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형숙 감독이 다시 입을 열었다. 양영희 감독이 자신이 연출한 일본 <NHK> 방송 다큐멘터리 <흔들리는 마음>(1996)의 9분40초를 홍형숙 감독의 <본명선언>(1998)이 무단 도용했다는 내용의 글을 <씨네21> 1240호(포커스 ‘영화인의 창작 윤리, 이대로 좋은가’)에 기고한 지 약 3주 만의 입장 표명이다. 지난 2월4일 홍 감독이 자신의 SNS에 올린장문의 입장문은 크게 네 가지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다. <본명선언> 제작 경과, ‘<흔들리는 마음> 영상 사용에 동의가 없었다’는 양영희 감독의 주장에 대한 의견, ‘(제작 과정에서 양 감독과의) 협의가 충분하지 않았다’는 것에 대한 반성, <흔들리는 마음> 원본 영상의 출처 표기 및 ‘8mm 취재 양영희’라는 크레딧에 대한 반성 및 사과 등이 그것이다. 홍 감독은 입장문을 통해 빠듯한 제작 일정 탓에 양영희 감독과 진행 내용을 충분히 공유하지 못한 점, 양 감독의 <흔들리는 마음>의 원본 촬영을 사용하는 과정에서 출처를 명시하지 않았으며, 양 감독의 크레딧을 ‘8mm 취재’로 표기한 것에 대해 사과했다. 제작을 진행하는 과정에서 세심함이 부족했던 건 인정하지만, 양영희 감독에게 “<흔들리는 마음> 영상을 사용하겠다는 의사를 수차례 알렸고, 양 감독 또한 <본명선언> 작업에 적극적으로 협조해주었기”에 “<흔들리는 마음> 영상을 사용한 건 충분히 협의한 것이고, 무단 도용한 게 결코 아니”라는 게 그의 입장이다.
입장문에 따르면, 1997년 1월 일본에 촬영 가기 전 홍 감독은 양 감독에게 1차 구성안과 함께 <본명선언> 촬영 협조 요청을 담아 팩스를 보냈다. 그 팩스에는 △양 감독의 <흔들리는 마음> 등장인물에 대한 촬영 섭외 요청, △양 감독 본인에 대한 촬영 협조 요청, △<흔들리는 마음> 촬영 원본 테이프 사용 협조 요청, △원본 테이프 사용에 대한 비용 등에 대해서는 이후 일본 촬영 시 협의할 것을 제안하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다고 한다.
1997년 12월18일 홍 감독은 양 감독으로부터 △자필 편지 △<흔들리는 마음> 원본 테이프 40개 △복사본 테이프 40개 △<흔들리는 마음>에 사용한 장면들의 촬영 원본 테이프 중 타임 코드 로그(Time Code Log. 편집에 사용된 원본의 in-out 지점 표기)를 자필로 정리한 리스트를 받았다고 한다. 홍형숙 감독은 “참고용으로만 보냈다면 복사본을 보내는 것만으로도 충분했을 것이다. 원본과 복사본을 함께 보냈다는 건 ‘사용을 전제로 한 행위’”라며 “게다가 양 감독은 <흔들리는 마음>에 사용된 장면의 검색이 쉽도록 자필로 작성한 타임 코드 로그(TCL)까지 보내주었다”고 말했다. 홍 감독은 이에 대해 “‘사용 동의’이외에 어떤 상황도 짐작할 수 없었다”고 말했다.
또 양영희 감독이 서울영상집단에 ‘부산국제영화제 수상 여부 확인 및 본인 촬영 영상 사용에 대한 의견서’를 요청했던 1998년 10월12일, 홍형숙 감독은 <흔들리는 마음> 자료화면 사용과 관련하여 양영희 감독에게 “△자료에 대한 8mm 취재에 양영희 이름을 명기한다. △자료비와 운송비 등은 추후 별도로 협의해서 책정하기로 한다”는 사전 협의 내용을 전달했으며, “‘추가 협의할 사항이 있으면 이후 재편집 과정에서 반영할 수 있음’을 알렸다”고 한다.
그런데 홍 감독이 영상 사용 협의의 근거로 첨부한 팩스와 각종 문서, 양영희 감독과 주고받은 편지들을 세세하게 살펴보면, 양영희 감독이 <흔들리는 마음>의 영상을 <본명선언>에 사용해도 좋다고 직접적으로 언급한 내용은 없다. 양영희 감독이 <흔들리는 마음>의 원본과 복사본을 <본명선언> 제작진 앞으로 함께 보내준 것을 ‘사용을 전제로한 행위’로 간주했다는 홍형숙 감독의 주장이 있을 뿐이다. 이에 대해 양영희 감독은 “1995년 야마가타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에서 홍 감독을 처음 만났고, 이후 <흔들리는 마음>이 TV에 방영된 뒤, 그 복사본(30분)을 홍 감독에게 보내면서 ‘중요하고 재미있는 장면은 이 30분 안에 있으니 <흔들리는 마음>만 보면 충분할 것’이라고 말했는데, 홍감독이 TV 방영 버전에 안 들어간 영상들도 보고 싶다고 요청해서 원본 테이프까지 보내게 된 것”이라고 설명했다.
