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뉴스]
<기생충> 흑백판 최초 공개 이후 밝혀진 사실들
2020-02-20
글 : 김현수
색이 사라지면 질감이 남는다

<기생충> 흑백판이 2월 26일 국내 개봉을 앞두고 있다. 봉준호 감독과 홍경표 촬영감독, 컬러리스트가 숏 하나하나의 콘트라스트를 조정해서 만들었다는 흑백판은 국내 개봉에 앞서 제49회 로테르담국제영화제 목소리 부문에서 최초 공개됐다. 다음은 <씨네21> 1243호에 실린 김혜리 기자의 ‘로테르담국제영화제 <기생충> 흑백판 공개 현장에서 오간 이야기들’ 기사에 실린 내용을 중심으로 최초 공개 이후 밝혀진 사실 몇 가지를 정리해봤다. 흑백 영화에 대해 봉준호 감독이 평소 <씨네21>과의 인터뷰에서 밝힌 생각도 함께 덧붙였다.

1. 프레임 안의 선들이 두드러진다

<기생충>에 등장하는 여러 요소에 대한 해석이 온라인을 강타하면서 ‘선’에 대한 관심도 높아졌다. 영화에 등장하는 유리창에 선이 있고 그것이 어떤 구획을 나눈다는 식으로 해석한다. 이에 대해서 로테르담 상영 후 질문이 나왔다. “프레임 안의 선들이 흑백판에서 더 두드러지게 보인다”는 의견에 대해서 봉준호 감독은 “부잣집 통유리창의 선은 안에 있는 사람을 완벽하게 지켜주는 선”인 반면에 “가난한 반지하 집의 창문 라인은 취약”하다는 점, 즉 외부의 침투가 용이한 넘기 쉬운 선임을 강조했다. 같은 선일지라도 넘을 수 있는 선과 그럴 수 없는 선의 묘사가 다르다는 점, 그것이 흑백판에서는 더욱 또렷하게 보일 수도 있겠다는 예상을 하게 된다.

2. 계급의 차이가 더욱 처절하고 슬프게 느껴진다

봉준호 감독은 흑백판을 두 번 관람한 뒤, “처음에는 나 자신이 영화의 스토리로부터 안전해지는 느낌을 받았고, 두 번째는 외려 더욱 강렬하고 잔인하게 다가왔다.”고 말했다. 흑백판의 그러데이션 속에서 더욱 “상이한 계급의 인물들이 ‘구분 짓기’를 하려고 몸부림치는 모습은 컬러판보다 더욱 처절하고 슬퍼 보였다.”는 것. 아직 흑백판을 보지는 못했지만 이를 테면 믿음의 벨트 시퀀스에서 기택이 문광을 모함하면서 지어 보이는 어두운 표정들, 탐욕을 숨긴 채 약자를 공격하려는 생존 본능에 대한 움직임, 박사장이 선을 넘으려는 기택을 짓밟기 위해 하는 행동, 표정, 충숙이 만드는 짜파구리의 시커먼 자태, 그리고 기택네 집과 동네를 가득 메우는 흙탕물 등이 흑백판에서 더욱 잔인하고 처연하게 느껴지지 않을까 예상해본다.

3. 벌써 17개국 개봉이 확정됐다

<기생충> 흑백판은 미국, 프랑스를 비롯한 17개국에서 관객을 만날 예정이다.

4. “흑백판 제작 충동을 느낀 건 오직 <마더>와 <기생충> 뿐이다”

봉준호 감독은 자신의 연출작 중 오직 <마더>와 <기생충>만 흑백판 제작에 대한 충동이 일었다고 말했다. 대체 두 영화에 어떤 공통점이 있기에 흑백의 충동이 일었을까. 잘은 모르겠지만 일단 두 영화 모두 어떤 중요한 장면에서 ‘돌’이 등장한다.

5. 컬러 버전보다 시각적 충격이 약해지는 장면이 있다

봉준호 감독은 바로 위의 스틸컷에서 보여주듯 홍수 장면의 흙탕물이 출렁이는 장면에서 농도 조절에 주의해야 했다고 말했다. 반면에 흑백 버전에서 거꾸로 시각적 충격이 약해지는 장면도 있다고. 해당 장면에 대한 언급은 <씨네21> 1243호를 확인하시길.

6. 프로덕션 디자인의 질감에 주목하게 된다

시각적 콘트라스트가 중요한 <기생충>에서 컬러를 없애는 것이 오히려 대담한 선택 같다는 질문에, 봉준호 감독은 “색이 없으면 텍스처에 더 집중할 수 있다.”고 답했다. 박사장의 집과 기택의 집의 선과 질감이 다르기 때문일거라 추측해본다.

7. 모스부호 장면이 더욱 근사하게 느껴진다

혹시나 아직 <기생충>을 보지 못한 관객도 있을 수 있으니 모스부호에 대한 자세한 언급은 생략한다. 봉준호 감독은 로테르담영화제 공개 이후 반응이 더 좋으면 독자적인 흑백 영화를 만드는 것도 가능할 것 같다는 이야기를 전했는데 <기생충> 곳곳의 고풍스러운 요소들이 흑백과 묘한 조화를 이루는 것 같다. 아마도 그래서 더욱 봉준호 감독이 흑백판에 끌렸으리라 추측해본다.

8. 영화의 수직성이 강조된다

흑백판과 직접적인 연관성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어느 관객이 <기생충>은 수직적으로 철저히 구조화된 영화인데 왜 2.35:1의 화면비를 택했냐고 묻자, 봉준호 감독은 “와이드스크린에서 카메라가 움직이는 편이 수직성을 더 강조할 수 있다”고 답했다. 그는 과거, <괴물>을 찍을 때도 수직성을 강조하기 위해서 비슷한 선택을 한 적 있다. <괴물>에서는 투신 자살자가 나오는 프롤로그, 현서(고아성)가 괴물의 아지트에 갇혀서 기어오르지 못하는 설정 등 한강을 수평적 공간이 아니라 층이 있는 수직적 공간으로 바라보기 위해 화면비율을 1.85:1로 택한 바 있다. “<괴물>은 버티컬한 강(江)영화라는 점이 핵심이었어요.”

9. 봉준호 감독은 적록 색약판정을 받은 적이 있다

봉준호 감독은 영화 제작 공정 가운데 연출 외에 다른 파트를 맡게 되면 스틸 사진작가나 사운드 믹싱을 하고 싶다는 말을 한 적 있다. “사운드를 디자인하고 배치하고 밸런스 맞추는 작업이 제일 행복”하다고. 직접 촬영을 하는 것은 주저하게 되는데 그 이유로 자신의 눈에 자신이 없어서라고.

”신체검사에서 적록 색약판정을 몇 번 받아서 색에 관련된 작업을 할 때면 불안해져요. 남의 눈에는 다르게 보이지 않을까 싶어서.”

사진 CJ 엔터테인먼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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