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에 대한 사랑을 이야기하는 지면과 그 덕분에 맺을 수 있었던 수많은 인연. 그중에서 배우 배두나는 단연 <씨네21>이 지지하고 눈여겨본 독보적인 배우였다. 할리우드 배우, 천만 배우, 일본 아카데미상 수상자, 패셔니스타 등 그를 표현하는 수많은 수식어가 있지만, 가까이에서 본 그는 아침부터 김이 모락모락나는 식빵을 여러 덩이 구워와 표지 촬영 현장에 있던 모든 이들에게 권하는 사려깊은 사람이었다. 생각해보면 작품 속에서 그는 선입견 없이 누군가에게 곁을 내어주는 따뜻한 캐릭터를 연기했다. 학대당하는 소녀를 살뜰히 보살피는 경찰(<도희야>)이었고, 좀비 역병이란 난관 앞에서도 “추위가 물러가고 봄이 오면 이 모든 악몽이 끝날 것입니다”라고 말하는 의녀(드라마 <킹덤>)였으며, 살인사건으로 아들을 잃은 노년의 여성에게 자신의 옥탑방에서 함께 지내자고 제안하는 강력반 형사(드라마 <비밀의 숲>)였다. 그 자신도 “잘하는 게 진심을 보여주고 마음을 보여주는 연기”라고 이야기했지만 배두나는 결코 마음으로 움직이는 인물만을 연기하는 배우가 아니다. 프레임 속에서 그는 괴물과 정면으로 맞서 활을 쏘고(<괴물>), 왼손으로 탁구를 쳤으며(<코리아>), 날렵하게 거구의 남성에게 공격을 가하는(드라마 <센스8>) 몸 연기도 곧잘 해냈다는 점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2002년 <씨네21>에서 한해를 빛낼 스타로 불렸던 그가 이제는 도저히 한 가지 빛깔로 정의할 수 없는 연기자가 되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비밀의 숲> 시즌2 촬영 중에 귀한 시간을 내어준 그와의 대화를 옮긴다.
-드라마 <킹덤> 시즌2는 봤나. 시즌1과 비교해서 어땠나.
=공개한 날 집에서 봤다. (웃음) 박진감 넘치고 그동안 뿌렸던 떡밥을 회수해나가는 게 너무 재밌었다. 시원시원하고 사이다 같은 느낌.
-서비(배두나)는 시즌2에서 주인공 이창(주지훈)과 악역 조학주(류승룡) 양쪽을 다 오가는데 아무도 경계하지 않는다.
=서비가 양쪽에서 공존할 수 있는 이유는 어느 쪽에도 완벽히 속해 있지 않아서다. 연기할 때도 의녀로서 어떤 것에도 휘둘리지 않고 가는 그녀의 우직함에 초점을 맞췄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서비가 스파이 같아 보였을 거다. 시즌2에서 서비는 이창을 위해서라면 살려서는 안되는 조학주를 살린다. 서비라면 계략을 품고 조학주를 살려내서 궁에 침입할 생각까지는 못했을 것이다. 그리고 서비가 전문적으로 의술을 배웠을 거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녀는 의녀 중 한명일 뿐이고 의원에게 많은 의술을 전수받지 못했을 것 같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더듬더듬 투박하게 생사역의 비밀을 찾아내고 사람을 살려야 한다는 강한 신념을 가졌다. 영화마다 들어가는 이유가 있고 내가 해야 하는 역할이 있다. <킹덤>에선 멋있게 보이거나 똑똑해 보이는 쪽에는 관심이 없었고 생사역을 진짜처럼 느끼게 하는 역할이라 생각했다.
-현재 촬영하고 있는 드라마 <비밀의 숲> 시즌2는 어떤 이야기인가.
=<킹덤>처럼 시즌1이 끝난 시점에서 시작하진 않는다. 여진(배두나)의 머리카락이 긴 채로 등장하는 것만 봐도 <비밀의 숲> 시즌2는 시즌1으로부터 시간이 흐른 상태에서 이야기가 시작됐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시청자들이 긴 머리카락을 보고 눈치를 챌 수도 있을 것 같은데 액션 연기는 많지 않다. 이야기의 후반부에 조금 있을 뿐이다. 긴 머리카락은 액션 연기를 할 때 짐덩어리다. 여성 시청자들이 확실히 <비밀의 숲> 시즌2를 좋아할 것 같다. 함께 출연하는 전혜진 선배와도 좋은 케미를 선보일 예정이다.
-서비와 여진 모두 심성이 따뜻하고 사람들을 돕는다. 백성들의 고혈을 짜는 세도가 조학주나 감정을 느끼지 못하는 검사 황시목(조승우) 같은 냉정한 캐릭터를 맡고 싶지는 않은가.
=잘하는 게 진심을 보여주고 마음을 보여주는 연기여서 이쪽으로 쓰이는 거 같다. (웃음) 냉정한 연기를 할 순 있는데 내가 재미가 없을 거 같다. 울렁울렁하는데 어떻게 그걸 숨기고 연기를 하겠나. 다만 냉정함 안에 숨기는 감정이 있는 캐릭터면 재밌을 거 같다. 냉혈한이라고 해서 완벽하게 감정이 없는 건 아니니까.
-<비밀의 숲> 시즌1에서 주요 목격자이자 성매수자에게 공격당해 생명이 위태로운 여성에게 “목격자든 아니든 살아. 그런 놈한테 지지 마. 무서웠잖아 끔찍했잖아. 그딴 걸 이 세상 마지막 기억으로 가져가지 마. 살아”라고 말하는 장면이 뭉클했다.
