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비평]
<페인 앤 글로리>에서 페드로 알모도바르 감독이 고백한 고통과 영광에 대하여
2020-03-12
글 : 김지미 (영화평론가)
노쇠한 몸이 일깨워준 삶의 비밀

※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페드로 알모도바르는 영원히 늙지 않을 것 같은 감독 중 하나였다. 현란한 색감과 다감한 정서, 정신없이 몰아치는 사건과 한마디 대사로도 급변하는 갈등 구조. 시각적으로나 서사적으로 그의 영화는 과도하게 역동적이었다. 그 과도함이 누군가에게는 강력한 유혹이 되었고, 누군가에게는 거리를 두게 했다. 솔직히 그의 초기작에 대해 나는 후자에 가까웠다. 가까이하기에 너무 소란스러운 당신이었다. 난장판 소극 같던 초기작을 벗어나 <라이브 플래쉬>(1997)를 기점으로 알모도바르의 작품은 정제되어갔다. 소동은 갈등으로, 욕정은 욕망으로 깊이를 확보해갔다. 그럼에도 그의 작품에는 여전히 완벽히 동의하기 어려운 지점들이 지뢰처럼 도사리고 있었다. 폭력적인 집착이나 헌신의 탈을 쓴 맹신이 사랑이라는 단어 안에 스며들었으며, 윤리적인 딜레마들이 감상적이고 비약적인 결말과 함께 황망히 남겨지기도 했다. <욕망의 낮과 밤>(1989)이나 <라이브 플래쉬>처럼 상대방의 의지와 상관없이 자신의 호감을 일방적으로 밀어붙이는 주체의 태도가 실제로는 순수한 사랑이었다는 결론은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그녀에게>(2002) 역시 명백한 폭력을 ‘사랑’의 딜레마나 ‘믿음’과 ‘기적’ 사이의 모호한 지점에 남겨두었다.

잔잔한 주름처럼, 더 섬세해진 의미의 결

알모도바르에게 ‘어머니’는 가장 핵심적인 모티브이며 늘 논쟁적인 해석을 불러일으키는 대상이었다. <내 어머니의 모든 것>(1999)을 비롯해 그의 작품은 늘 어머니에 대한 가장 뿌리 깊은 신앙을 재현한다. 그리고 전복시킨다. 창녀와 어머니가 아무렇지 않게 결합되고, 아버지를 거세한 자리에 어머니를 새겨넣는다. 알모도바르의 어머니들은 자식에게 헌신하면서 과도하게 군림한다. 그래서 그 어머니들은 어른이 되려는 아이들에게 거부당하고, 결국 관계는 단절된다. 어머니는 뒤늦게 용서를 구하며 다가오지만 화해는 유보되곤 했다.

알모도바르의 신작 <페인 앤 글로리>는 그의 작품 세계에서 틀림없이 새로운 분기점으로 기록될 만한 작품이다. 이 영화는 ‘늙음’에 대한 ‘고통’ 어린 선언이며, 이전까지 자신의 영화가 선사했던 ‘영광’에 대한 회한 어린 자기 성찰이다. 그는 이 작품에서 자신이 빈번하게 다루었던 소재를 모두 다룬다. 하지만 그것들을 담아내는 시선은 이전과 확연한 차이가 있다. 예년 작품들이 뿜어내던 역동적인 에너지는 현격히 잦아들었다. 이 작품에서 관객은 나이 든 알모도바르를 느낄 수 있다. 늙음에는 주름이 있다. 잔잔한 주름의 결이 세월의 흔적을 보여주듯, 이 영화에는 더 섬세해진 의미의 결이 보인다. <페인 앤 글로리>에서 알모도바르는 안토니오 반데라스를 자신의 페르소나로 다시 불러들였다. <욕망의 낮과 밤>은 알모도바르의 이름을 세상에 널리 알린 출세작이었다. 자신의 감정이 진정한 사랑이라는 확신에 차 포르노 스타를 납치한 청년을 연기했던 반데라스는 그 영화가 낳은 최고 히트 상품이었다. 반데라스는 할리우드를 뒤흔드는 최고 매력남으로 단박에 등극했다. 하지만 그를 할리우드로 이끄는 초대장이 된‘라틴 러버’ 이미지는 그곳에서 그가 일하는 동안 벗어날 수 없는 이미지의 철창이 되었다. 할리우드영화에서 반데라스가 보여줄 수 있는 것은 그저 다른 버전의 ‘조로’들일 뿐이었다.