양영희 감독, “충분한 협의 없었다”
홍형숙 감독의 입장문은 지난 1월 19일 서울영상집단이 SNS를 통해 양영희 감독에게 사과하며 밝힌 내용과 거리를 두고 있다. <본명선언>에 연출부로 참여했던 서울영상집단 공미연씨는 당시 홍형숙 감독이 “(양영희씨가) 촬영 원본을 보냈다는 것은 그것들 중 일부를 그대로 사용해도 좋다는 뜻임은 상식에 속하는 판단”이라고 한 말에 대해 “일방적인 태도와 주장만 존재할 뿐, 양영희 감독과의 합의 내용에 대한 어떤 객관적 증거가 없었음에도, 저희는 홍 감독의 주장에 기대어 이 논란에 대응했으며 양 감독의 말에 귀 기울이려는 노력을 하지 못했다”고 인정했다. 공미연씨는 “아무리 당사자간에 합의가 있었다하더라도, <본명선언>을 공개하기 전 홍형숙 감독이 양영희 감독에게 편집본을 전달하지 않은 것이 마음에 걸렸다”고도 말했다. 또 그는 “‘원본을 줬기 때문에 사용에 대해 합의가 있었다’는 홍형숙 감독과 당시 서울영상집단이 주장한 상식은 진실이 아니었다. 진실은 1998년에 이미 존재했으나, 부산국제영화제 수상작이라는 한국 독립영화의 권위 앞에서 우리 모두는 진실을 거부했다”며 “창작자로서, 다큐멘터리스트로서, 지난 시간 저희의 미숙한 언행으로 인해, 또 한명의 창작자이며 다큐멘터리스트인 양영희씨에게 오랜 시간 상처를 드린 것에 대해 사과 드린다. <흔들리는 마음>과 <본명선언> 출연진의 진심에 상처를 남긴 것에 대해 사과 드리며, 재일교포 및 재일교포 인권에 관심 가지고 활동하고 계신 모든 분들에게 사과 드린다”고 공식 사과했다.
홍 감독의 입장문을 본 양 감독은 “홍형숙 감독이 <흔들리는 마음> 영상을 사용하는 과정에서 충분한 협의가 없었다”고 단호하게 말했다. 양 감독은 “1995년 야마가타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에서 홍형숙 감독을 처음 만난 뒤, 그가 나에 대한 다큐멘터리를 찍고 싶다고 제안했지만 거절했다. 이후, 홍형숙 감독은 <흔들리는 마음>을 본 뒤, 영화 속 등장인물인 후지와라 선생을 만나고 싶다고 해서 소개해주었다. <흔들리는 마음>에서 사용하지 않은 원본 촬영 테이프도 보내달라고 몇 번이나 부탁해왔다. 처음에는 당황스럽게 느꼈지만 재일교포의 목소리를 조금이라도 많이 접하려는 목적인가 싶었다. 원본 테이프를 홍형숙 감독에게 보내면서 ‘혹시, 만일, 영상을 1초라도 사용할 경우는 가편집을 꼭 봐야 하고 합의가 이루어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홍형숙 감독이 이에 동의해 테이프를 보냈다”는 게 양 감독의 설명이다. 하지만 홍형숙 감독의 입장문을 보면 홍형숙 감독은 “완성본을 부산국제영화제 개막 직전에 양 감독에게 보내”면서 가편집본을 미리 보여주기로 한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
양영희 감독은 홍형숙 감독의 입장문이 사실을 왜곡한 부분이 있다고 지적했다. 홍형숙 감독은 1998년 10월 14일, “<본명선언>의 주요 등장인물인 후지와라 시로 선생이 부산국제영화제 수상을 축하하면서 ‘며칠 전에도 양영희씨로부터 정말 오래간만에 국제전화가 왔다. 기뻐하더라. 매일 비디오를 보고 있다’고 말했다”며 “양영희 감독이 그보다 이틀 전인 10월 12일 서울영상집단에 연락해 영화를 받아 보았다는 말은 후지와라 시로 선생이 전달한 내용과 충돌한다”고 지적했다. 하지만 양영희 감독은 “당시 후지와라 선생과 통화했을 때 <본명선언>의 <흔들리는 마음> 무단 도용 문제가 불거져 걱정하실까봐 말씀드리지 못했다. 직접 뵙고 설명을 드려야겠다고 생각했고, 선생에게 걱정을 끼치지 않기 위해 ‘<흔들리는 마음>을 뉴욕 친구들과 자주 보고 있다’고 말씀드렸다”며 “이후 일본에서 후지와라 선생을 만났을 때 (<본명선언>의 무단 도용에 대해) 구체적으로 설명을 드렸더니, 후지와라 선생은 ‘그렇구나, 난 영상에 대해서는 전문가가 아니니까 잘 모르지만, 안 좋은 상황이 됐구나. 학생들은 죄가 없고. 그런데 사실 <본명선언>을 보니 <흔들리는 마음>의 영상이 너무 많이 삽입돼 매우 놀랐어. (양)영희씨가 잘도 허가를 했구나라고 생각했거든’이라고 말씀하셨다”라고 했다.
