곽도원은 활화산 같은 배우다.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은근한 존재감으로 상대를 위압하고, 감정을 폭발시킨다 싶으면 순식간에 주변을 에너지로 뒤덮는다. 하지만 배우로서 그의 진가는 눈을 뗄 수 없는 존재감이 아니라 끊임없는 질문과 반성에 있다. 당장의 성과와 상찬에 안주하지 않고 스스로를 과신하는 일도 없이, 그는 오늘도 연기라는 전장을 향해 나아간다.
-전 중앙정보부장 박용각 역을 맡았다.
=이병헌 배우가 한다고 해서 일단 시나리오를 달라고 했다. (웃음) 대사가 살아 있고 이야기도 박진감이 넘쳐서 앉은자리에서 한번에 읽었다. 예전에 <남산의 부장들> 책도 봤었는데 논픽션의 방대한 이야기를 시나리오에서 입체적이고 생생하게 풀어낸 점이 인상 깊었다. 실화보다 훨씬 재미있고 사실적이고 공감이 가는 측면도 있었다. 처음부터 박용각 역으로 캐스팅 제안을 받았는데 시나리오를 읽고 나서 나 역시 제일 해보고 싶은 캐릭터가 박용각이었기 때문에 크게 고민하지 않고 합류를 결정했다.
-김재규 전 중앙정보부장이 박정희 전 대통령을 암살한 10·26 사건을 모티브로 한 이야기다.
=사실 너무나 궁금했던 이야기일 거라 생각한다. 익히 알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다들 뉴스의 건조한 정보 정도만 아는 데 그치는 게 사실이다. 그 과정에서 일어난 일들, 조명이 되지 않은 사건들을 다룬다는 게 흥미로웠다. 이야기할 수 있는 시기가 왔고 해야 할 시기가 왔다고 생각한다. 이 이야기가 세상에 공개됐을 때 어떤 반응이 있을까도 궁금했다. 다만 비록 각색과 창작이 있었다곤 해도 실제 있었던 사건, 실존했던 인물을 표현해야 하는 것이기 때문에 부담이 적지 않았다.
-박용각의 모티브가 되는 김형욱 전 중앙정보부장은 실제 김재규 전 중앙정보부장과 연배차이가 꽤 난다. 극중 가장 창작의 묘가 많이 발휘된 캐릭터처럼 보인다.
=정권의 부정을 폭로하는 내부고발자 역할이다. 정권의 배신자인 셈인데 배신을 하고싶어서 한 것이 아니라 살 방도를 찾다보니 거기까지 내몰린 인물이다. 영화를 찍는 내내 그가 어떤 심정이었을지 상상을 해봤는데 감히 짐작하기 어려웠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그야말로 벼랑 끝에 서서 매일 불안에 떠는 삶은 어땠을까. 워낙 베일에 싸인 인물이라 자료도 별로 없었다. 한번은 미국에서 열린 청문회에서 찍힌 사진을 구해서 봤는데 삐딱하게 앉아 있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저 상황에서 저런 자세를 취하는 건 여유일까, 허세일까. 감독님에게 그 사진을 보여드리고 의논을 했더니 본 적 없었던 사진이라며 흥미로워하셨다. 무리해서 인물의 모든 내면을 이해하기보다는 주어진 상황에서 내가 할 수 있는 리액션을 하고자 했다. 다행히 상대적으로 각색이 많이 된 캐릭터이기 때문에 제2의 창조를 해볼 여지가 있었다.
-시나리오만 봐도 그림이 정확히 그려진다. 배우를 정확한 자리에 가져다놓은 이야기다.
=동의한다. 하지만 그 이상이었다. 시나리오를 보면 이 배우가 이렇게 하겠지 하는 그림이 어느 정도 그려지지 않나. 그걸 바탕으로 준비해가면 현장에서 모든 배우가 그걸 뛰어넘는 연기를 선보였다. 그렇다고 영화의 톤을 해치진 않는다. 절묘한 밸런스를 유지하면서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내는 다른 배우들을 보며 매번 감탄했다. 무얼 상상하든 그 이상을 마주하게 될 거다.
-미국, 프랑스 등 로케이션 촬영도 많았다.
=해외 로케이션은 스케줄대로 칼같이 진행해야 하는 게 어렵다. 공문을 보내서 허락이 떨어진 시간 안에 반드시 찍어야 한다. 그러다보니 뒤가 막혀 있다는 부담감에 마음이 점점 급해지는 거다. 인물의 복잡한 심리 상태를 만들어야 하는데 머릿속이 진짜로 복잡해져버리니까 표현은 못하고 복잡하기만 했다. (웃음) 링컨 메모리얼 파크와 위싱턴 기념탑은 직접 가보니 느낌이 남달랐다. 특히 프랑스 방돔 광장은 한국영화 중에선 처음으로 촬영 허가를 받았다. 본래 프랑스영화를 찍을 때도 허가가 잘 안 떨어지는데, 역사적 사건을 재현한 시나리오에 관심을 가지고 특별히 허락해준 거라고 전해 들었다. 한국영화의 위상이 올라갔다는 걸 새삼 실감했다. 보기 힘든 장면들이 많이 담겼다. 비록 나는 찍는 내내 초조했지만. (웃음)
-속을 드러내지 않는 김규평(이병헌)이나 여타 인물들에 비해 박용각은 감정의 진폭이 크다.
=그 점이 재미있었고 동시에 어려웠다. 청문회에선 당당했다가 뒤에선 불안에 떨고 혼자 머리도 굴렸다가 금세 감정을 드러내기도 한다. 한마디로 종잡을 수 없다. 한편으론 그게 솔직한 인간의 모습이라고 봤다. 정확히는 인간의 밑바닥, 살기 위해 몸부림치는 생존욕구의 엑기스 같은 것들을 보여줄 필요가 있었다. 연기라는 게 본래 해보지 않은 일들을 하는 거지만 이번만큼 어려웠던 적도 드문 것 같다. 캐릭터를 어떻게 잡을지의 문제도 있었지만 워낙 연기를 잘하는 배우들과 함께하니 절로 반성이 되는 부분이 많았다. 특히 이병헌 배우는 연기가 아니라 그냥 그 사람, 김규평이란 인물이 되어 내 앞에 앉아 있는 듯해 어떻게든 그를 설득하고 싶어지더라. 그는 주변의 공기까지 함께 연기하는 배우다. 맑고 단단한 다이아몬드 같은, 어떤 색깔도 묻지 않았기에 어떤 색깔도 관통해 표현해낸다. 볼 때마다 감탄했고 난 아직 한참 멀었구나 하는 생각과 함께 언젠가는 나도 저렇게 고요하게 존재감 있는 배우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도 생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