<페인 앤 글로리>의 반데라스는 영화감독 살바도르 말로가 되어 그에게 명성을 가져다준 이미지의 감옥을 벗어났다. 염색하지 않은 머리는 반백이 되었고, 포마드로 늘 단정했던 곱슬머리는 제멋대로 뻗쳐 있다. 그런 모습으로 그는 떨어진 물건을 주울 때면 쿠션을 가져다 무릎을 받쳐야만 간신히 집을 수 있는 중년 감독을 연기한다. 살바도르의 삶은 말 그대로‘페인 앤 글로리’, 상처와 영광으로 가득하다. 그것은 모두 그의 영화적 커리어들과 연관된다. 독보적인 명성을 얻었고, 오랫동안 사랑받았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어머니와 소원해졌고, 애인을 잃었고, 배우와 등을 돌렸다. 살바도르는 자신의 초기작 <맛>의 리마스터링 기념 상영회 관객과의 대화(GV)행사에 초청된다. 시사회 이후 보지도 않았던 영화를 32년 만에 처음으로 다시 보고 새로운 애정을 느낀다. 두문불출하던 살바도르는 GV 초청을 승낙하고, 그 영화 이후 관계를 끊은 주연배우 알베르토(아시에르 에테안디아)를 찾아간다. 육체적 통증과 불면으로 고통받고 있던 살바도르는 알베르토와 함께 헤로인을 하며, 자신의 과거– 주로 돌아가신 어머니에 대한 기억- 를 여행한다. <페인 앤 글로리>의 살바도르는 <나쁜 교육>(2004) 속 엔리케의 귀환이라고 볼 수 있다. 영화감독인 살바도르와 엔리케의 내면은 창작욕과 비례하는, 배우에 대한 애증으로 가득 차 있다. 감독에게 배우는 언어와 같다. 언어는 우리의 생각을 담아내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도구다. 그렇지만 우리에게 허용된 가장 효율적인 도구이기도 하다. 배우는 감독의 작품에 육체를 입히는 도구지만 동시에 자기를 표현하려는 욕구를 가진 존재다. 그래서 도무지 연출자의 마음처럼 움직여주질 않는다. 성가시지만 영화를 만들려면 포기할 수 없는 도구/존재다. 우리의 말들이 때로는 의도치 않은 결과를 가져오는 것처럼, 감독의 의도를 배반한 배우의 연기가 오히려 더 좋은 결과를 낳을 때도 있다. 우리는 늘, 우리의 의도 이면에 무엇이 있는지 알 수 없다. 때로는 의도가 행위 이후에 당도하기도 한다.

살바도르는 <맛>을 만들 당시 알베르토의 연기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는 건조하고 절제된 연기를 원했지만 알베르토는 과도하게 진중한 연기를 했다. 살바도르는 그것이 알베르토가 헤로인에 취해 있었기 때문이라며 그를 혐오한다. 그래서 그 영화 이후 알베르토를 다시 보지 않았다. 하지만 32년 후 그들을 갈라서게 한 바로 그 헤로인이 그들의 관계를 다시 만들어주는 연결고리가 된다. 알베르토의 치부인 헤로인중독을 실시간 전화 통화 GV에서 폭로한 것을 사죄하며 살바도르는 자신의 단편 <중독>을 그가 연극 작품으로 만들 수 있도록 건넨다.

<중독>에는 살바도르가 왜 헤로인에 취한 알베르토의 연기를 그토록 증오했는지, 그 진짜가 담겨 있다. 살바도르가 <맛>을 만들 즈음 그의 애인 마르셀로는 헤로인에 중독되어 있었다. 그는 마르셀로를 구하기 위해 애썼지만 불가능했다. 살바도르는 결국 “사랑하는 사람을 구하기 위해서는 사랑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는 것을 깨닫고 그 관계에서 벗어난다. 살바도르가 <맛>을 용인할 수 없게 만든 알베르토의 헤로인중독은, 실상은 마르셀로를 포기할 수밖에 없었던 자기에 대한 혐오와 마르셀로를 잃은 상실감의 투사 대상이었다.