또 홍 감독의 입장문에 언급된 1998년 당시 부산국제영화제의 심사결과와 ‘<본명선언>이 <흔들리는 마음>을 무단 도용했다’는 <중앙일보> 보도에 대한 언론중재위원회의 결정이 <본명선언>이 <흔들리는 마음>의 영상을 무단 도용한 게 아니라는 근거로 제시되는 건 납득하기 어려운 대목이다. 당시 부산국제영화제는 심사위원회를 열고 ‘<본명선언>이 <흔들리는 마음>의 영상을 사용한 것이 표절이나 도용이라고 보기 힘들고, 감독(홍형숙)과 자료제공자(양영희)간의 상호 의사소통의 문제이니 개인적인 차원에서 풀어야 할 문제’라고 결론을 내렸다. 심사 결과를 떠나 단체에서 내린 판단이 법적으로 문제가 없다는 걸 뜻하진 않는다. 한 변호사는 “부산국제영화제의 심사 결과는 영화제의 판단일 뿐 법적으로 명확히 해결된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고 설명했다. 당시 홍형숙 감독이 포함된 서울영상집단이 <중앙일보> 보도에 대해 제소한 내용이 인용된 언론중재위원회의 결정은 <중앙일보>와 홍형숙 감독간의 문제인 까닭에 양영희 감독과의 갈등을 해명하는 근거로 제시하는 건 적절치 않아 보인다. 한편, 1998년 언론중재위원회가 결정을 내리며 당시 한국에 들어오지 못한 양영희 감독의 의견과 입장을 거의 인용하지 않은 사실 또한 주목할 부분이다.
<흔들리는 마음>의 저작권자인 <NHK>, 사태 지켜보는 중
현재 <본명선언>의 <흔들리는 마음> 무단 도용 논란에서 간과되고 있는 문제가 있다. <흔들리는 마음>의 저작권은 일본 방송국 <NHK>와 양영희 감독에게 있다는 사실이다. <흔들리는 마음> 마지막 장면에 ‘제작·저작 NHK 오사카’라는 로고가 크게 뜨는 것도 그래서다. <흔들리는 마음> 영상을 1초라도 사용하려면 <NHK>의 허가가 필요하다. 현재 <NHK>는 양영희 감독이 홍형숙 감독을 상대로 20여년 만에 문제 제기한 <본명선언>의 <흔들리는 마음> 무단 도용 논란을 지켜보고있다. <NHK>의 <흔들리는 마음> 담당자는 “<본명선언>이라는 영화가 우리 프로그램(<흔들리는 마음>)을 동의도 구하지 않고 그냥 썼다고? 절대로 있을 수 없는 일이다. <NHK> 프로그램을 단 1초라도 사용하려면 <NHK>의 기준에 따라 저작권료를 협의, 지불해야 한다”는 입장을 전했다. 양영희 감독은 “만약 홍형숙 감독에게 <흔들리는 마음>의 영상을 사용해도 된다고 허락했다면, <흔들리는 마음>의 저작권자인 <NHK>에도 알렸고, 홍형숙 감독에게 <NHK>와의 협의가 있어야 한다고 공지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홍형숙 감독이 낸 입장문 어디에도 <본명선언>이 <NHK>로부터 <흔들리는 마음> 영상의 사용을 허락받았다는 얘기는 없다.
홍형숙과 양영희, 두 사람의 입장이 평행선을 달리는 가운데, <본명선언>과 <흔들리는 마음>을 비교하는 상영회(주최 김명화, 양영희)가 2월 7일 금요일 오후 2시 서울기록원 5층 컨퍼런스룸에서 열린다. 한편, 비교상영회를 5일 앞둔 지난 2월 2일 낭희섭 독립영화협의회 대표가 “서울영상집단 공미연 감독이 양영희 감독에게 보내는 사과문을 읽고, 당시 사실 확인도 없이 부정과 타협으로 침묵하고 동조했던 자신을 되돌아보고 거듭나기 위해 반성하면서 22년 만에 양영희 감독에게 사죄”하는 글을 <씨네21>에 보내왔다. 낭희섭 대표의 사과문은 다음장에서 계속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