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산의 부장들>의 장르적 성취에 대해서는 이견이 없다. 사건 자체보다는 그것이 파생시킨 인물의 정서로 극의 분위기를 만들고 관객으로 하여금 거리를 두고 이를 지켜보게 하는 것, 그것이 장 피에르 멜빌(과 알랭 들롱)로 대변되는 프렌치 누아르의 매력이다. <남산의 부장들> 역시 마찬가지다. <달콤한 인생>(2004)에서 자신이 프렌치 누아르에 얼마나 적합한 배우인지 이미 증명한 바 있는 이병헌의 연기를 전면에 내세운 뒤, 김규평(이병헌)의 심리적 변화에 따라 때로는 차갑게 때로는 뜨겁게 영화의 분위기를 조절하는 <남산의 부장들>은 장르영화로 충분히 매력적이다. 문제는 <남산의 부장들>이 단순한 장르영화가 아니라 역사적 인물과 사건을 장르 속으로 흡수한 영화라는 점이다.
장르, 역사와 허구의 봉합
우리는 동일한 사건을 전혀 다른 방향에서 접근한 또 다른 영화 한 편을 알고 있다. <그때 그사람들>(2005). 10·26 사태의 40일 전에서 시작해 사건 당일 밤에 끝맺는 <남산의 부장들>이 프렌치 누아르를 경유하여 인물의 정서와 심리를 세밀하게 파고든다면, 사건 당일에서 시작해 그 이후에 벌어진 ‘해프닝’을 블랙코미디로 담아낸 <그때 그사람들>은 철저하게 사건의 표면에 집중한다. 그러니까 김재규가 일으킨 10·26 사태와 그 이후의 수습 과정은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고, 멀리서 보면 코미디인 셈이다. 이처럼 역사적 사건 안에는 다양한 장르성이 존재할 수 있다. 임상수와 우민호는 동일한 사건에서 각기 다른 장르의 가능성을 발견한 셈이다. <그때 그사람들>에서 임상수가 박정희의 죽음과 그 이후의 경과를 하나의 블랙코미디로 접근할 때, 그것은 그 사건에 관한 우리의 보편적인 역사적 믿음을 비판적으로 접근하려는 메타비평적 태도가 깔려 있다. <그때 그사람들>의 전복적인 역사관은 영화의 내용보다는 그것을 담아낸 블랙코미디라는 장르적 형식에서 파생되며, 이는 창작자의 장르적 선택이 역사적 사건에 대한 역사적, 정치적 메시지일 수 있음을 증명한다.
하지만 <남산의 부장들>은 이러한 전복적 가치를 가지고 있지 않다. 오히려 <남산의 부장들>은 민감한 역사적 사건을 장르로 잘 다듬어냈다고 보는 편이 더 적합할 것이다. 그러니까 <남산의 부장들>은 10·26 사태와 김재규라는 인물의 역사적 복합성을 자르고 늘린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다. 실제로 <그때 그사람들>이 법정까지 갔던 것을 생각한다면, <남산의 부장들>이 정치적 논쟁과 무관하게 흥행가도를 달리는 지금의 상황은 뭔가 신기하게 느껴지지 않는가? 그 흔한 역사 왜곡 논쟁 하나 없이 말이다. 이는 지금의 한국 사회가 박정희의 유령에서 드디어 벗어나고 있다는 긍정적 징후라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또 다른 한편으로는 영화 속에서 작동하는 장르의 힘이 역사를 압도하고 있기 때문일 수도 있지 않을까? <남산의 부장들>에서 가장 놀라운 점은 역사와 허구(또는 역사적 각색)가 너무도 매끄럽게 붙어 있다는 점이다. 이 이음새에 (프렌치) 누아르라는 장르와 그 장르에 최적화된 인물(그리고 배우)이 버티고 있다. 10월26일의 박정희 암살과 김재규의 사형. 그리고 남산(중앙정보부)과 육군본부의 갈림길에서 육군본부를 택하는 김재규. 우민호는 이 불변의 역사적 사실을 결말 부분에 고정시키고 이에 이르는 과정을 허구적으로 각색한다. 실제와는 다르게 변형된 인물간의 관계(김재규와 김형욱)와 사건의 발생 시기(김형욱의 암살), 영화적 상상으로 덧붙여진 허구의 사건(도청, 이아고 등) 등은 이 역사적 운명에 이르는 과정을 장르적으로 완성한다. 역사적 결말과 허구적 원인이 뒤섞인 인과율.