<나쁜 교육>의 엔리케 역시 사랑하는 이그나시오를 약물중독(정확히는 약물남용을 가장한 살인 교사와 방조)으로 잃었다. 대신 그는 그 과정을 담은 영화를 얻었다. 그는 자신의 첫사랑인 이그나시오라며 다가온 앙헬에게 빠져든다. 사실 앙헬은 이그나시오를 사칭한, 그의 동생이었다. 엔리케는 실제 삶과 자신이 만든 영화 속에서 이그나시오를 연기하고 있는 앙헬의 부조리함을 알면서도 이를 용인한다. 영화의 마지막 신을 찍은 뒤, 진실을 알게 된 그는 앙헬을 비난하며 버린다. 이 영화의 에필로그는 앙헬과 공모자가 서로를 죽음으로 몰아넣는 파괴적인 관계에 이르게 된 반면, 엔리케는 ‘열정’적으로 영화를 만들며 ‘영광’을 쌓아갔음을 알려준다. 그러나 실제로 엔리케는 윤리적 가책에서 자유로울 수 있었을까?

영광의 이면에 남은 감정의 앙금들

<페인 앤 글로리>는 알모도바르의 영화들이 쌓아준 ‘글로리’의 뒷모습을 솔직하게 드러낸다. 즉 그의 이전 영화에서 내적으로 다뤄지지 않았던, 성공 이면의 남아 있는 감정의 앙금들을 다루고 있다. 살바도르는 만나는 이들에게 자신은 더이상 영화를 만들 수 없다고 말한다. “영화는 강인한 체력을 요구하는 작업인데 불행히도 나는 할 수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의 비서나 주치의는 그 의견에 동의하지 않는다. 그의 에너지 고갈은 신체적인 것이라기보다 정신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결국 그는 “허리 수술과 어머니의 상실”, 그 어떤 것으로부터도 완벽히 회복되지 않았다고 고백한다.

<페인 앤 글로리>는 살바도르의 노쇠한 육체가 어떻게 그를 창작 부재의 상태로 만들었는지를 보여주며 시작된다. 수영장 물속에 잠긴 살바도르의 벗은 몸을 훑는 카메라는 그의 등에 깊이 팬, 수술의 흔적을 보여준다. 계속해서 “왜 내가 영화를 더이상 만들 수 없는지”를 설명하는 살바도르는, 자신을 둘러싼 모든 것들과의 관계에서 “왜 내가 영화를 만들어야만 하는지”를 계속 발견하게 된다. 하지만 이전과는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노쇠한 그의 육체는 ‘열정’이 넘치던 시기에 그가 볼 수 없었던 것들을 보게 한다. 그를 매료시켰던 영화 속의 물 이미지와 사운드는, 이제 실재가 된다. 그는 물에 몸을 담가 스스로를 치유하는 중이다. 달라진 육체가 경험하게 한 달라진 삶은, 그에게 다른 영화의 세계로 가는 문을 열어준다.

살바도르는 알베르토의 조바심을 이해하게 된다. 그리고 자신의 육체적 고통을 경감시켜주는 헤로인에 중독된다. 생명 같았던 연인 마르셀로를 떠나보낼 수밖에 없었던 ‘중독’을 뒤늦게 경험하면서, 살바도르는 좌절과 자포자기로 가득 차 쓰레기같이 흘려보냈던 마드리드에서의 젊은 날들을 용서하게된다. 먼 세월과 깊은 감정의 골을 지나 자기 앞에 선, 자기처럼 반백이 된 마르셀로를 포용할 수 있는 자신을 발견한다.그리고 자신이 감당하기 어려운 고통으로 기록했던 젊은 날에 대해, “그곳은 힘든 곳이었지. 하지만 우리에게는 그때 그것이 필요했어”라고 말할 수 있게 된다. 이것이 아마도 <나쁜교육>이 다루지 못했던 엔리케의 이면일 것이다.

이와 같은 태도의 전환은 어머니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알모도바르의 영화에서 다양하게 변주되었던 유년의 기억들–신학교와 고향의 이웃들 그리고 무엇보다 어머니- 이 다시쓰인다. 알모도바르의 ‘어머니’들은 사랑받지 못했다. 그들은 자신이 아들/딸을 위해 헌신했다는 것을 빌미로, 혹은 어떤 공포로부터 그들을 보호하려 했다는 것을 변명 삼아 아이들의 성장을 방해하는 존재로 그려졌다. <줄리에타> <내 어머니의 모든 것> 그리고 <귀향>에 이르기까지 어머니들은 아이들에게 아버지를 감췄다. 아버지의 실체를, 아버지의 죽음을, 아버지의 부도덕을. 그래서 아버지가 받아야 할 비난과 살해 욕망의 대리 투사물이 되었다. 사춘기에 이른 아이들은 ‘어머니는 나의 세계를 이해할 수 없다’며 먼 길을 떠나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

