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경쟁에 오른 감독들 사이에서 단연 많이 언급된 작품은 조은 감독의 <사당동 더하기 33>(이하 <사당동 33>)이었다. <사당동 33>은 가난한 북한이주민(월남피난민)과 농촌 이주민들이 모여 살던 사당동 주민 정금선 할머니의 4대를 기록한 다큐멘터리다. 1986년부터 녹음기로 정금선 할머니의 목소리를 담았던 사회학자 조은은 1997년부터 카메라를 구해 금선 할머니네 가족을 촬영하기 시작했다. <사당동 33>은 당시부터 2019년 11월까지의 기록이다. 그 사이 7살이었던 막내 손자 덕주는 마흔이 되었고 두 아이의 아빠가 되었다. 조은 감독과 함께 작업했던 이들은 성장해 다큐 감독, 방송국 카메라 감독으로 활동하고 있다. 누군가는 착실한 연구라고 말할 수도 있고, 누군가는 시대의 다큐라고 할 수 있는 뜨거운 작품 <사당동 33>을 만든 조은 감독을 전주에서 만나 이야기를 나눴다.
-전작 <사당동 더하기 22>(이하 <사당동 22>)로 2010년에 전주국제영화제를 찾았다. 당시와 이번의 작업 방식이 어떻게 달랐는지 궁금하다.
=<사당동 22>는 철거 과정이 훨씬 중요한 작품이었다. <사당동 33>은 거기에 단순히 11년을 더 붙인 게 아니라 아예 새로운 컨셉을 잡은 것이다. 가난한 가족과 가난을 연구하는 연출가의 관계가 훨씬 더 많이 드러난다. 익숙한 다큐 문법을 따르지도 않고 기승전결이 있지 않다. 아마 내가 사회학자이기 때문에 자유롭게 다큐의 문법을 해체했다고 생각한다. 다만 연출한 장면은 없고 가족과 만나면 자연스럽게 촬영했다. <사당동 22> 다 찍고 나니까 가족이 “이제 교수님 안 오시는 거에요?”라고 하더라. “안 오지는 않을 거야”라고 답했다. 하지만 계속 찍을 거라고 말하진 않았다. 가족이 신촌에서 열린 서울국제영화제에 참석해서 다큐를 봤기 때문에 이들이 과연 자연스럽게 나올 수 있을까 고민됐기 때문이다. 가족과 왕래했지만 <사당동 22>가 나오고 난 뒤에 6개월 이상 카메라를 쉬었다.
-화면에서부터 오랜 세월이 느껴진다. 중간에 화면비가 바뀌고 영상 화질 차이도 느껴진다.
=그동안 총 여섯 대의 카메라를 쓴 것 같다. 처음 사용한 건 베타캠이란 아날로그 카메라였다. 그 다음으로는 파나소닉 P2 카메라를 썼다. 8mm, 6mm 테이프를 넣어 촬영했는데 배터리가 너무 빨리 닳았다.(웃음) 막 대중화되기 시작한 소형 디지털 카메라도 섞어 썼다. 그리고 가장 최근에는 FHD 화질의 영상을 SD카드에 저장하는 핸디캠으로 촬영했다. 처음 촬영할 때 동국대 영화학과 학생들과 함께했는데 영화에서 정말 많은 가난을 봤지만 진짜 가난한 모습을 처음 봤다고 하더라. 촬영자가 어딜 찍어야 할지 몰라 카메라가 이리저리 흔들리기도 한다.
-<사당동 22>에 이어 상징적으로 <사당동 33>을 완성하고 싶었을 것 같다.
=<사당동 22>를 완성했을 때 한 방송국의 초청을 받아 대담에 나갔는데 <사당동 더하기 44>를 만들면 어떠냐는 이야기를 들었다. 웃으면서 “<사당동 더하기 44>는 자신 없고 <사당동 33>은 모르겠네요”라고 답했다. 그 나이까지는 만들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사당동 필드연구에 들어간 지 11년 만에 카메라를 잡았고, 그로부터 11년 만에 <사당동 22>를 완성했다. 그리고 11년이 흐른 지금 <사당동 33>을 만들었다. 다큐를 보면, 33년이란 시간은 어떤 면에서 별거 아닌 것처럼 느껴진다. 가난의 측면에서 보자면 33년이란 세월에도 불구하고 인물들이 쳇바퀴 돌듯이 돈다. 전작에서도 그랬지만 숫자에 방점을 안 찍고 싶다. <사당동 33>은 가난한 과거를 담은 게 아니라 우리의 다음을 생각하게 하는 작업이었으면 한다.
-목회자의 꿈을 가진 첫째 손자 영주가 교회에서 설교하는 장면에서 기적이 일어날 줄 알았다. 가난하지만 꿈을 가지고 노력해서 감동적인 설교를 할 것 같았다. 하지만 그런 기대가 무참히 깨지더라. 가난의 구체를 본 것 같다. 작업 중에 조은 감독이 본 가난의 가장 구체적인 모습은 무엇인가.