허구적 원인은 ‘배신’이라는 키워드로 집약된다. 영화 속에서 ‘배신’이라는 설정은 역사와 영화적 상상이 만나는 자리이자, 김재규를 김규평이라는 장르적 인물로 변주하는 힘이다. 우민호는 박정희에게 총을 겨눈 김재규의 행위에 내재한 배신의 모티브를 모든 인물들의 관계로 확장하면서 누아르 특유의 서사적 동력으로 삼는다. 실제로 영화에서 허구적으로 각색된 사건 대부분은 박통을 배신할 것인가를 두고 고민하는 김규평의 내면으로 수렴되면서 결말 부분의 역사적 사건과 매끄럽게 봉합된다. 즉 역사적 결말이 장르적으로 동기화되고, 그렇게 역사는 장르로 흡수된다. 영화의 프롤로그와 에필로그에 삽입된 다큐멘터리 장면은 우리가 오랫동안 그 관람이 금기시되었던 역사적 현장의 일부를 확인한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키지만, 실제로 우리는 누아르라는 장르영화를 보았을 뿐이다.
탈맥락화된 역사
<남산의 부장들>이 역사를 장르로 변주할 때, 역사에 내재한 ‘개별적인 사건’으로서의 흔적이 사라진다. 가령 많은 평자들이 <남산의 부장들>에 권력의 속성이 담겼다고 이야기한다. 이는 사실이다. 하지만 <남산의 부장들>이 묘사하는 권력은 박정희와 유신이라는 구체적인 역사적 맥락 속에서 행사된 권력이 아니라, 장르영화에서 전형적으로 묘사되는 권력 일반의 모습에 지나지 않는다. 자신이 지배하는 공간에서 오히려 고립되고 왜소하고, 심지어 갇혀 있는 듯한 모습의 권력자, 그렇기에 권력자가 오히려 권력의 수인이 되어버린 모습. 그것은 역사적이기보다는 영화적이고 장르적이다.
장르에 의한 역사적 맥락의 삭제. 어쩌면 그것이 <남산의 부장들>이 역사를 대하는 태도일 것이다. <남산의 부장들>은 역사적 맥락과 멀리 떨어져 있음에도 불구하고 너무도 매끄럽게 실제의 역사적 결말에 도착한다. 이와 관련해서 가장 흥미로운 장면은 영화 엔딩의 육군본부와 남산(중앙정보부) 사이에서 망설이는 김규평의 내적 망설임을 부감으로 보여주는 장면이다. 물론 그는 육군본부로 차를 돌렸고, 그 선택의 결과로 그는 사형을 선고받는다. 그것이 역사적 사실이다. 하지만 영화는 김규평이 남산이 아닌 육군본부를 택한 것이 그 자신에게, 그리고 한국의 현대사에 어떤 의미인지에 대해서 말하지 않는다. 장르적 인물인 김규평에게 중요한 것은 역사적 맥락이 아니라 누아르 특유의 분위기다. 그렇기에 <남산의 부장들>은 한국 현대사에 너무도 중요한 한 단면을 보여주면서도, 그 역사적 맥락보다 장르적으로 이 순간을 묘사하는 데 더 공을 들인다. 역사적으로 이 장면을 이해하지 못한다 해도 장르적으로 충분히 즐길 수 있으면 족하다. 그것이 탈역사 시대의 장르영화를 즐기는 방법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김규평이 헬리콥터 안에서 부마항쟁을 내려다보는 장면은 무엇보다 상징적이다. 김규평이 역사적 사건을 신적 위치에서 조망하면서도 그 주위를 맴돌기만 할 뿐 그 속에 함께하지 못하는 것처럼, <남산의 부장들> 역시 역사의 주변을 맴돈다. 하지만 우리가 기억해야 하는 것은 이러한 역사적 태도가 우민호의 연출에서 놓친 결함이 아니라 그가 연출 전략으로 선택한 결과라는 것이다. 한국 현대사의 가장 민감한 소재마저도 이처럼 장르적으로 표현할 수 있다는 자신감, 그것은 탈역사 시대의 영화가 존재하는 방식이다. 우리는 장르영화를 즐길 것인가, 탈역사의 시대를 한탄할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