어머니와의 화해가 결말에 암시되기도 했지만 완성되지는 못했다. <페인 앤 글로리>는 그 어머니 옆에 앉아 그녀의 이야기를 듣는다. 영화에 대한 어머니의 이야기를 듣는다. 그녀는 영화를 통해 자신이 보낸 유년기에 복수하는 아들에게 불만을 표시한다. 그리고 헌신한 자신의 삶을 인정하지 않는 아들에게 서운해한다. 알모도바르의 이전 영화에서 어머니가 아이들에게 늘 용서를 구해야 했던 것과 달리 살바도르는 어머니의 원망을 듣는다. 그리고 “그냥 전 제 자신이었을 뿐이었는데, 엄마를 실망시켜드렸어요. 정말 죄송해요”라고 답한다. 이 장면은 왜 알모도바르 영화에서 어머니들이 그런 방식으로 그려졌는가에 대한 가장 명료한 자기 분석이다.

어머니는 살바도르에게 이렇게 말한다. “나는 너를 낳고, 네 성공을 위해 희생했다.” 어머니의 이 말을 어떤 자식이 이길 수 있을까? 자식의 내면은 이 말을 인정하거나 인정하지 않거나 전쟁터가 된다. 그녀의 희생을 인정한다면 그 희생에 얼마나 부합하는 성공을 이뤘는지를, 인정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나는 당신 없이 잘 버텨왔는지를 증명해야 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우리가 저 문장에서 부정할 수 있는 최대치는 그들의 희생이다. “나는 너를 낳고”는 부정할 도리가 없다. 거기에 이 모든 관계의 시발이 있고, 결코 끊어낼 수 없는 애증의 고리가 있다. 제아무리 우월한 이성을 가진 인간이라도 육체를 부정할 수 없다. 그리고 그 원초적인 육체의 시작에 어머니가 있다. 어쩌면 알모도바르의 영화들은 이 육체의 시원에서 결코 벗어날 수 없는 정신적인 노역의 다양한 버전을 보여줬는지도 모른다. 그의 영화에는 아무리 벗어나려고 발버둥쳐도, 혹은 아무리 만족시키려고 해도 더 큰 희생과 지배로 다가오는 거대한 어머니들이 등장하기 때문이다. <귀향>에 이르러서야 간신히 그는 귀신으로 돌아와 실제가 된 어머니와 화해의 제스처를 취할 수 있었다.

<페인 앤 글로리>는 노쇠한 육체적 상태에 이르게 된 감독의 시점에서만 볼 수 있는 것들에 관한 영화다. 살바도르가 알베르토의 연기에 대해 토로했던 그 불만은 알모도바르의 자기 고백이라고 봐야 한다. ‘중독’에 빠진 알베르토가 만들어낸, 참을 수 없는 진중함과 리듬감. 그것이 알모도바르의 초기작 아닌가. 살바도르의 글 <중독>이 알베르토의 헤로인중독이 아닌, 자신의 유년기와 영화 그리고 사랑에 관한 것이라는 점은 이를 뒷받침한다.

살바도르가 자신의 ‘첫 번째 열망’이었던 에두아르도가 그린 그림을 손에 넣었을 때 <페인 앤 글로리>는 완벽한 결말에 이른 것처럼 보인다. 영화 안에서 제기된 모든 질문은 답을 찾은 듯했다. 살바도르의 말대로, “그림은 도착해야 할 곳에 도착했다”. 관객이 충만한 위안을 얻으며 영화의 문이 닫히려는 그 순간, 알모도바르는 지금까지 관객이 본 모든 것을 다시 ‘영화’로 만든다. <페인 앤 글로리>의 마지막 영화 촬영 장면은 이 영화 자체를 다시 수신자를 찾는 편지로 전환시킨다. 그래 이것은 영화일 뿐이지, 삶은 그렇게 만족스러운 답을 주지 않지.이 영화의 결말은 실재와 영화를 누벼낸 멋진 주름을 만든다.알모도바르는 분명히 늙었다. 그러나 소진되지 않았다. 이 영화가 그 완벽한 증거다.

관련 영화

관련 인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