=요즘 사이버성범죄 관련 뉴스를 보면서 영화배우로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일까 생각했다. 그리고 여성이 성적으로 학대를 받는다거나 그런 신이 있는 영화와 드라마는 앞으로 피하겠다고 다짐했다. 여성이 성적으로 학대당하거나 이유 없이 벗는 영화와 드라마가 아무렇지 않게 만들어진다. 이유가 타당하고 아름답게 사랑하는 장면에서는 벗을 수 있다. 그러나 그렇지 않은 영화가 생각보다 많다. 앞으로 여성을 학대하는 장면이 있는 작품에는 참여하지 않을 것 같다. 학대를 당하는 캐릭터가 내 역할이 아니더라도 못 참겠다.
-오랫동안 꾸준하게 연기를 해오고 있다. <플란다스의 개>와 <고양이를 부탁해>로 영화배우로서 가능성을 선보인 뒤 <린다 린다 린다>에 도전해 일본영화 현장을 경험했다. 그리고 천만 영화 <괴물>로 영화배우 배두나로 인정을 받았을 때쯤 할리우드로 훌쩍 떠났다가 최근 <비밀의 숲>과 같은 웰메이드 드라마로 친근하게 돌아왔다. 이같은 판단을 내릴 수 있는 비결이 무엇인가.
=들뜨는 걸 싫어해서 일본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우수여우주연상(<공기인형>)을 받으면 본능적으로 KBS 드라마 <공부의 신>으로 돌아왔다. 너무 칭찬하면 ‘나 그 정도로 괜찮은 사람 아닌데’라고 생각하고, 비난받으면 ‘나는 괜찮은 사람인데’라고 생각한다. 중도를 맞추려고 노력한다. 그래야 내가 상처받지 않는다. <클라우드 아틀라스>를 찍고 나서 할리우드 배우라고 불렸는데 사실 그것도 불편했다. 아니, 나는 그냥 배우다. 나는 어릴 때부터 괜찮은 배우였고 지금도 그냥 그정도로 괜찮은 배우다. 너무 거품이 끼면 나는 오히려 <도희야>와 같은 작품으로 돌아온다. 어떤 작품이든 3억원짜리 독립영화도 대본이 좋으면 한다.
-최근 한국영화계에서 복제인간을 다룬 <서복>, 우주를 배경으로 한 <승리호> 등 SF 장르의 영화가 시도되고 있다. 누구보다 일찍 SF 장르에 도전했고 요즘 화제인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에 출연했는데 장르와 플랫폼을 알아보는 눈이 밝은 건가.
=나는 생각보다 흘러가는 대로 사는 사람이다.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 <센스8>는 캐스팅 제의가 들어와서 출연한 거지 그전까지 넷플릭스가 뭔지 몰랐다. 일본·미국·프랑스 진출을 계획하고 내린 결정이 결코 아니다. 캐스팅 제의가 왔을 때 섹스돌(<공기인형>), 클론(<클라우드 아틀라스>), 왼손잡이 탁구선수(<코리아>) 모두 재밌겠다 싶었다. 내게 피가 되고 살이 되는 경험일 거 같으니까 해본다. 다만 어릴 때부터 매체를 따지지않고 연기했다. <플란다스의 개>를 찍고 <자꾸만 보고 싶네>라는 일일연속극과 <엄마야 누나야>라는 주말연속극에 동시에 출연했다. <플란다스의 개>로 청룡영화상 신인상을 탔지만 나는 일주일 내내 볼 수 있는 배우였다. 연기를 배워야겠다고 느껴 고두심 선생님이랑 윤여정 선생님이 나오는 작품을 함께했다. 영화가 드라마보다 더 가치 있다는 이야기도 듣기 싫어했고 보란 듯이 왔다 갔다 했다.
-15년 전 10번째 영화 <괴물> 촬영 당시 <씨네21>을 만나 “나는 뭘해도 신선한 상태고 꼭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더라도 다르게 표현하는 모험의 시기”라고 했다. 지금 배우로서 자신은 어떤 시기에 있는 것 같나.
=뭘 해도 신선하지 않은 시기? (웃음) 도움닫기하려고 준비하는 시간 같은데 왠지 이 시기가 지나면 더 훨훨 날지 않을까 싶다. 지금은 재정비하는 시기다. 활발히 활동하는 와중에 마음은 그렇다. 실제로 <괴물> 이후에 엄청 신선한 도전들을 많이 했다. 근데 문제가 뭐냐면 도전에는 중독성이 있다는 거다. <센스8>처럼 아침저녁으로 운동하고 개인 시간없이 스스로를 채찍질하는 작품을 하지 않을 때 나 자신이 나태해져 보인다. 그래서 요즘 연기에 대한 근본적인 고민도 많이 한다. 그전까진 캐릭터가 가지고 있는 특이함에 많이 묻어갔다면 요즘에는 좀더 근본적인 질문을 하게 된다.
-차기작 <바이러스>에서 어떤 역할을 맡았나.
=연기하는 옥택선은 평범한 영어 번역가다. 갖고 있는 재능이 발휘되지 않아서 자신감도 없고 우울한 이 여성이 어느날 사랑에 빠지는 바이러스에 걸린다. 그리고 한없이 낙천적이고 긍정적으로 변한다. 김윤석 선배가 백신을 연구하는 박사이고 내가 그런 바이러스의 보균자다.
-마지막으로 <씨네21>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추억은 무엇인가.
=사실 <씨네21>은 내 영화 인생의 전부를 함께했다. 1999년에 데뷔했는데 그 뒤로 20년 동안 다른 영화잡지들은 모두 사라져갔다. 데뷔했을 때부터 함께했던 잡지라서 집 같고 이상한 유대감을 가지고 있다. 한마디로 특별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