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의 고향> 제작 동서영화기업사 / 감독 윤용규 / 상영시간 76분 / 제작연도 1949년
1945년 8월 15일 일제의 패전으로 식민지 조선은 해방을 맞았다. 이때부터 1948년 남북이 각각 단독정부를 수립하고 1950년 6·25전쟁으로 충돌하기까지 약 5년간, ‘조선영화’는 남한의 ‘한국영화’와 북한의 ‘조선영화’로 나뉘어졌다. 해방 이후 국제사회에서 한반도를 지칭할 때 여전히 조선이라는 명칭을 사용한 것처럼, 해방기 영화계 역시 일제 시기에 이어 조선영화라고 불렀고, 이러한 호칭은 1948년 8월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에도 계속되었다. 호명의 문제에서 짐작해볼 수 있는 것처럼, 이 시기 한국영화는 후기(탈)-식민주의 과제부터 좌우 이데올로기의 대립, 그리고 국가와 영화의 관계까지 해방기의 어지러운 정치사회상을 몸소 새기고 있다. 우선 해방기 극영화의 대표작 <자유만세>(1946)와 <해연(일명 갈매기)>(1948)부터 생각해보자. 해방 1주년을 기념해 영화인들이 의기투합한 <자유만세>와 건국 프로파간다와 예술성을 두루 만족시키고자 만든 <해연>은 남한의 단독정부가 수립된 이후 극장 상영이 중지되었다. 두 작품 모두 출연한 배우들의 월북 문제가 불거졌기 때문이다. 원래 러닝타임이 100분이었던 <자유만세>는 박학, 독은기 등 월북 영화인의 출연 장면이 잘려나간 51분 버전이 살아남아 ‘한국영화’로 공인받았고, <해연>은 2014년 일본에 있던 필름이 발굴된 덕분에 검열로 잘려나가지 않은 온전한 버전을 만날 수 있다. <마음의 고향> 역시 이 시기 한국영화의 운명인 월북 영화인 관련 쟁점에서 자유롭지 않다.
프랑스와 일본에 있던 영화의 귀환
영화 <마음의 고향>은 1948년 8월경 제작에 들어갔다. 원작은 함세덕의 희곡 <도념(동승)>으로, 1939년 3월 극연좌가 처음 무대에 올렸다. 영화를 기획하고 제작한 이강수가 곽일병이라는 예명으로 희곡을 각색했고, 연출은 일본 도호영화사 출신인 윤용규가 맡았다. 1913년 대구에서 태어난 윤용규는 하루야마 준이라는 일본 이름으로 도요타 시로 감독의 연출부에서 활동했다. 도요타가 연출한 <고지마의 봄>(小島の春, 1940), <우리 사랑의 기록>(わが愛の記, 1941) 등의 작품에서 조감독 크레딧으로 기록된다. 남한에서 그의 활동은 1948년 3월 <꿈이 그리워>라는 작품의 연출을 맡았다는 기사에서 처음 발견되는데, 이 영화는 제작에 들어가지 못했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 직전 영화의 역할이 그 어느 때보다 중요한 시기였지만, 당시 영화계는 기재도 부족했고 필름조차 구하기 힘든 상황이었다. 촬영은 역시 일본 도호 출신인 한형모가 맡았고, 배우로는 변기종(주지), 최은희(미망인), 석금성(미망인의 모친), 김선영(도성의 모친), 남승민(공양주), 최운봉(황선달) 등이 출연했다. 촬영기사 한형모와 배우 중 앞의 세명은 이후 한국영화계에서 활동했고, 감독 윤용규와 뒤의 세 배우는 6·25전쟁을 전후한 시점에 월북해 북한영화계에서 활동했다.
이 영화는 1948년 12월에 완성해 이듬해 2월 9일 개봉했다. 신파 양식을 탈피한 문예(예술)영화의 등장에 문화예술계는 환호했고, 1950년 2월 일본 상영이 추진된 것에 이어, 6·25전쟁 발발 직전에는 한불문화교류의 첫 상영작으로 선정되어 파리로 보내졌다. 이후 감독과 주요 출연진들이 월북했지만 동족상잔의 비극적 상황에 이슈가 되지 못한 채 영화의 존재는 묻혀버렸다. 필름이 소실된 것으로 생각됐던 <마음의 고향>이 다시 알려진 것은 1993년의 일이다. 그해 프랑스 퐁피두센터에서 ‘한국영화 70년 회고전’이 대규모로 개최되었는데, 이를 준비하던 한국영상자료원은 프랑스에 거주 중이던 제작자 이강수씨가 이 영화의 16mm 프린트를 한벌 가지고 있다는 정보를 입수한다. 아마도 그는 전쟁 발발을 전후한 시기 일본으로 건너간 것으로 보인다. 생전 그의 증언에 의하면, 일본에서 거주할 때 네거티브(원본)필름은 잃어버렸고 프랑스로 이주하면서 부피가 작은 16mm 프린트만 들고 갔다고 한다. 영상자료원은 그로부터 받은 16mm 프린트에서 35mm 프린트를 만들어 행사를 잘 치를 수 있었다. 다행히 35mm 오리지널 네거티브도 찾았다. 2005년 일본의 국립필름아카이브로부터 원본 필름이 보존되어 있다는 연락을 받았고, 이를 복사한 마스터 포지티브필름으로 수집할 수 있었다. 현재 우리가 볼 수 있는 비교적 깨끗한 영상이 바로 이 버전이다.
