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산의 부장들>은 이병헌의 생경한 목소리, 핏줄이 바짝 선 이마를 만날 수 있는 영화다. 머리카락 한올 내려오는 것도 용납하지 않던 중앙정보부장 김규평은 자신이 따르던 ‘박통’(이성민)이 그의 기준에서 그릇된 선택을 이어가자 평정심을 잃어가고, 김규평을 연기한 이병헌 역시 전에 없던 얼굴을 보여준다. 워낙 유명한 역사적 사건이기 때문에 별다른 사전 정보가 없어도 그가 연기한 김규평은 김재규 전 중앙정보부장, 그가 총으로 쏜 박통은 박정희 전 대통령이라는 것을 쉽게 인지할 수 있다. 하지만 왜 그런 사건이 벌어졌는가에 대해서는 아직 의견이 분분하다. 이병헌은 기본적으로 “역사적으로 미스터리한 부분은 영화를 본 후에도 미스터리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배우다. 늘 흐트러짐 없는 연기로 기어코 관객을 설득해내는 그를 만나, 한국사의 흐름 자체를 뒤집은 인물을 연기한 심경을 들었다.
-우민호 감독과는 언제쯤부터 이야기를 나눴나.
=정확히는 기억 안 나지만 드라마 <미스터 선샤인>이 끝날 때쯤 제안을 받았다. 당시 어떤 사건이 있었다는 정도만 알고 있었는데, 그 안에 렌즈가 들어가서 당시 인물들의 감정을 깊게 보여주더라. 그게 아주 드라마틱했고 이 사건을 다룬 다른 작품과 차별화되는 지점이라고 봤다. <남산의 부장들>은 정치적으로 어떤 메시지가 있는 작품이 아니라 충성과 사랑과 존경과 배신에 관한 영화다. 그런 지점이 참 세련됐다.
-<남산의 부장들>의 김 부장은 영화를 보기 전부터 특정 인물을 떠올릴 수밖에 없는 캐릭터다. 원래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에 대해 가진 생각이나 이미지는 어땠나.
=남들이 아는 수준으로만 알았다. 하지만 인물을 연기하기 위해서는 그 사람이 어떤 생각을 했고 성격이 어땠고 취향은 어땠는지 자세히 알아야 한다. 여러 자료, 심지어 당시에 직간접적으로 같이 일했던 사람들도 만났다. 우연찮게도 와이프 친구의 아버님도 같이 일한 적이 있다더라. ‘막걸리사이다’를 즐겨 마셨다든지, 그렇게 여러 사람들을 만나 들은 이야기가 연기에 많은 도움이 됐다.
-김규평이 첫 등장하는 장면에서 ‘한치의 흐트러짐 없는 풍모와 기세. 군인으로 살아왔던 삶을 엿볼 수 있다’고 묘사된다.
=일단 군인들은 되게 깔끔하다. 헤어스타일이든 복장이든 늘 제대로 갖춰 입고, 걸음걸이는 힘 있고, 고갯짓도 절도 있게 한다. 그런 것을 생각하며 연기하긴 했다. 또한 당시 자료 화면을 보면 긴 앞머리를 계속 쓸어넘기는 제스처를 하기에 영화에서 한번쯤 따라 하고 싶었다. 내가 누군가와 싸우다가 아주 격한 감정 신에서 머리카락이 내려왔을 때 그걸 용납하지 못하는, 아주 예민하고 신경질적인 감정을 말이다.
-예고편에서 이마에 핏줄이 서는 모습을 보고 놀랐다. “여기는 니가 있을 자리 그런 자리가 아니야”라는 대사를 칠 때는 평소 발성과 다르게 들렸다.
=호흡이 모자라서 그랬나. (웃음) 하나하나 계산한 건 아니다. 그 장면은 진짜 둘이 멱살잡고 몸으로 싸우면서 촬영했는데, 자연스럽게 격양된 감정으로 대사를 치니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모르겠더라. 모니터를 보고 나서야 내가 어떤 모습이었는지 확인할 수 있었다. 극한의 감정으로 표현을 하다보니 나도 모르는 내 목소리가 나오고 발음도 꼬였지만 그 감정에 충실한 게 맞는 거 같다. 그리고 이마에 핏줄이 팍 서는 느낌이 좋다는 건 감독님도 얘기한 적이 있다. 사람이 분노를 억누르거나 혹은 그런 감정을 표출할 때 핏줄이 튀어나오는 기분으로 연기했다.
