오는 꾸준히 쓰고 있는데 문제는 역시 제작비와 투자다. 서울영상위원회와 경기콘텐츠진흥원의 제작지원, 전주국제영화제 시나리오 피칭 마켓에서 2등을 해서 지원받은 뒤 시나리오를 더 보강하고 있던 찰나에 주피터필름에서 모자란 부분을 투자하겠다고 제안을 주셔서 진행하게 됐다. 사실 처음에는 이야기가 좀더 거칠고 과격했다. 안정적인 환경에서 영화를 찍느냐 아니면 제작사의 도움 없이 해보고 싶은 걸 다 해보냐, 선택의 순간이 있었다. 사실 진짜해보고 싶었던 것은 ‘19금’의 욕정이 넘치는 영화였다. (웃음) 조율이 가능하다는 판단 아래 지금의 형태로 맞춰나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삐죽하게 튀어나온, 기획영화에선 볼 수 없는 날카로움이 있다. 앞서 말한 상업·예술영화 구분은 사실 무의미한, 보다보면 ‘이게 신아가, 이상철의 영화구나’ 싶은 순간들이 있다. 한참을 낄낄거리며 웃다보면 어느새 입안에 씁쓸한 가루가 남아 있는 기분이랄까.
신아가_감사하다. 그 표현을 다른 데 가서 써도 될까? (웃음) 시나리오를 2년 동안 고치면서 제일 많이 들은 질문 중 하나가 결국 부도덕한 인물이 성공한다는 이야기냐, 이런 영화를 왜 만들어야 하냐는 거였다. 성공의 기준이야 각자 다르겠지만 그렇게 말한다면 이건 선을 넘은 인물에 관한 이야기다. 이건 선을 넘는 순간이 아니라 이미 넘은 사람의 그다음 욕망에 대한 이야기다. 처음부터 인물에 감정이입시키고 싶진 않았다. 어느 정도 거리를 두고 그들의 행태를 보면서 여러 가지 생각에 잠기는, 블랙코미디를 만들고 싶었다.
이상철_프랑수아 오종의 <인 더 하우스>(2012) 같은 영화가 레퍼런스였다. 상업과 예술 사이를 줄타기하면서 어느 쪽으로도 정의내리기 쉽지 않은, 그러니까 유머가 묻어있는 ‘오종 영화’ 말이다. 인디영화의 감성을 유지하되 좋은 의미에서 외화를 보는 것 같은 낯선 느낌을 주고 싶었다.
-캐릭터 하나하나가 독특하다. 제목 그대로 부도덕한 속물들뿐인데 영화 역시 인물에 대해 변명을 대신 해주지 않고 서늘하게 바라본다.
이상철_인물들이 하나같이 정상적이지 않다. 다들 비호감이다. (웃음) 가장 걱정된 부분이 주인공 우정에게 공감을 못하면 어쩌나 하는 거였다. 시나리오 단계에서도 여러차례 수정했지만 근본적인 부분을 건드릴 순 없었다. 다행히 유다인 배우가 맡아 특유의 일상성으로 캐릭터의 비호감을 상당 부분 상쇄시켜줬다. 인물에 깊이를 더해준 심희섭, 의외의 모습을 보여준 송재림, 히든카드가 되어준 유재명 배우까지 배우들의 힘이 컸다.
신아가_그런 의미에서 옥자연 배우가 맡은 소영이란 인물이 중요했다. 사건을 촉발시키는 역할이지만 상식이 통하지 않는 인물이기에 선을 넘나드는 폭넓은 연기가 필요했다. 옥자연 배우가 촬영 당시 무척 바빴는데도 엄청난 집중력을 보여줬다. 좋은 배우들을 만나서 영화가 완성될 수 있었다.
-사회풍자가 있지만 그게 목적은 아닌 것 같다. 예컨대 <기생충>이 사회구도를 기획적으로 디자인한 쪽이라면 <속물들>은 좀더 자유분방하고 어디로 튈지 모르는 느낌이다.
신아가_굳이 구분한다면 캐릭터를 먼저 세우고 그들이 어떻게 행동할지 지켜보는 쪽이다. 평소 함부로 표출하지 못하는 욕망들이 있지않나. 그걸 노골적으로 드러낸 인물이 충돌할 때 상황이 어떻게 진행될지 상상해보는 거다. 내게 이야기는 그런 욕망을 펼쳐보는 일종의 대리체험이라고 해도 좋겠다. <속물들>의 시나리오 제목은 <우정이 불타고 있다>였는데, <속물들>이라고 하고 나니 명쾌해지는 것 같다. 이건 속물이 된 사람들의 현재를 지켜보는 이야기니까. 사회풍자적인 면을 우리가 직접 전달하는 대신 관객 각자의 몫으로 남겨두고 싶다.
이상철_차기작은 따로 준비하고 있다. 각자 열심히 시나리오를 쓰는 중이다. 좋은 이야기가 충분히 무르익었을 때 다시 돌아올 테니 잊지 않고 지켜봐주시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