담담한 화법, 기품 있는 미장센
이 영화는 어머니를 그리워하는 어린 스님 도성(유민)과 그의 새어머니가 되어주려는 미망인 그리고 아들을 찾고 싶은 친어머니의 이야기를 담담하면서도 세련된 화법으로 묘사해, 개봉 당시 해방기영화의 최고 수작으로 평가받았다. 모터가 없는 핸드크랭크식 카메라 파르보(Parvo)에 다른 카메라의 렌즈를 붙여 촬영하는 등 당시의 열악한 기술 여건에도 불구하고 아름다운 풍광을 담은 화면이 인상적인 작품이다. 대부분의 장면이 세트가 아닌 로케이션 촬영으로 이뤄진 점이 미학적 장점으로 승화된 것이다. 영화는 불경 소리만 들리는 조용한 산사의 풍경으로 시작한다. 졸린 눈을 비비며 타종을 하는 것으로 출발하는 도성의 고된 일상은 노래를 부르며 새를 잡으러 다니는 동네 아이들의 모습과 대비된다. 도성의 어머니 역시 절에서 자랐는데, 사냥꾼과 눈이 맞아 도망갔다가 다시 세살짜리 도성을 절에 버려두고 개가했다. 주지 스님이 어미의 죄를 타고 난 도성이 수양으로 공덕을 쌓아야 한다고 말하는 이유이다. 친모를 기억하지 못하는 도성은 남편에 이어 아들까지 잃고 사십구재를 지내러 온 아씨가 어머니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아이리스로 열고 닫는 도성의 꿈 장면, 서울에서 온 아씨가 친어머니로 나와 도성에게 깃털부채를 만들어달라고 한다. 하지만 아씨/친모가 사라지자 놀란 도성은 “어머니… 엄마”라고 울부짖으며 꿈에서 깬다. 이는 영화의 결말을 예비하는 것이다.
영화평론가 정성일도 언급하듯이, 이 영화의 가장 훌륭한 순간은 미망인과 친모가 만나는 장면이다. 도성이 서울로 간다는 소식을 들은 친모는 미망인을 찾아와 도성을 자기가 데려가게 해달라고 부탁하고, 미망인은 단념하는 대신 금전적 도움을 주겠다고 말한다. 하지만 방으로 들어온 도성이 미망인에게 어머니라고 부르며 다가앉아 서울 가면 학교에 갈 수 있다고 좋아하자(친모의 클로즈업에서 소리만 들리는 숏) 친모는 좋겠다며 도성에게 염주를 건네고 떠난다. 이 신은 카메라가 인물에 다가갔다 멀어지는 단순한 움직임으로 구성되었지만, 두 여성의 시선의 교환, 대사와 침묵을 교차시키며 가장 극적인 순간을 만들어낸다.
결국 도성은 새어머니와 친어머니, 어느 누구와도 떠나지 못한다. 어머니에게 줄 깃털부채를 만들기 위해 도성이 산비둘기를 죽인 것이 밝혀져 주지 스님은 도성이 서울로 나가기로 한 결정을 되돌리기 때문이다. 뒤늦게 빨간 연꽃이 보이는 염주의 주인을 알게 된 도성은, 친모가 흐느껴 울던 나무 앞에 멈춰 엄마라고 부르며 서럽게 운다. 다시 산사의 아침이 시작된다. 하지만 타종을 해야 하는 도성이 사라졌다. 도성이 없으니 물지게도 빗자루도 그냥 놓여 있다. 다른 스님의 타종 소리가 들리는 순간, 봇짐을 진 도성은 산사를 떠나 마을로 향하고 있다. 식민지 시기 조선영화 <수업료>(1940)에서 월사금을 구하기 위해 먼 길을 떠나던 영달은 씩씩하게 출발했지만 어두운 숲길에서 울고 말았다. 한편 세상으로 나선 도성의 얼굴에는 엷은 미소가 번진다. 과연 도성의 앞날은 어떻게 될까. 이 영화에 정치적 알레고리의 대입을 고려하게 만드는 대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