-김규평은 평소 속내를 숨기고 있다가 갑자기 감정이 폭발할 때 광기를 드러낸다. 그사이의 간극을 어느 정도 둘지도 관건이었을 텐데.
=아주 예민한 사람은 가만히 있어도 그 사람의 분노 수위가 느껴질 때가 있다. 배우는 감정을 억누르기 위해 무표정으로 있어도 진짜 속내를 관객에게 들켜야 하는 직업이다. 큰 스크린에 클로즈업으로 내 표정을 잡으면 관객에게 그 감정이 전달될 거라는 믿음으로 연기해야 한다. 반면 평상시 모습과 분노할 때 모습의 간극이 크게 느껴지는 연기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한다. 그렇게 화를 분출하는 모습이 상식적이지는 않지만, 다혈질인 인간이 가진 분노조절장애를 확 보여줄 수 있기도 하다.
-장르적으로 보면 <달콤한 인생>(2004)과 비슷하지만, 그렇다고 똑같지는 않다.
=배신, 사랑, 존경, 충성…. 그런 감정들이 나오는 건 비슷하다. 하지만 <달콤한 인생>은 남자들의 로망에 가까운 픽션이고, <남산의 부장들>은 아주 어두운 논픽션이다. 또한 <달콤한 인생>은 나르시시즘을 통한 대리만족을 느낄 수 있지만, <남산의 부장들>은 사실을 토대로 그 상황을 추정해야 하기 때문에 정확한 대사와 감정을 보여줘야 한다. 그래서 훨씬 사실적이다.
-김 부장이 박통에게 느끼는 감정의 본질이 어떠한 것이라고 생각하며 연기했나.
=정말 사랑하고 존경했다. 그렇기 때문에 올라갈 때 멋있었던 것처럼 내려올 때도 멋있게 내려와야 한다고 늘 생각한 거다. 그런데 박통은 내려올 생각을 하지 않고 계속 그 위치에 있으려고 한다. 무언가 잘못되어가는 형국을 직시하지 못한다는 생각이 들었을 거다. <친구>(2001)를 보면 어릴 때부터 친했던 이들이 서로 죽이는 모습이 안타깝지 않나. <남산의 부장들>을 보는 관객의 마음도 비슷할 거다. 혁명부터 김 부장의 암살까지 18년간 세월을 모두 보여줬다면 그 감정이 더 크게 전달됐겠지만, 영화는 40일 동안의 이야기에 포커스를 맞춘다. 그래서 김 부장과 박통의 과거를 유추할 수 있는 신을 찍을 때 좀더 감정의 레이어를 다양하게 쌓으려고 의식했다.
-SNS를 시작한 이후 이병헌의 의외의 모습을 봤다는 네티즌의 반응이 많다. ‘먹방’을 본다는 말도 친근하게들 느끼는 것 같고.
=<광해, 왕이 된 남자> 때는 애니팡을 그렇게 했는데, 영화가 끝나면서 게임도 그만뒀다. <백두산> 때는 유튜브를 잘 안 보던 내가 ‘먹방’을 봤다. 지금은 안 본다. 원래 어딘가에 깊이 길게 빠지는 스타일이 아니다. <남산의 부장들>을 찍을 때는 인스타그램을 열심히 했는데, 사실 소속사에 떠밀려서 한 거다. 인스타그램을 하면서 느낀 건, 내가 생각하는 나와 다른 사람이 생각하는 내가 많이 다르다는 거다. 거리감이 꽤 있었다는 걸 몰랐다. 이제는 하다보니 재밌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그래서 사람들이 나보고 SNS를 하라고 부추겼나 싶고. 내 고집만 부리지 말고 남의 이야기를 들으려고 하다보면 왜 나한테 그런 말을 했는지 깨닫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