=얼버무리는 언어. 지역 언어는 있다고 생각했지만 우리 사회에 계급 언어가 있다는 걸 몰랐는데 다큐 작업을 하면서 알게 됐다. 이 영화에는 우리말 자막이 있다. 우리말 자막 없이는 도저히 참고 볼 수 없다는 피드백을 받았기 때문이다. 가족이 무슨 말을 하는지 못 알아듣겠다고 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사당동 22>때도 할머니 말을 알아 들을 수 없어서 한글 자막을 달았는데, 그땐 할머니가 연세가 많고 북한에서 왔기 때문에 그런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손자 세대도 무슨 말을 하는지 잘 못 알아듣겠더라. 이것이 우리 사회의 계급 언어구나 싶었다. 이들은 자기 의사를 분명하게 표현할 일이 없다. 그래서 발음이 불분명하고 항상 웅얼거리듯이 말한다. 세련된 언어로 말할 필요도 없는 삶을 살아간다.
-책 <사당동 더하기 25>에 “빈곤층 여성들에게 가난한 가족으로부터의 피난처는 사랑이다. 그리고 그 사랑은 다시 가난의 덫이 된다”라고 썼다. 증손녀 지선이의 사례가 그런 경우인 것 같다. 남자 문제로 왕따를 당해서 중퇴한 지선이는 17살때 남자친구의 차를 타고 가다가 불이 나서 화상 당한다. 화상을 입은 뒤 중학교 검정고시를 준비하겠다고 했는데.
=결국 검정고시를 못 봤다. 책도 다 사줬는데 시험 보러 가는 날 아팠다고 하더라. 그런 결과를 개인적인 이유로만 보고 가난한 사람들은 게으르고 자기 동기부여가 약하다고만 말할 수 있는데, 어려움을 얼마나 길게 견딜 수 있는가는 다 자원과 관련된 게 아닌가 싶다. 지선이는 한달만 참고 학교를 다녔으면 중학교 졸업장을 받을 수 있었다. 어려움을 견뎌야 하는 시간들에 대한 감이 스스로 없고 옆에서 알려주는 사람도 없는 것이다.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에서 “너는 다 계획이 있었구나”라는 대사가 나왔듯이, 실제로 수일 아저씨도 계획이란 말을 자주 사용했다. 마치 자기 최면이나 주술처럼 썼다. 하지만 이들의 삶에 계획이란 게 있기 정말 어렵다. 극영화가 가난을 다룰 때 상상력을 발휘하지만 <사당동 33>은 상상이 끼어들 틈이 없는 가난에 대한 이야기다. 중산층 관객들은 <사당동 33>을 보고 가난한 사람들은 연애도 참 잘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가난한 사람들에게 사랑이란 로맨스의 영역이 아니라 생존의 영역이다. 증손녀 지현, 지선이도 가출해서 남자친구네 집에서 살아가는 장면이 나온다. 그곳이 가난한 가족에게서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도피처이기 때문이다.
-“이 가족의 생존에 대한 의지와 강인함은 경계가 없었다. 가난의 무게를 담을 수 없었다.”라는 자막이 작품의 마지막에 뜬다.
=그들의 생존에 대한 의지와 강인함에는 정말 경계가 없다. 우리가 생각하는 경계들 이를 테면 도덕성과는 관계가 없는 삶을 산다. 지금은 나이를 먹어서 하루 앞날을 계획하기 어렵지만, 아들 수일 아저씨는 젊었을 때 너무너무 열심히 살았다. 셋째 손자 덕주 내외도 정말 열심히 산다. 최근 덕주의 아내 주희와 연락했는데 부부 둘 다 새벽에 배달노동을 하고 있더라. 덕주는 낮에는 헬스 트레이너로 일하고 새벽에는 택배 물류 센터에서 일한다. 주희도 낮에는 아이를 돌보고 새벽에 택배 물류 센터 일을 한다.
-한 편의 다큐를 통해 생각이 많이 바뀌었다.
=나 역시 빈곤 형태가 그런 형태로 변할 거라는 생각도 못했고 다문화 가정이 생길 거라고 생각도 못했다. 수일 아저씨가 연변에서 부인을 데려올 때는 언론에서 국제결혼에 대해 다루지도 않을 때였다. 그래서 너무 놀라 더 찍어야 겠다 생각했다. 영상으로 말하기나 글쓰기가 보편화할 수밖에 없는 시대다. 과거 글을 쓸 때 원고지 칸 메우듯이 사회학자든 기자든 영상으로 글쓰는 건 해볼 수밖에 없는 일이다. 선배 학자로서 말한다면 경계를 넘어서는 일들을 겁내지 않았으면 좋겠다.